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덕숙덕 복싱 클럽

머리와 가슴과 입과 몸이 같이 움직이는 게 좋은 배움이겠지

by 꿀벌 김화숙

"여기는 복싱을 전문으로 하는 곳인데요?"

접수대 쪽에서 운동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네 알고 왔어요."

그는 표정을 살짝 풀며 접수대로 나를 안내했다. 내가 예상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첫인사다. 신발을 신은 채 들어서는 나를 보고 그가 급히 밖에 있는 실내용 슬리퍼를 신도록 안내했다. 신발을 갈아 신고 접수대 앞으로 다가가 내가 또박또박 말했다.

"복싱 배우고 싶어서 왔는데요."

그가 환한 얼굴로 반응한다.

"아, 그러시군요. 멋있습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놓인다. 자리에 앉으며 체육관 안을 재빠르게 둘러본다. 제일 안쪽에 복싱 링이 있고 그 앞 창가엔 러닝머신을 비롯해 온갖 운동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고 홀 가운데는 크고 작은 샌드백이 천정에 철제 거치대에서부터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휴~~ 안 받아준달까봐 들어올 때 살짝 긴장했잖아요."

그는 관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럴 리가요. 잘 오셨어요. 하긴 남성은 70세도 오는데 중년 여성은 드문 경우이긴 하네요. 하지만 어차피 복싱은 개인교습이라 각자에게 맞게 지도해 드리니 문제 될 거 없어요."

아싸, 신난다, 이게 뭐라고, 복권에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다시 휴~~ 숨을 내쉬며 다가가 앉았다.


관장이 안내지 같은 걸 내놓으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혹시 허리 괜찮으실까요? 디스크 수술한 적 있다거나."

전혀 아픈 데 없다고 답하자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다른 관절은요? 무릎, 발복, 고관절, 팔목.... 불편한 덴 없을까요?"

다시 한번 없다고 말하며 고개까지 저어 보여주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평소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나는 맨날 걷고 동네산 가끔 쏘다니는 정도라고 심드렁하게 답해줬다.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머리숱이며 잘 씹는 치아와 걷는 관절, 이런 시험에 통과하는 건 다 엄마가 물려주신 선물이다.


"멋지네요. 건강해 보이세요. 좋습니다."

또 한 번 멋지다는 칭찬이다. 60대 중반에, 복싱을 배울 생각을 한 건 내가 멋져서라기 보단 관절이 받쳐주는 덕분이겠다. 쨉쨉 훅, 흰머리를 날리며 폴짝폴짝 뛸 수 있는 내 몸이 고맙다. 근질근질 어서 뛰어보고 싶다. 막상 시작해 보면 안 따라주는 몸에 한숨 쉬더라도 말이다. 시설 이용, 강습 안내, 장비며 비용 등을 친절하게 설명한 후 관장이 말했다.

"생각해 보고 결정해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어라? 돌아가란 소리 같았다. 시장 조사만 할 수도 있지만 지금 내 맘은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 계절을 집필과 운동에 집중할 작정이라 결정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월요일부터 오란다. 글러브와 핸드랩을 빨간색으로 고르고 신청서 목적 난에 '체력단련'이라 쓰고 사인했다. 그리곤 폭풍질문했다.


"격투기 하나 배우자고, 딸하고 몇 년 전부터 노래를 했거든요. 작년인가? 저 건너 초등학교 옆 동네 걸어가다가 복싱 체육관 있어서 불쑥 들어간 적 있어요. 입구에서 바로 거절당했어요. 안 받아준대요. 왜냐고 따질 엄두도 못 내고 돌아섰어요. 우리 아들이 그러대요? 복싱 도장에서 처음엔 줄넘기만 엄청 시킬 거니 각오하라고. 그래요? 그럼 오늘 줄넘기라도 좀 하면 안 돼요? 처음엔 살살 가르쳐주실 거죠?...."


그렇게 난생처음 복싱 강좌에 등록했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다. 3개월 치 할인가 39만 원에, 필수장비(글러브 4만 원, 핸드랩 2만 원, 줄넘기 1만 원) 값과 운동복(티셔츠)과 사물함 이용료 2만 원 합해 48만 원 결제했다. 겨울 집필모드 완료! 글 쓰다가 달려가 땀 흘리리며 운동하고 또 쓰고, '동안거' 준비완료다.




