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였다, 아주 친밀한 폭력

당신이 죽였다, 아주 친밀한 폭력, 모두 내 이야기였다.

by 꿀벌 김화숙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 안 보고 싶었다. 또 살인인가, 제목을 볼 때마다 피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추천도 받았지만 뜸을 들였다. 그러나 썸네일의 두 여자가 자꾸 눈에 밟혀서 결국 클릭, 8회 차까지 정주행해 버렸다. <당신이 죽였다>라는 제목의 여운이 길게 나를 따라다녔다. 두 여자의 법정 최후진술을 옮겨 본다.


조희수(이유미): 남편과 사는 동안 저는 매일 죽고 싶었습니다. 신은 불러도 오지 않는데 남편의 발길질은 언제나 코앞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러다 알았습니다. 제가 끊어내야 끝이 난다는 걸요. 결국 저는 남편을 죽였습니다. 모든 일은 저에게서 비롯되었고 그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죄인 걸 압니다. 제가 지은 죄 온전히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조은수(전소니): 어릴 적 엄마가 맞는 소리가 들리면 저는 어린 동생 손을 잡고 옷장 속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러다 밖이 조용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밥을 먹고 TV를 봤습니다. 그때는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았습니다. (중략) 알고 저지른 죄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른다고 자신을 속이며 외면한 죄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이제 저는 압니다. 우리 모두의 비극인 걸 압니다. 저도 죗값을 겸허히 치르겠습니다.


두 여자의 법정 최후진술을 옮겨 적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릴 수도 있다.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도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는 문제가 가정폭력, 교제폭력, 또는 젠더폭력이다. 언제까지 맞고 살 것인가.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주변 사람들도 사회 시스템도 맞고 사는 여자들 편이 아님을 드라마가 잘 보여주었다. 결국 두 여자는 사적 응징으로 폭력의 사슬을 끊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겨 버린다.


희수의 폭력 남편 노진표(장승조)와 그를 우쭈쭈 하는 어머니 고정숙(김미숙)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성의 폭력을 용인하는 가부장적 시스템과, 여성이 어떻게 거기 부역하는 구조가 잘 까발려지고 있었다. 고정숙은 작가인데 아들의 가정폭력을 모른 척하는 아들바라기 엄마다. 강연에서 가정폭력 생존자 폴레트 켈리의 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시를 인용하는데, 그 위선에 내가 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가정폭력 생존자 폴레트 켈리의 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의 마지막 연이다. 그는 13년간 폭력을 당하다 탈출해서 새 삶을 살고 있는 미국 여성이다. 시에는 꽃의 여러 얼굴이 나온다. 노진표와 김정숙만 두 얼굴이겠는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폭력과 지배의 사슬로 쓰이고 죽음의 얼굴을 한다. 폭력은 꽃으로 이길 수 없다. 폭력을 떠날 만큼 힘과 용기를 내는 것만이 길임을 보여 준다.


이 시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 정희진의 책『아주 친밀한 폭력』에서였다. 가정폭력이란 언어가 아직 내게 없던 때였다. '1%에 드는 좋은 남편'과 살고 있다고 믿었기에, 가정폭은 나와 관계없는 단어였다. 아니, 그럴 순 없었는데, 내가 선택적 기억상실이었을 것이다. 나는 부모의 폭력도 경험했고, 어려서 매 맞는 아이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교회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처맞아 본 여자였지란, 아직 그 언어를 몰랐다.


오죽하면 결혼생활에 대한 내 소원이 "내가 받은 상처를 우리 아이들에게 대물림해선 안 된다"였을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스위트홈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자니 우리 엄마처럼 싸움해서는 안 됐다. 남편을 존중하고 받들고 부드럽게 사랑하면 스위트홈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중년이 되면서 불쑥불쑥 내 안에서 질문이 올라왔다. 싸움이라곤 모르기로 했는데 싸움을 거는 '복에 겨운 여자'가 돼가고 있었다. 고정숙처럼 남편을 우쭈쭈 하는 아내놀음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막연하나마 우리 부부사이의 대전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다.


10년도 더 전에 내가 짝꿍과 주고받은 대화 한쪽을 옮겨 본다.




숙: 우리 딸이 나중에 커서 나처럼 살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덕: 당신처럼? 그럼 좋지. 당신은 최고의 아내고 최고의 엄마니까.

숙: 그래? 진짜 그렇게 생각해?

덕: 그렇다니까. 요즘 애들이 당신처럼 살기 쉽지 않을 거잖아. 딸이 당신처럼만 살면 뭘 더 바라겠어.

숙: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처럼 사는 게 왜 좋아? 내 딸이 기껏 나처럼 산다?

덕: 뭐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숙: 생각해 봐. 똑똑하게 공부하면 뭐 해? 결혼하면 기껏 평생 남편 비위 맞추느라 전전긍긍하는 게 일인데. 감정노동, 남편 체면, 남편 권력, 그 아래서 자기 개성도 주장도 없이 알아서 기어야 해.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 우리 딸이 올인하며, 알아서 기는 생활 하면 당신은 보기 좋다는 거야?

덕: 왜 그래? 다 그렇게 살잖아. 안 그러고 가정이 잘 유지되겠어?

숙: 내가 그렇게 안 살고 싶다면? 딸이 본 데 없이 나처럼 밖에 못 살까 난 미칠 거 같은데? 내가 과연 예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일까? 아니면 가부장제의 종일까? 내 딸이 나처럼 산다? 정말 싫다.....


불쑥 그런 대화를 하고 일기로 남겨 놓았으니 다행이다. 결혼 26년까지 '잉꼬부부'를 유지한 우리의 이면이었다. 2016년 봄 쓰나미가 덮친 후, 독서토론 모임에서 정희진의『아주 친밀한 폭력』을 읽었는데 나는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났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백에서 내가 보였고 때리는 남자들의 진술에서 덕이 보였다. 이 무슨 해괴한 발견이란 말인가. 1%에 드는 좋은 남편이 알고 보니 폭력 남편이었다.


"이 책 다 읽고 나랑 이야기하자. 우리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해."


책을 내밀자 표지를 내려다보는 그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폭력'이란 단어가 든 제목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럴 만했다. 내 마음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는 눈치가 아주 먹통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어찌나 심각한 상태인지 보였을까, 설명하다 죽고 싶지 않다고 한 내 말을 기억했을까. 그는 알았다며 책을 받아 들고 바로 책상 앞으로 가 읽기 시작했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은 여남관계의 대전제를 함께 의심하기로 용기를 낸 첫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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