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의 브라, 스포츠브라를 사다

복싱을 하자니 준비해야 할 장비가 더 있었다

by 꿀벌 김화숙

"운동할 땐 아무래도 스포츠브라를 하는 게 좋겠죠? 제가 노브라로 산지 11년이 넘었거든요."


하마터면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여성 관장이면 얼마나 좋을까, 입이 근질근질한 순간이었다. 0.1초 여성 전용 복싱 체육관의 여성 관장을 상상하니, 내 마음이 어느새 여성 수다 강물로 넘실대고 있었다.


"솔직히 별로 티도 안 나는 가슴이라 노브라로 살았는데 복싱은 가슴 장비를 갖추고 해야겠죠? 아니, 좀 생긴대로 하면 또 어때요, 지구상엔 여성이 노브라인 나라가 얼마나 많아요?그래도 체육관에선 얇은 티셔츠 하나 입고 뛰고 땀 흘릴 테니. 가슴 보호 장비를 마련해야겠죠?"


나는 '아담한' 가슴팍을 보란듯이 내밀며 떠들었을 테고 여성 관장이라면 맞장구를 치며 같이 웃었을 것이다.


"아 그러게요 장비가 필요하긴 하죠. 노브라로 사셨다니 부러워요. 제 맘 같아선 편한 대로 하시라 하고 싶지만, 장비를 갖추는 게 운동하긴 더 좋아요. 복싱이 운동량도 많고, 체육관이 여성전용이면 좋겠지만...."


그러게 말이다. 난생처음 왔지만 귀신같이 직감하는 중이었다. 젊은이들 눈엔 흰머리 할머니일텐데 노브라 가슴까지 보일 필요야. 11년 만에 브라를 입게 생겼다.


"자유를 반납할 생각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네요. 운동에 재미들이다 보면 적응하겠죠? 솔직히 완경 이후엔 호르몬 변화로 유두도 작아지고 가슴 티도 별로 안 나는데. 보세요, 이전에도 출근할 때만 했지 집에선 노브라로 지냈거든요. 에효.... 스포츠브라 장비를 장만해야죠."


"네, 저도 운동하며 많이 겪었어요. 가지가지 스포츠브라를 바꿔 보기도 하고 노브라로도 해 봤죠. 근데 스포츠브라는 운동 장비 맞아요. 가슴이 훨씬 편하게 운동할 수 있거든요. 파이팅입니다!"


이런 여성 수다는 상상이었을 뿐, 현실 남성 관장한테는 가슴 걱정 1도 없는 편한 소리만 들어야 했다.


"잘 먹고 잘 쉬다 월요일 오세요. 운동복 바지랑 실내용 편한 운동화 한 켤레만 가지고 오면 돼요."


몸 준비도 장비 준비도 부담 안 주려는 맘 같았다. 60대 아줌마가 복싱을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지구력은 있지만 순발력이나 근력은 형편없이 꽝인 나. 처음엔 살살 조금씩 적응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와, 생각보다 스포츠브라 패드가 너무 두껍게 느껴지는 걸? 좀 더 얇아도 될 거 같은데?"

스포츠브라를 입어 보며 나는 자꾸만 낯설어하고 석이는 괜찮다고 한다.


"아냐 엄마. 가장 얇은 패드로 주문한 게 그래. 하나도 안 두꺼워 보이고 자연스러워."

"내가 볼 땐 굳이 가슴에 힘을 준 거 같아 어색한데? 그냥 패드 떼 버리면 어떻지?"

"아냐 엄마. 그럼 너무 얇아져서 브라 하는 효과가 없지. 신경 안 쓰일 정도로 딱 알맞아 보여."

"그래? 세탁하고 쓰다 보면 조금 더 납작해지고 더 자연스러워지겠지?"

"엄마가 노브라로 워낙 티 안나는 가슴에 익숙해서 그래. 전혀 도드라져 보이지 않아."

"그런가? 일단 물에 잘 헹궈 널어 말리면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려나."


