숙덕숙덕, 매일이 싸움, 지리멸렬 격한 싸움 공부였거든?
가을이 가는 소리 11월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뚝뚝 떨어져 구르는 계절이 머잖아 나목의 계절이 되겠지. 이래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르나 보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이름이다. 체로키족은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이라 부르고 카이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이라고 한다. 크리크족은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이라니, 시가 따로 없다.
내친 김에 11월을 '다시 시작하기 좋은 달'이라 이름해 본다. 숫자 말고 이름으로달마다 이름하면? 1월은 늑대달, 3월은 벌레달, 8월은 붉은달, 11월은 비버의달.... 우리말 동짓달 섣달처럼 일년 열두달을 각각 부를 이름을 주고 싶다. 나라는 사람도 납작한 이름으로 불리기 싫다고, '싸움 공부'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
이 "다시 시작하기 좋은 달"에 내게 중요한 시작을 했다고 자랑하려 한다. 이달 마지막 주에, 미뤄오던 새책 쓰기를 브런치북 <숙덕숙덕 싸움 공부> 연재로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 연재 두번 째 꼭지를 쓰자고 컴 앞에 앉아서, 시집을 읽다가, 11월이란 달의 이름과 의미를 생각하다가, 이리저리 의식이 흐르는대로 쓰고 있다. 한 주 두꼭지씩, 3월 첫주에 30꼭지를 채우는 계획이다. 늦가을과 겨울은 내게 '책쓰기 좋은 계절'이 되겠다.
책쓰기 중심으로 일상과 공간과 시간을 조금씩 정리하는 한 달이었다. 집안에 버릴 물건들도 내가고, 책장에서 옷장에서 뺄만한 것들을 빼고, 진행하던 글쓰기팀 '와글와글 페미글방' 벗들과 올해 마무리모임도 했다. 지난 한 해 지지부진하던 소모임 '별을 품은 사람들'도 만나 내년 활동을 새롭게 계획했다. 세월호로 별이 된 아이들을 기억하며 살고자 하는 우리의 진심은 변함없음을 확인하며 다시 시작하는 달이었다.
숙덕숙덕 싸움 공부, 이런 가제로 책 쓰기를 다시 시작하기 좋은 계절에 시작할 수 있어서 기쁘다. 무슨 싸움을 얼마나 하려고 책 제목에 싸움이 들어갔냐고? 산다는 게 다 싸움 아닌 게 있던가? 숙덕숙덕, 매일의 일상이 싸움이었고, 지리멸렬하고도 격한 싸움 공부를 해야 하지 않던가?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미용실에 가서 머리에 변화를 줘 볼까? 잠깐 생각하다가 맘을 접는다. 흰머리 단발파마 를 아주 숏커트로 잘라 볼까? 상상하니 제대로 분위기 변화 되겠다. 내년에 결혼하는 막내 아들이 겨울에 상견례를 할 것 같은데, 그때를 위해 무난하게 긴 머리카락 유지하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다간 에잇! 자식 결혼식이 뭐라고 엄마들은 머리 하나 맘대로 못하고 전전긍긍하나, 심톨이 난다.
왜 결혼식장에서 엄마들은 모두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올림머리에 한복을 입는 거야?
아버지들은 왜 한복 안 입고 양복을 입지?
엄마들이 입고 싶은대로 입고 자유롭게 산발한 머리로는 왜 안 돼?
기분이 별로다. 나 생긴대로 개성대로 자유로운 머리와 옷으로 자식 결혼식 한 번 해 보고 싶다. 아들 둘 결혼사진이 똑 같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 내가 똑 같은 머리에 한복 차림일 걸 생각하니 너무 재미없다.
이런 게 싸움이 될 수 있는 세상인 걸 나는 큰아들 훈이 결혼식 때 경험했다. 대안이 딱히 떠오른 건 아닌데, 남들처럼 똑같은 차림은 싫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러나 훈의 장모께서 예식복은 한복을 원하시니, 엄마도 그렇게 하면 좋겠단다. 선택지가 없었다. 내맘대로 개성대로 따위 잊고 똑 같은 머리와 색만 다른 똑 같은 한복으로 식을 치렀다. 아, 너무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내 모습을 또 연출하고 싶진 않은 이 맘.
"60이 넘도록 살아온 삶이 얼굴도 개성도 다른 게 자연스러운 거 아냐? 두 엄마가 왜 똑 같은 머리 똑 같은 옷을 입어야 해? 이번엔 머리도 예복도 내 개성대로 해보고 싶어. 두 엄마가 꼭 같을 필요 없잖아?"
나는 석이한테 내 의견을 미리 천명했다. 첨 듣는 소리도 아닌 바, 석이는 내 맘을 수용했다.
"그래, 엄마 맘에 좋은 대로 하자. 바지저고리 생활한복이든 양장이든 엄마 맘에 드는 걸로 입고 엄마가 하고 싶은 머리로 하는 거야. 좋아."
여성이 자기 원하는 머리모양을 하고 입고 싶은 옷을 입기 위해 이처럼 다른 누군가의 재가를 얻어야 할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맘에 드는 머리를 하고 원하는 옷을 입고 싶은 거 아닌가? 이게 격한 '싸움'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만한 문제인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잘 보여준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 반대 시위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건 격한 싸움의 한 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히잡 없이 머리카락을 내놓고 돌아가니겠다고 저항하던 여성 활동가 한 사람이 죽임 당해야 했다.
둘째 아들 석이 결혼식에서 아무튼 나는 내가 원하는 머리모양과 내 뜻에 맞는 옷을 입고 싶다. 이 엄마의 소박한 욕망은 과연 문제적인 걸까? 충족될 수 있는 갈망일까?큰 일도 이닌 거 같은데 뭘 그리 야단이냐고? 맞다. 큰아들 결혼식에서 못 해본 짓을 둘째 때는 꼭 해보리라 맘을 다진다. 다시 시작하기 좋은 달이니까.
나희덕의 시 '머리카락 깃발'을 소리내어 읽는다.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든 자르든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맘대로 아직 다 못 하는 세상이다. 지구 저쪽엔 머리카락이 무서운 싸움이 되지, 암. 이런 시시한 문제 속에 엄청난 싸움이 있다는 말이다. 그 싸움에서 죽임 당한 여성 마흐사 아미니를 기억한다.
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깃발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모아 깃대에 묶고
그녀들은 외친다
더이상 때리지 말라고 죽이지 말라고
여자라는 이유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목숨은 없다고
2022년 9월 13일 마흐사 아미니는 윤리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로 사흘 만에 사망한 그녀는 스물두 살
그녀들은 히잡을 불태우고
함께 걸어간다 머리카락 깃발을 들고
이것은 우리의 이름
이것은 우리의 얼굴
이것은 우리의 심장
머리카락은 얼마나 오래
히잡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자궁을 열고 나온 것이
머리카락이었던 것처럼
가장 슬플 때 바람에 나부끼는 것도 머리카락
더이상 찢어질 수도 없는 깃발은
허공에 펄럭이며 외친다
이 검은 심장을 이제는 가둘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