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내가 본 영화를 52편 추려 정리해 본다
"그 시대가 만든 지옥 속에서 선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마그너스 본 혼 감독이 영화 <바늘을 든 소녀>를 설계하면서 중심에 둔 질문이라고 한다. 덴마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다그마르 오베르뷔 유아 연쇄 살인 사건' 실화를 가져오되, 범죄 이야기 '소비'보다는, '그 시대 그 사건이 가능했던 사회적 환경'에 더 집중하게 만들고 싶었단다. 그래서일까,100년 전 과거사가 아니라 바로 오늘 내가 사는 여기의 여성 이야기요 사회구조로 나는 보았다.
시대가 만든 지옥에서 개별 인간의 선함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가혹한 현실의 깊은 바다에 던져진 약한 존재들에게 더 그렇다. 어떻게 남성 감독이 이렇게도 탁월한 안목으로 여성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이게 궁금하니, 나는 어지간히도 젠더 이분법에 절어 있나 보다.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 서사에서 늘 빈구멍을 많이 보며 아쉬워하곤 했거든. 이 영화는 그런 틈을 안 보여 몰입해서 봤거든.
"지옥 속에서 선하게 살 수 있냐"라는 질은을 품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랬다. 여성이 사는 현실이 지옥이라고. 영화의 두 여성을 통해 그 현실을 그려냈다. 지옥에서도 선함을 유지하려는 강인함과 회복력, 그리고 폭력성까지. 반대로 영화 속 남성들은 압도적으로 매력없고 '비남성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남성의 '약함'을 탐구하게 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르겐을 보세요. 카롤리네가 임신한 상태로 그의 어머니 집에서 만나 관계를 끝내려 할 때, 그는 그 말을 하는 데 10분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같은 상황을 카롤리네가 처리하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만 보아도 그 사회에서 젠더와 계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성들이 강하거나 안정적이거나 자신감 있는 사람일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이미 여성에게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남성들이 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제에겐 흥미로웠습니다."
어느 별에서 왔기에 그는 젠더와 계급 현실을 이렇게 읽어낼까. 우리 사회어 이런 남성 감독이 있던가? 언제부터인가 남성으로 살기가 훨씬 힘들다며 징징대는 소리에더 반응적인이 사회 아니던가. 세상이 여성에게 너무 가혹하다면 남성의 현실은? 가혹하지 않다는 말 아니고말고. 감독에 따르면 남성이 굳이 강하거나 안정적이거나 자신감 있는 사람일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란다. 무슨 뜻?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이렸다.
그래서 "음울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비범하고도 불편한 작품"인데 "끔찍하고도 아름답다."
영화관에서 본 올해 마지막 영화 <바늘을 든 소녀>의 매력에 "정교한 흑백 미학"을 빠뜨릴 수 없겠다. 흑백이라서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거리감' 덕분에 초반에는 안전한 느낌을, 나중엔 더 깊이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흑백이 아니었으면 이 가혹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끝까지 보는 게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흑백이라서 오히려 예술 영화로 깊이 빠져들어가며 볼 수 있었지 싶다.
2025년 내가 본 영화들이 내가 어떤 영화에 끌리는지 보여주고 있다. 52편으로 추리고 보니 거의가 '싸움판'이다. 영화관과 OTT로, 지난 영화 다시 찾아 본 것까지 합하면 한해 100편은 넘게 봤다. 특히 12.3 비상계엄과 내란 때문에 <서울의 봄>을 올해 또 보고 다시 보고,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광장에 나갔으니, 현실 일상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싸움판 한해였다.
새해 첫 영화 <서브스턴스>는 시국 못지않게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지만 눈 부릅뜨고서 두 번 봤다. 두 번 이상 가서 본 영화는 <콘클라베>, <본회퍼>, <추적>, <세계의 주인> 등이다. 한주 한 번 이상 영화관에 간 셈인데, 온라인 구매와 다운로드까지 합치면 영화로 돈 제법 썼다. <바늘을 든 소녀>로 올해 영화를 마감하자니,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세상, 내게 너무 가혹한 세상이라 쓰지 않을 수 없다.
2025년에 내가 본 영화 베스트6를 소개한다. 개봉 순서대로다.
