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그림을 시작해 90대에 꽃을 피운 예술가 이자벨라 듀크로트
"50대에 그림을 시작해 90대에 꽃을 피운 예술가."-더 뉴요커(The New Yorker)
"2024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0인." -미국 아트시(Artsy)
영화에 대한 코멘트 두 문장만으로 충분했다. 50대에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는 말도 끌렸지만 90대에 세계적인 성공에 이른 예술가라니, 이 주인공을 꼭 알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라이징 스타 예술가 이사벨라 듀크로트(Isabella Ducrot) 이야기다. 여성 감독에 의한 여성 예술가 영화, 다큐멘터리 <이사벨라 두크로트 언리미티드>(원제: Hold Tight, Missy! - Isabella Ducrot Unlimited)는 여러모로 언리미티드였다.
이런 경우 흔히 '늦깎이' 예술가에 방점이 찍히기 쉽다. 1931년생 95세 노인이니, 우리 사회에선 장수하는 노인의 대표 정도로만 소개될 나이다. 하지만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누구와도 격의 없이 소통하는 예술가. 중년에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해서 40년 가까이 무명으로 활동해 온 화가. 어느 날 세계적인 갤러리스트에게 발굴되고 바젤아트페어에 초대받고, '언리미티드Unlimited'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다.
“진정 행복한 삶은 예순부터 시작된다.”
이자벨라 듀크로트의 예술 철학을 잘 표현할 말이다. 영화에서 그는 여러 번 강조했다. 인생의 끝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있지만, 동시에 90대인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젊은 날에는 자기 안에 있는 에너지를 적절히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행복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예순이 넘어서야 진정 행복한 삶이 시작됐다고 했다. 노년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라고 질문하고 있었다.
유난히 '나이' 따지는 우리 사회에서도 "인생은 60부터"는 낯설지 않은 말이 됐다. 100세 시대이니 60세는 젊은이라든가, 아직 계속 일할 때가는 식으로 많이 회자된다. 새로운 커리어로 제2의 삶을 사는 중노년이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60세부터 "진정 행복한 삶"을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없다. 흰머리카락과 주름살 가득한 맨 얼굴의 이자벨라는 분명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말하고 있었다.
<이사벨라 두크로트 언리미티드>(원제: Hold Tight, Missy! - Isabella Ducrot Unlimited)처럼 현역으로 활동하는 노인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얼마나 봤지? 90대 여성 예술가의 삶과 작품들을 담은 다큐라니. 흰머리 여성이 말하고 그림 그리고 웃고 다니는걸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이듦과 노년에 대한 편견을 뒤흔들고 다시 질문하게 하는 영화다.
조조 영화관에 이자벨라를 보러 온 사람들도 모두 내 또래 중노년 여성들이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내 앞의 한 여성이 박수를 치며 일어서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나처럼 느끼는 사람이 반가워서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을 정도였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떻게 공감하는지, 차라도 마시며 수다 떨자 제안해 볼까. 그런 생각이 스쳐가게 두고 돌아서 나왔다.
나도 이자벨라처럼 50대에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여러 연령대의 여성들 속에 어울리다 보니 나를 '늦깎이'라 불려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내 나이 52세에 간암 절제 수술을 받은 게 내 삶의 대전환점이었다. 이자벨라처럼 나도 젊은 날을 '행복한 시절'로 기억할 수 없었다. 내 안의 에너지를 표출해 낼 언어를 찾지 못했으니까. 내 몸을 알고자 내 영혼의 목마름을 따라 자연치유를 택했고 페미니즘을 탐독하게 됐다.
몸이 회복되면서 53세 봄부터 읽기와 토론과 글쓰기에 집중하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가슴에 쌓인 할 말을 하리라. 책을 쓰는 '작가의 꿈'이었다. 자연치유와 문학과 페미니즘이 갱년기 에너지로 폭발했다. 나를 말할 언어가 날을 벼려갔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행복했고 더 강해져 갔다. 만 60세에 첫 단독 저서『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를 냈고 62세에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를 출간했다. 그리고 64세인 올해 세 번째 책 『숙덕숙덕 복싱 클럽』을 쓰고 있다.
이자벨라 두크로트 덕분에 90대의 나를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그때까지 현역 작가로 활개치는 꿈이다. 쉼 없이 쓰고 하고 싶은 말을 책으로 내리라. '꿀벌 김화숙 언리미티드Unlimited', 못하란 법 없잖아? 아직 30년이 내 앞에 있다. 격년으로 책을 내면 앞으로 15권이 태어날 시간이다. 관건은 내가 얼마나 몸과 맘의 소리를 들으며, 예순부터 시작된 정말 행복한 삶을, 그렇게 계속 살아가느냐에 달렸겠다.
늦깎이 예술가가 90대까지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이 뭘까? 내가 그렇듯 이자벨라 역시 본인의 성정과 에너지의 힘이지 싶다. 그 다음 조건으론 남편 찬스를 부인하기 어렵다. 남편이 아주 부자라 작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자벨라가 하고 싶은 일 하도록 전적으로 믿고 밀어주는 남자. 작가와 아이디어를 나누고 함께 새로운 걸 도모하는 '공모자'였다니, 최고의 파트너임에 틀림없었다.
문득 내 짝꿍 덕이가 보인다. 돈만 빼고 이자벨라의 남편 못지않은 챤스다. 나를 지지하고 나와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공모자'니까. 부지런히 페미니즘 공부하고 토론하며, 가부장적인 문화에 익숙한 습관들을 하나씩 벗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은 믿는 사람. 내가 늦깎이로 출발했지만 노년에 대박 작가가 될 거라 응원하는 사람. 토론이 되고 서로에게 비판과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짝꿍이다.
여성으로 살기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면 나는 다 가진 사람이란 거 맞다. 50대 늦깎이로 출발한 무명의 작가지만 내 앞길은 점점 잘 쓰고 날로 더 행복할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60대보다 70대가, 그리고 80대는 더욱, 90대는 찬란하게 활짝 꽃피는 날이 될 것이다. 진정 행복한 삶은 예순부터니까!
고로, 싸움의 기술 1번. 나이가 문제 아니다. 자기 에너지를 표현할 언어를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