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버그, 순례길의 무법자
바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자마자 우리는 근처에 열려있는 약국으로 직행했다. 인터넷에서 찾아온 베드버그 스프레이 사진을 약사님에서 보여주었다.
"이 사진에 있는 베드버그 스프레이 하나 주세요."
아침이라 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고 굴려 영어로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한 개 달라고 말했다. 약사님은 내가 내민 사진을 보더니 뭐라뭐라 말을 했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이해한 내용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게 핸드폰을 돌려준 뒤에 다른 상자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상자에 있는 벌레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보여준 사진이랑 똑같은 스프레이는 없어. 하지만 비슷한 효과가 있는 스프레이는 있어. 여기 진드기 그림 보이지?"
사진과 똑같은 제품이 아니더라도 베드버그를 쫓을 수 있는 스프레이면 뭐든 좋았기에 나는 'good!'을 외치며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결제했다. 겨우 스프레이 하나를 샀을 뿐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했다.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생명수처럼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부디 나를 빈대로부터 꼭 지켜주렴.
바욘에서 생장까지는 멀지 않았다. 한 시간가량이 지나 생장에서 버스가 멈추니 버스에 탄 사람들이 전부 내렸다. 순례길 동기가 될 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순례동기들과 함께 우리는 순례길사무실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디뎠다.
순례자 여권을 받기 위해 사무실 문에서 가지런히 줄을 서고, 호스피탈리에와 '왜 순례길에 오려고 했는지'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정신없는 시간이 끝나고 보니 내 손에는 순례자 여권이 들려있었다.
드디어 나는 순례자가 되었다.
순례자여권을 가지고 우리는 첫 알베르게에 입성했다. 우리가 묵을 55번 알베르게는 다행히 나무로 만든 2층 침대도 아니었고, 창문이 없어 침침하고 어두운 방도 아니었다. 밖에 맞닿은 벽에 난 창으로는 햇살과 시원함 바람이 계속 들어와 밝고 쾌적했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베드버그가 있을만한 숙소는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는 운이 좋게도 창문이 있는 가장 바깥에 있는 자리를 배정받았다.
같이 자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침대의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다행히 철제 구조물의 침대여서 매트리스를 확인하는 것은 쉬웠다. 그냥 짐을 정리하는 척하고 침대 주변에 앉아 2층 침대 밑면을 살피는 간단한 작업이었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내가 지낼 침대를 확인하고 나니 베드버그를 피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몰라 아침에 산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침대 매트리스 네모퉁이에 뿌렸다. 매트리스 위에 펼친 침낭에도 스프레이를 뿌렸다. 바깥에 몇 번, 침낭 안쪽에도 몇 번. 이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손톱만 한 검은 벌레가 내 몸 위를 기어가는 것을 조금도, 손톱만큼도 용납할 수 없었다.
베드버그와 같은 계열인 모기는 날개가 달려있어 손으로 휙휙 하면 내 주변에서 벌어지기라도 하는데, 베드버그는 날개가 없어서 땅이나 벽을 기어다닌다.
베드버그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내가 베드버그를 죽이거나, 베드버그를 직접 손으로 털어내서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던져버려야 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베드버그가 나오면 손을 직접 써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찝찝했다. 평소에 모기도 내 손으로 잘 안 잡는데, 모기보다 더 부피가 큰 베드버그(내 눈엔 미니 바퀴벌레처럼 생겼음)를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한다니.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일 수 없다면 피하는 전략을 쓰는 수밖에.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뿌린 첫날밤이 되었다. 신기할 정도로 어젯밤 내내 괴롭혔던 벌레 기어가는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놓친 어딘가에서 베드버그가 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 이 침대에는 없지만 다른 어딘가에 있으면 어떻게 하지?', '침낭이 아니라 가방에 들어가서 순례길 내내 숨어있으면 어떻게 하지?' 계속해서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사라졌다.
알베르게 어딘가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벨소리에 일어났다. 1초 정도 작게 울린 벨소리였지만 내일부터 순례 시작이라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몸은 바로 반응을 했다. 잠시 침낭 안에서 꾸물거리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움직이는데 등 어딘가가 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등을 만져보니 등에서 뭔가가 부풀어졌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다. 또, 신경증처럼 괜히 반응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서 빠르게 침낭을 정리하고 꺼내 놓은 짐들을 모두 가방으로 되돌랴 보냈다. 가방의 지퍼를 잘 여미고, 무릎에 무릎보호대를 차고, 스틱을 양손에 쥐고 55번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제부터 나는 진짜 순례자다.
장작 8시간을 걸었다. 생장에서부터 시작된 첫날의 일정은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았다. 아침 6시도 전에 출발했는데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사람이 8시간 동안 걸을 수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등산 갈 때도 이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다.)
고된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 체크인을 기다렸다. 비슷한 시간에 출발하여 비슷하게 걸어서 그런지 피레네를 넘을 때 본 얼굴들이 알베르게 로비에서 제법 보였다. 속으로 내적 반가움을 표하며 우리는 론세스바예스숙소에 체크인을 끝냈다.
배정받은 숙소로 이동하니, 이곳은 나무로 되어있는 숙소였고 침대가 통풍이 잘 안 되는 구조였다. 침대를 보자마자 '혹시..?'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어쩌면 이곳에서 진짜 베드버그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또 침대를 구석구석 살피었다. 살펴보니 베드버그로 추정되는 잔해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눈에 안보이더라도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바욘에서 산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매트리스와 침낭에 몇 번 뿌렸다. 침낭은 벌써 몇 번이나 스프레이가 뿌려졌다. 어쩌면 이제 침낭은 베드버그의 성역이 아닐까.
유럽에 빈대가 많다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사실 그건 다 옛말인가? 지금의 한국처럼 베드버그가 박멸이 된 걸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받은 일회용 커버와 침낭을 침대에 올려두었다. 그날 밤, 8시간을 걸었서 생긴 피로 때문인지, 베드버그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흐려진 탓인지 순례길을 시작하고 오랜만에 푹 잠에 들었다.
첨언) 과연 저는 이 순례의 여정에서 베드버그를 만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