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예찬(앙리 라보리)을 읽고
‘Paroles paroles~’
(샹송 제목, 집단 무의식에 자리 잡아 공허한 말을 하는 이들)
우리는 모두 부패하고 매수됐으며, 사전에 정해진 기준과 인간적인 가치 체계에 부합할 수 있는 사랑, 이타주의, 자유, 책임, 공덕은 존재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은 지배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한바탕 소동이라고 설명하는 나(저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특정한 사회집단이 부여한 가치로 존재하는데 그친다. p48
역사는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유전자 코드뿐이다. 광석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산정한 생산물 우위 시대는 이제 정보에 부가가치를 매기는 세상으로 변모했다. 인터넷을 떠다니는 가볍거나 무거운 정보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가온다. 스마트폰을 통해 펼쳐진 세상 속에서 나와 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만, 딱딱하고 매끈한 유리 표면에 압축되어 실시간으로 마주할 수 있다. 무수한 자극의 연타는 결국, 연민, 교감, 공감과 같은 고유한 신경계의 역치를 꾸준히 높이며 결국 우리를 둔하며 피상적 인간으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내 눈이 닿을 수 있는 제한된 세상을, 저너머 카메라가 있는 또는 있었던 곳으로 연장시킨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필연적이자 의무적인 연장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세상을 내 신경계에 새기는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일상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불필요한 지식들마저 맹목적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진화를 위한 정보는 희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저변은 세계로 확대된다. 인간이 갖는 지각, 지식, 체험, 기억은 장기간 노출된 세상을 자연스레 흡수하고, 문화라 부르는 추상적 틀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생태환경과 문화의 조합은 인류 종의 진화를 위한, 이전 세대의 누적된 업적이며 다음 세대에 유전자로, 그리고 무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럼, 우리는 왜 사는가? 진화를 위해 유전자 코드를 남기려고? 태어났으니 산다는 말이 공허하지 않다. 물론, 인간의 의식이 뛰어넘을 수 없는, 볼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논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혹시, 유전자뿐만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곧 우주(또는 신)의 메시지는 아닐까. 개개인이 하나의 단어나 음절이고 인류 전체가 메시지의 완성된 문장이 아닐까. 메시지를 해석하려는 본능이 타인과 관계를 맺도록 유인하지만 던바의 법칙처럼 150명이 한계라서 결코 신의 문장을 완성할 수 없다면? 즉, 끝없는 통사적 접근만 가능할 뿐 전체를 알 수 없다면? 마치 개미가 3차원을 볼 수 없듯이.
하지만 우리는 콜럼버스의 정신처럼 개척, 발견, 상상의 호모 사피엔스다. 수학과 과학은 신이 숨겨놓은 힌트를 찾아내려고 매진한다. 진정 ‘소수’가 답일지도 모른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어깨 너머 우주의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맥 빠져도 어쩔 수 없다. 첫째, 신의 코드로서 유기체를 정의할 수 없고, 해석을 위해 스스로를 분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분해는 곧 의식의 소멸이다. 둘째, 타인을 통해 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내 신경계에 새겨진 물질의 흐름 패턴일 뿐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상, 추측, 추정이라는 것도 기억과 경험의 토대 위에 쌓은 누각일 뿐이므로 애초에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통사법으로 구성요소를 쪼개어 규칙만 알 뿐이다. 그 규칙이란 것이 바로 과학 법칙이자 신의 기표가 아닐까? 그렇다면, 메시지는 기의일 테다. 기의는 의식으로 알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신앙에 기댄다. 예를 들어, 시대나 장소에 따라 표현 방식과 언어는 달라지지만 의미는 변하지 않는 ‘예수의 부활’처럼.
특히, 언어는 인류 지식의 총체를 배불리며 유전 가능하게 하지만, 소수 계급의 지배수단이 악용될 뿐이므로 크게 믿지는 말자.
자기를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 상당수가 개인과 집단, 계급, 국가 등을 막론하고 지배 구조를 구축하려고 궁리하면서도 정상을 유지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한, 도피는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p18
사랑이란 단어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모든 착취를 용서하는 기만적인 용어로 남았다. p40
지금까지 대중을 사랑, 책임, 자유, 박애, 희망 같은 대의를 위해서라며 언제나 살해와 지배라는 이상으로 이끈 공허한 말을 그만두길 바란다. 증오, 무책임, 노예제, 절망을 찬양하면서 평화와 관용에 도달할 순 없지 않겠는가. 나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운명을 비켜 가고 두 눈을 가리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내뱉는 말이 두렵다. 산타클로스와 말의 힘을 믿게 하려는 생각 없는 인문주의자들과 이제 단절하자.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생물의 세계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는 것뿐이다. 그래야 무생물적 지식으로 번듯하게 포장한 담론이 결국 개인과 사회집단의 지배욕을 표출할 뿐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99
저자는 냉소적이었다. 문장도 친절하지 않고, 거칠다. 하지만, 견디며 읽어낼 수밖에 없다. 희망을 긁어내는 고통 뒤에는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은 녀석은 희망이었다. 어쩌면 가장 악독한 놈일지도 모른다. 희망에 기대 꾸역꾸역 살아낸 자들을 빌어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그럼 어쩌란 말인가. 누가 읽고 가르쳐달라. 책과의 힘겨운 사투 끝에 나도 물들었다.
정말, 노래가 절로 나온다. 냉소 지으며.
‘Paroles paro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