1. <본회퍼>와 <콘클라베> 둘 중에 고민하다가 <본회퍼>를 택한다. 여성 감독의 여성 영화로만 고르고 싶지만 남성 서사 남성 감독의 영화 <본회퍼>를 뺄 수가 없다. 시국 때문이다.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과 내란 시국에 <서울의 봄>처럼 여러 번 볼 영화다. 그러나 재미와 의미와 영감을 얻을 것이다. 나치에 부역한 독일 기독교와 윤석열에게 붙어먹는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비교 공부하라.
2. <올파의 딸들>은 계속 눈물 콧물 속에 보았다.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가 여성들을 어떻게 차별하고 억압하는지 잘 보여준다. 종교의 가르침 속에 길러진 올파의 네딸 중 두 딸이 엄마보다 한술 더 떠 근본주의자가 되어 IS로 들어간다. 이후 올파의 싸움이 시작된다. 자기 삶을 다르게 보는 싸움,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싸움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인터뷰와 재연 극요소를 가미한 독특한 형식의 실화 바탕 영화다.
3. <신성한 나무의 씨앗>의 배경은 히잡 안쓸 권리를 위한 이란 여성들의 싸움이다. 종교와 가부장제와 정치가 어떻게 여성에게 폭력이 되는지 너무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여성은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 가부장적 종교에 복종하며 목숨을 구걸하든지, 저항하고 독립하든지. 결국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다. 영화 말미에 딸들과 엄마가 아빠요 남편과 대적하는 싸움 장면이 장관이다. 결국 가부장이 죽고 영화가 끝난다.
4.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종군 사진기자 리 밀러의 실화 영화다. 이런 여성 서사를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부끄러움과 억울한 맘으로 봤다. 남성 중심 세상에서 배제되고 삭제된 여성의 역사 한 페이지를 살려낸 기분이다. 인간적이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사진 기자였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겠는가, 말이 필요 없다. 널리 알리고 싶은 여성 영화다.
5. <세계의 주인>은 올해 본 최고의 한국영화라 말하고 싶다. 지난 한해 <딸에 대하여>가 그랬듯 <세계의 주인>도 내년에 토론과 강의에서 많이 소환하게 될 거 같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서사 독립영화라 더더 마음이 간다. 윤가은 감독의 앞선 두 작품도 좋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감히 말로 다 하기 어렵겠다. 영화 속 주인이 덕에 내가 복싱을 더 열심히 하고 있다면 과장일까?
6. <바늘을 든 소녀>는 100년 전 여성 현실로 현재를 비추는 영화다. 1919년 코펜하겐, 겉보기엔 백마 탄 왕자 예르겐은 겁쟁이요 최악의 남성성을 보여준다. 반면 여성은 이런 남성들로 인해 착취당하고 고통받는다. 여성에 대한 폭력, 성차별, 재생산권, 아동인권, 전쟁의 참상 등, 그때나 오늘이나 여성은 싸움을 피할 수 없다. 폴란드계 스웨덴 감독에 폴란드에서 제작된, 앤딩크레딧이 온통 폴란드어라 내게 특별하다.
2025년에 내가 본 영화를 개봉영화 중심으로 52편만 추린다
1월: 서브스턴스, 밀레니엄 맘보, 시빌워, 미션임파스블 2, 검은 수녀들, 서울의 봄
2월: 미키 17
3월: 크러시, 콘클라베
4월: 목소리들, 갈매기가 건져 올린 소문, 본 회퍼, 애국소녀
5월: 소년의 시간, 다시 만난 조국, 올파의 딸들, 리셋
6월: 신명, 신성한 나무의 씨앗, 브링허백, 엘리오, 바다호랑이
7월: 네이키드 런치, 봄밤, 밀밭과 구름 낀 하늘
8월: 추적, 맘마로마, 파기상접, 주말의 친구들, 홍이, 어글리시스터
9월: 3학년 2학기, 케이팝데몬헌터스, 막시걸, 더 로즈: 완벽한 이혼
10월: 리벤지, 어쩔 수가 없다, 리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3670
11월: 세계의 주인, 해리엇, 버드박스, 승부, 당신이 죽였다
12월: 시민영웅, 백 엔의 사랑,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나이브스 아웃 3, 바늘을 든 소녀, 사운드 오브 폴링, 스웻, 대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