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 3편을 읽으며 나의 싸움을 생각한다
앗! 어디로 갔지?
낮에 써서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 둔 글을 저녁에 발행하려고 열었는데, 어찌어찌하다 홀랑 날려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흔적도 없다. 다 쓴 글이었는데 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알기라도 하면 덜 답답하겠는데, 모르겠다. 브런치 시스템으로 글을 쓴 게 벌써 몇 년이냐, 사라져 버린 글을 살려내는 길을 여전히 모른다. 끙끙 씨름해도 시간만 가고 마음만 상한다. 자신을 어디까지 탓할 것인가. 깨끗이 단념하고 새 글을 쓰기로 한다.
오늘 밤은 그러나 다시 기억을 되살리고 쓰고 자시고 할 마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연재를 빠뜨리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무얼 다시 쓸 것인가, 하릴없이 작가의 서랍을 뒤지고 서성인다.
이럴 때를 위해 시가 있는 거야. 좋아하는 여성 시들을 찾아 읽고 필사도 해 본다. 내 귀에 시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듯 소리 내어 읽는다. 시가 부드럽게 나를 토닥이고 내가 나를 토닥인다. 제목이 '나의 싸움'이라니, 싸움 이야기 쓰는 내 맘을 아는 시다. '탈출기'라니, 작년에 나온 내 책『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생각비행) 제목과 겹쳐 보인다. '물을 만드는 여자'라니, 여성혐오 따위 물렀거라! 고마운 시들이다.
"삶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딱 내가 복싱을 배우는 마음이겠다. 그럼 복싱으로 내가 누군가와 주먹 싸움할 일이 과연 있을까? 내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눕힐 날이 올까? 그건 잘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매 순간 싸움 속에 살고 있다. 나를 망치려는 것들과의 싸움이다.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나를 하찮게 여기는 것들, 나를 함부로 하며 내 존엄을 밟으려는 것들은 모두 나한테 KO패 당하는 거다.
그래, 다 쓴 글 날려버리는 일 따위 뭐 큰일이라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안 되는 일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거야. 덕분에 엎어진 김에 쉬어가는 시 읽기로 놀았다. 오늘의 연재 마감은 시로 지키고, 후에 수정하고 보충하기로 한다. 날려버린 글은 내 안에서 숙성하고 있을 테니, 며칠 후 더 멋지게 쓰면 되는 거야.
나의 싸움
신현림(1961~)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탈출기
천양희(1942~)
나는 오늘도 억울하게 매를 맞는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너의 부속품이 될 수는 없어
나는 너의 덧붙이개가 될 수는 없어
서른 살의 오기 시퍼런 칼날 품고
원수같이 너에게로 쳐들어간 날
살려 줘, 살려 줘
외치던 아가리 찢어지고
눈깔을 빼어 버려
벼락이 떨어지고
암흑천지 웅크린 짐승처럼 돌아누웠지
나는 너의 노예가 아니야
팔려간 노예는 더욱 아니야
전신에 기름을 빼내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늪지대 구렁 속에
네 몸통 속에 처박힐 순 없어
나는 오늘도 기진맥진
네 폭력의 포위망을 탈출한다.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1947~ )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화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