격투기 하나쯤 배우자고 처음 생각한 건 4년도 더 전이었다. 영화 <에놀라 홈즈 1>을 보고 토론할 때 딸과 의기투합했다. 몸 쓰는 싸움은 고사하고, 싸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여자로 살 수만은 없다. 싸움이란 내 뜻과 상관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 거다. 그러니 복싱 정도 배워줘야 해. 입으로만 그랬다.


이번 책을 쓰며 제목에 대해 짝꿍과 수다를 떨 때였다. 연재 브런치북 시작할 땐 잡은 제목이 어떻냐, 밋밋하다, 매력적인 제목 좀 생각해 봐, 별의별 제목을 주고받았다. <싸움의 기술>이 직관적이고 좋긴 한데 같은 제목의 책들이 있어서 변별력이 없어서 버리기로 했다. <움 클럽>이었다가 <싸움 공부>였다가 <싸움 연구소>도 나왔다. 싸움이란 말 안 쓰고도 은유와 상징으로 가면 어떨까, 까지 갔다.


"차라리 직설적이지 않게 <숙덕숙덕 복싱 클럽> 어때?"

덕이 던진 제목이었다. 싸우는 이야기는 결국 치고박는 복싱이랑 딱 닮았으니, 이해도 쉽단다.

"문제는 내가 아직 복싱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거야. 1도 모르면서 복싱 클럽, 좀 웃기잖아?"

내가 조심스럽게 고백하자 덕이 자신 있게 밀어붙였다.

"복싱 배우면서 쓰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복싱한다고 노래했잖아. 딱이네. 복싱 용어는 낯설지 않아. 쨉쨉이니, 펀치를 날린다, KO패 등, 누구나 알아듣기 때문에 글이 재밌을 거야. 바로 복싱 클럽 등록하는 거야."


그렇게 브런치북 제목은 <숙덕숙덕 복싱 클럽>으로 수정됐다. 다음날 복싱 체육관 등록한 후 내 책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생각비행, 2022)를 꺼내 봤다. 4년 전 영화 <에놀라 홈즈 1>(2020) 토론하며 딸이 했던 말 "우리 격투기를 배웁시다"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에놀라는 <에놀라 홈즈 2>(2022)에서 더 잘 싸운다. 엄마와 이디스와 에놀라 셋이 격투기 주짓수로 남자 경찰들을 때려눕히는 장면을 소개하고 싶다. 100년 전, 성별이분법이 칼 같던 빅토리아 시대에, 세 여자가 격투기로 남자 경찰들과 "싸우고 이기고 도망해" 세상을 바꾼 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3분간이나 롱샷으로 이어지는 싸움 장면에 쓰인 배경음악이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합창곡 '할렐루야'였다. 긴치마 입은 세 여자가 바지 제복 입은 영국 경찰들과 격투하는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점점 더 웅장하게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음악회에서 관객이 모두 기립해 듣는 곡, "주를 찬양하라"는 노래가 말이다.


세 여자가 크고 강한 남자 경찰들을 이기고 탈출에 성공했으니 할렐루야! 맞다. 실낙원의 지긋지긋한 성별 이분법이 허물어지고 배제되고 차별받던 여성들이 싸워 이기는 새 역사를 쓴다. 이거야말로 부활 아니고 뭐냐고, 이게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주의 뜻 아니고 뭐냐고, 할렐루야! 하고 있었다.


영국 서프러제트의 리더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말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라고. 그렇다. 안 싸우는 여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다. 남성들이 여성 투표권을 위해 대신 싸워 줬을까? 여자들이 직접 싸워서 이겨야 했다. 여성 투표권을 얻고 에놀라는 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해서 더 큰 싸움을 이어간다.


복싱 체육관 등록한 후 내게 질문하게 됐다. 머리로 입으로 하던 복싱을 몸으로 하기까진 왜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을까? 몸은 안 움직이면서 머리로만 하는 걸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입으로 노래하던 복싱을 몸으로 가서 체육관 등록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이게 비단 복싱만이겠나. 안다고 생각한 걸 몸으로 해 보면 전혀 몰랐다는 걸 알게 되지 않던가. 이제 몸으로 직접 하는 복싱은 지금까지 내가 머리로 하던 것과 또 다를 것이다. 그만큼 새 도전이 될 것이다. 이래서 나는 계속 왕초보 인생이다. 책 제목은 아무래도 <숙덕숙덕 왕초보 복싱 클럽>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