인터넷 주문으로 장비들이 오니 막내 석이를 eH 귀찮게 했다. 운동하는 아들이라 내가 믿으니까. 엄마 스포츠브라며 추리닝바지 운동화 그리고 머리띠까지 고르고 클릭하고 주문해 준 아들이니까. 이제 스포츠라 입어보는 엄마의 패션쇼 수다 동무도 해주는 거다.


11년 만에 다시 입는 브라다. 과거에 하던 브라들과 달리 와이어도 없고 어깨끈도 등에 훅도 없는 까만 스포츠브라. 부드러운 감촉의 민소매 티셔츠를 복부 아래는 잘라내고 상반부만 입는 느낌이랄까. 유방 부분에만 얇은 패드가 안에 덧대어 있다. 운동장비 잘 아는 아들이 어련히 잘 골라 주었겠냐만, 어색하다. 거울 앞에서 줄넘기하듯 뛰어보니 출렁임이 적고 편안한 건 사실이었다. 운동화나 등산화로 걸어 다니던 시대가 가고 스포츠브라 입고 체육관에서 하는 복싱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스포츠브라를 검색해 보았다.


"신체 운동 과정에서 여성의 유방을 지탱해 주는 브래지어"라고 나온다. 물론 조깅과 같은 운동에서 겉옷으로 입도록 디자인된 것도 있다. 일반 브라보다 튼튼한 구조라 가슴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불편함을 완화한다. 운동 도중에 일어나는 가슴의 움직임으로 인한 통증 및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용도란다. 신체 활동 정도에 따라 유방의 조절 정도가 다를 수밖에. 요가나 걷기 정도는 '가벼운' 조절, 사이클이나 파워 워킹은 '적절한' 통제, 테니스, 축구, 조깅은 '단호한' 조절, 그리고 복싱과 승마는 '최대한의' 조절이란다.


복싱은 가슴 조절이 '최대한'으로 요구되는 운동으로 분류돼 있다. 평범하고 단순한 스포츠브라나마 사길 잘했다. 격한 운동에서 남의 눈 보다 더 중요한 건 가슴이 보호되는 거겠다. 내가 그동안 강도가 가장 낮은 걷기를 주로 했으니 노브라의 자유를 누렸을 테다. 이제 몸을 제대로 쓰는 운동을 하게 되는 거다.




영화 <세계의 주인>의 주인이를 생각한다. 몸동작이 크고 운동 잘하고 활동적인 여고생이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한 아픔이 있지만 주인이는 '피해자 다움'과 거리가 먼 캐릭터다. 더러 더러 버럭 화를 분출할지언정 평소엔 농구에 태권도 운동 잘하고 남자애들과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게 산다.


윤가은 감독은 서수빈 배우를 보고 "바로 주인이로구나" 했다는 대목도 기억난다. 배우가 연기해서 보여주는 주인이 말고 서수빈 그대로가 주인이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덕분에 배우도 용기를 얻어 자기 안에 있는 주인이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단다. 서수빈 배우는 앞으로 필모그라피를 어떤 캐릭터로 채우고 싶냐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백엔의 사랑>의 이치코(안도 사쿠라)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케이코(기시이 유키노) 같은 여성들. 몸을 제대로 쓰는 진한 스포츠영화를 해보고 싶다."


그 말이 오래도록 내게 남았다. 영화 속 주인이도 태권도를 했지만, 실제 서수빈 배우는 태권도 4단 유단자다. 영화 보는 내내 몸놀림이 다르게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주인 역을 하며 "그냥 나여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는 말 뜻도 더 이해됐다. 사람은 몸이고 몸으로 사니까. 몸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것까지 말하니까. 배우가 언급한 두 영화 속 여성들처럼 말이다.


우리 딸 모야를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몸을 쓸 줄 알고 몸으로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자전거 롤러브레이드 수영 야구 축구 태권도 등, 하는 운동마다 몸을 잘 쓰고 동작이 좋고 잘하던 딸. 수험생 생활하느라 최근엔 몸을 제대로 써서 운동하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딸. 어서 시험 끝내고 머리와 몸을 같이 쓰며 살 수 있길, 노래하던 격투기도 배울 수 있길 응원한다.


내가 복싱하는 흉내에 그치지 않고 몸을 제대로 쓰며 배울 수 있길 바라본다. 스포츠브라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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