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는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날씨가 맑고 깨끗한 날이면 더욱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다. 맑고 푸르른 날들을 하루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마음속에 피어난 열망이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생활 속에서 과거의 어느 날을 추억하게 되는 일이 참 많다.
요즘들어 과거의 어느 날과 쉽게 동기화가 된다. 높고 청명한 가을하늘을 바라보면 한여름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풍경이 떠오르고, 습하고 더운 날씨 속에서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말레이시아에 있었던 어느 겨울날이 기억이 난다. 길을 걷다가 코끝에 스치는 파우더리 한 향기에 유럽의 번화한 길거리에 있는 듯한 향수에 젖기도 한다.
얼마 전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은 이른 아침 대전 충남대 앞을 걸어갔을 때였다. 주말 아침 9시 요가를 하러 충남대에 방문하던 날이었다. 이른 주말의 아침, 고요하고 조용한 충남대 앞을 걷고 있는데 스페인의 어느 도시가 떠올랐다.
충남대 입구 쪽 도로의 폭은 정말 넓다. 운전면허가 없는 나는 설명도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차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하차도로 들어가는 입구와 충남대로 들어가는 길을 포함하여 네 방향의 차선까지. 정말 복잡하고 어지러운 형태의 도로를 가지고 있다. 그 도로는 끝없이 앞으로 쭈욱 펼쳐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직선형의 도로와 길 중간중간 세워진 조경수들이 내 눈에는 스페인의 로그로뇨와 닮아 보였다. 분명 스페인 로그로뇨에서 나는 이런 넓은 도로에 위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로그로뇨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르는 3대 대도시중 하나인 곳이다. 이곳은 대도시답게 정말 다양한 숙소가 있다. 순례자에게 제공되는 공립 숙소(알베르게)도 있고 사립 숙소(호스텔/호텔/에어비앤비 등등)도 이용할 수 있다.
나와 동생은 대도시인 로그로뇨에서 좋아 보이는 숙소에 묵고 싶었다. 일주일간 열심히 걸은 스스로를 위한 작은 보상이었다. 고심 끝에 숙박예약 사이트에서 꽤 괜찮아 보이는 사립 숙소를 예약을 했었다. 알베르게는 당연히 도심중앙에 있을 거라는 안일한 믿음으로 숙소의 위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평점과 가격 그리고 세탁기 사용여부를 따져서 한 숙소를 예약했었다. 이곳은 평점이 높았고(8.X) 세탁기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가격도 공립숙소와 비교했을 때 그렇게 비싸지 않은 곳이었다.
나와 동생은 좋은 숙소를 예약했다고 아무 생각없이 구글지도를 보며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다. 신기하게도 구글맵을 따라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로그로뇨 중심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로그로뇨 대성당과 1분, 3분, 5분씩 멀어지더니 중심지까지는 걸어서 20분 걸리는 거리에 숙소가 있었다.
숙소는 나름 외곽에 있어서 로그로뇨 대성당과 타파스거리에 가려면 적어도 20분은 걸어가야 했다. 숙소에서 로그로뇨 대성당까지 가는 방법은 단순했다. 가장 큰 도로까지 직선으로 쭉 걸어가다가 그 길에서 방향을 틀어서 다시 직선으로 쭉 걸어간다. 골목골목이 숨어있는 로마와 다르게 로그로뇨의 길거리는 아주 단순했다. 그렇게 앞으로 걷고 걷고 걷다가 충남대 앞에 도로가 펼쳐졌다.
다른 점이라곤 로그로뇨의 나무들은 더 키가 크고 잎이 많았으며 차가 다니는 도로 중앙에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있다는 점이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들과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로 그리고 그 도로를 장식하고 있는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와 그 위를 덮고 있는 새파란 하늘이 대전의 아침과 닮아 있었다.
2024년 10월 5일 오전 9시 몸은 대전에서 길을 걷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과 영혼은 2022년 4월의 어느 날 로그로뇨를 걸었던 그날로 돌아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여행이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던 순간이 있다. 비싼 돈을 들이고 귀한 시간을 내어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길래 나는 이렇게 여행을 갈망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누군가 질문한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물어본 것이었지만. 나는 좀처럼 멋있는 대답을 포기하지 못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해서',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하여', '나의 가치관의 폭을 넓히고 싶어서'라는 말로 포장을 했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갈망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는데 이제야 그 답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여행을 추억하는 순간들은 여행을 즐기고 있는 그 당시만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한국에서 하기 어려운 진귀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적들을 감상하는 것 때문은 전혀 아니다. 내가 여행을 떠올리는 것은 그곳에서 경험한 분위기가 현재와 일치했을 때이다.
어느 중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대만에서 자주 맡았던 향신료향이 날 때, 나는 타이베이에서 동생과 보낸 순간을 떠올리고 기억한다. 창문에 비친 햇살이 리스본에서 느꼈던 햇살과 비슷한 무드를 가지고 있을 때 리스본 광장에서 대구고로켓을 먹었던 그 여행을 했던 때로 돌아가 다시 여행을 즐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포르투에 있을 때의 분위기와 닮아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포르투를 여행한다.
나에게 여행이란 삶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레코드와 같다. 켜켜이 다른 공간의 분위기를 내 삶 속에 채워 넣으면 나는 언제든지 다시 그 분위기를 꺼내 그때의 추억을 재생할 수 있다. 여행에서 내가 성장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배우지 않더라도 괜찮다. 삶이 더 다채로워졌으면,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졌으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