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안개 가득한 길 끝에서
여행 5일 차인 토요일은 비가 그치긴 했지만 내내 흐렸다. 해안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져 시야가 몇십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 운전은 내가 하지 않았지만 희뿌연 안개 때문에 우리는 물론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달렸다.
이날 오후 우리 목적지는 사려니숲길이었다. 이틀간 내린 비로 오름에 오르긴 힘들겠지만 경사가 없는 숲길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짙은 안개와 뿌연 시야 때문에 걱정이 되긴 했는데, 그래도 1시간을 달려왔으니 잠깐이라도 걸어보자는 마음이 앞섰다. 우산 하나를 챙겨 숲으로 향했다.
‘사려니’는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담는다는 뜻이다. 우린 안개가 동그랗게 포개어 얹은 사려니숲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좁고 뿌연 길이었지만 적당히 추운 날씨와 비 온 뒤의 깨끗한 공기,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숲이 더없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숲이 뿜어내는 청정가습을 깊숙이 호흡하는 기분이었다. 날씨 탓인지 방문객이 많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는 몽환적인 숲을 우리만 걷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길이 조금씩 미끄럽긴 했고, 경사가 없진 않았다. 부분 부분 짚단이 깔려있긴 했지만 어린 아들이 걷기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SNS로 봤던 찌를 듯 높은 나무 숲길은 걸어서 1시간을 가야 하고 그만큼 다시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니 어느 지점에서 돌아서는 게 맞겠다 싶었다.
우린 그렇게 30분 정도 걷던 지점에서 되돌아 왔다. 아이도 있었고, 트래킹화를 신지도 않았고, 일행의 양말은 발꿈치까지 밀려내려오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출발했던 입구에 다시 도착할 무렵, 아내가 갑자기 ”아!!…“ 하는 외마디 탄식을 내뱉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쳤나 싶어 일행도 같이 놀랐는데 아내가 본 건 우리 가족과 일행 모두에게 절친한 지인의 부친상 부고 메시지였다.
직장에서 만났지만 아내가 친언니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부친상. 모두가 그날 안개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자주 만나고 정을 나누던 사이라 부모님 건강도 서로 모르지 않았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당장 갈수도 없는 바다 건너 제주 산길에 멍하니 서서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일정은 3일이 더 남았고, 장례식 문상은 서울 강동에서 이틀 뒤 까지였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 사이에 우린 숙소를 한 번 더 옮겨야 하고 취소도 불가능했으며, 주말이라 돌아가는 비행기표도 구하기 어려웠다.
숙소에 돌아와 고민했지만 남은 일정을 다 소화할 순 없었다. 아내는 퉁퉁 부은 눈으로 월요일 늦은 비행기를 다시 예매했고, 우린 예정보다 하루 일찍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일찍 추모공원으로 같이 가서 조금 늦은 위로를 전했다. 아직도 갑작스러운 슬픔이 채 실감이 나지도 않는 중이었고, 황망한 소식에 번거로웠을 우리를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1월 겨울, 안개 가득한 제주 사려니숲길과 길 끝에서 만난 부고는 이후의 감정들까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