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부터 회피를 멈추기로 했다.
여행은 이제 취미가 되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행은 나에게 구명줄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행만이 나에게 자유로움, 활기, 살아있음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다니는 삶는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행은 나에게 운명이 아니었다. 단지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내가 여행을 운명이라고 모시고 귀히 대했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지 않은 잠에 드는 시간을 빼면 언제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밖을 나서면 철없고 세상에 대한 티끌하나 없는 모습을 한 '페르소나'를 쓴다. 방문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연극이 시작된다. 이 연극의 무대는 너무 넓고 광활했다. 그리고 이 연극의 치명적인 단점은 방문을 열면 시작되어 방 안에 들어와 혼자 있을 때야 비로소 끝난다. 나 혼자만의 연극은 어느 날에는 24시간 내내 막이 내리지 않기도 했고 가끔은 막이 올라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회사에 다니며 점점 더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늘어나며 나의 연기에 속아 너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연극의 회차가 늘어남에 따라 나의 페르소나는 점점 구체적이고 섬세해졌다. '대체로 긍정적인 사람'에서 이제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유쾌한 나는 사람들이 힘들 때 응원을 전하고, 지쳐있을 때 힘을 내는 사람'이라는 역할모델로 강화되었다.
나의 연기는 너무나 훌륭해서 아무도 내가 '거짓된 긍정'을 보이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점점 더 내게 기댔고 나는 나의 몸이 바스러지는 것도 모르고 그들의 삶의 짐을 기꺼이 나눠 들었다. 그것이 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 때나 오는 주변인의 연락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핸드폰 하나로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회피하고 싶었다. 관계를 피해야만, 연결에서 멀어져야만 내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것이 내가 살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행은 초연결과 멀어질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아무런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지 않을 때는 시차가 12시간이나 나는 유럽으로 훌쩍 떠나면 되었다. 런던에서 티타임을 가지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때, 상대는 한국에서 잠을 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연결될 시간은 한 시간 남짓한다. 24시간 중에 1시간을 연결되고 23시간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행은 아무도 모르는 세계에 나를 내던지는 행위였다. 그곳은 살면서 내가 만들어낸 거짓된 페르소나를 연기할 이유가 전혀 없는 세계이다. 갑자기 우울하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해도 괜찮고, 거짓된 웃음을 꾸며내지 않아도 괜찮다. 가끔 자연 속에 휴식하고 싶을 때 바닥에 주저앉아있어도 '여행자'이기에 괜찮았다. 내가 그 어떤 기행을 하더라도 내 기행을 본 사람을 두 번 볼 일이 없기 때문에 되려 나는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원한다면 거짓된 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다. 주변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나에게 솔직해지고 그것을 행동하기로 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내가 만든 '언제나 긍정적이고 유쾌한 나는 사람들이 힘들 때 응원을 전하고, 지쳐있을 때 힘을 내는 사람'이라는 모습으로만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내가 설정한 역할에 패배해 지쳐 드러누워있어도 그들은 '어라? 이건 내가 기대한 모습이 아닌데.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싫으니까 너랑 안 만날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쓰러져있는 나의 모습 옆에 누워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