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포인트에서 바라 본 제주 일몰
난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다. 일출은 부지런해야 한다. 새해를 보러 간 건 10년도 더 된 것 같다. 20대 때는 친구들과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고 바닷가에서 1~2시간을 잠복했다가 부은 눈으로 일출을 보고 집에 와서 온종일 자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턴 31일 밤을 늦게까지 즐긴 뒤, 새해 첫날은 푹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떡국을 먹는 걸로 신년 셀러브레이션을 대신하곤 한다.
반면 일몰은 하루를 충분히 보내고 온전한 컨디션으로 즐길 수 있어 좋다. 하늘색이 점점 푸르고 붉게 섞이면서 오묘한 분위기를 내면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분위기 그대로 저녁 만찬을 이어가면 더할 나위 없다.
이번 여행 첫날 제주공항에 내린 시간은 오후 4시. 항공편이 많아서인지 1시간 연착이 됐고, 렌터카를 받고 나니 5시. 숙소인 한경면까지는 다시 1시간 가까이 가야 했다. 첫날이 이대로 가는 건가 싶을 무렵, 아내는 한경면 해안도로에 일몰카페가 있다며 가보자 했다. 일몰시간은 5시 45분, 하늘은 점점 붉어지고 마음은 급했다. 마침내 2분을 남겨놓고 도착해 차에서 뛰어 내렸더니,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다 끝으로 '어서 와, 제주는 간만이지?' 하는 듯 환상적인 일몰의 분위기를 뿜어냈다. 카페까지 들어갈 것 없이 바로 옆에 작은 공원이 있어서 차를 세워두고 보기 충분했다.
아들은 내내 신나서 뛰어다녔고, 나는 하늘색이 짙어지는 내내 셔터를 눌렀다. 제주에 오길 잘했다고 연신 내뱉으며 제주여행 텐션이 1에서 10으로 단번에 올라간 것 같다.
그다음 일몰은 모슬포항이었다. 이미 산방산과 송악산 둘레길까지 1만 보가 훨씬 넘었지만 방파제 끝에서 그 멋진 일몰을 다시 보고 싶었다. 방파제 입구까지 차로 간 다음, 걸어서 끝까지 가야 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인적이 거의 없어 스산한 분위기마저 들었다.
겨울 초저녁길 제법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방파제 바다 쪽으로 쌓인 거대한 테트라포드 길을 걸었다. 기다란 방파제길 끝 등대까지 걸으니 모슬포항의 일몰쇼가 시작됐다. 드문드문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카메라를 꺼내기 시작했고, 아들도 자기 핸드폰을 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일몰과 우리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해가 천천히 바다 끝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서로 아무 말 없이 감상했다. 모슬포항은 서귀포 가장 남단 쪽에 있어서 특히나 눈앞이 시원한 수평선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아들은 그새 찍은 사진을 할머니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일출은 게으른 내겐 도전이겠지만, 제주의 일몰은 포인트를 꼭 찾아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