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라는 말을 아시는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형형색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마음 한 구석이 허해지고, 괜히 쓸쓸한 마음이 든다. 그럴 때면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외로움을 달래기 좋다고 해서, 가을은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따라 지어낸 것입니다만.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라는 말도 잘 어울린다. 몸에 딱 맞는 스웨터를 입은 기분이다.
덥다. 너무 더워,라고 구시렁거리면서 커피를 내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문을 봤는데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는 걸 발견하고, “뭐야? 언제부터 가을이었어? 분명 커피 내리기 전에는 여름이었는데”라고 느끼는 것만큼 가을이 빠르게 왔다(죄송합니다. 과장이 심한 편이라).
지금은 창문이 넓게 트인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 손님들은 단풍 구경을 하려고 카페에 제법 찾아온다. 창문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창문 아래 테이블에 음료를 올려 사진도 찍고, 여자 친구 앉은 뒷모습도 찍고, 셀카도 찍고,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검은 커피보다 초록 초록한 말차라떼가 더 잘 어울리고, 알록달록한 에이드가 더 잘 어울리고, 오밀조밀한 디저트가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손님들은 디저트와 에이드만 주문하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커피는 온통 검은색이라 단풍과 함께 사진도 못 찍고 외면받고 있다. 불쌍하다. 이대로라면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라는 타이틀을 뺏겨버릴지도 모른다. ‘가을은 말차의 계절’이라든가, ‘가을은 디저트의 계절’이라고 불리게 될지도.
만약 커피가 초록색이나 주황색, 흰색이었다면. 손님들이 커피를 주문하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해 주지 않을까. 단풍과 함께 잘 어울리고, 사진을 찍으면 분위기 있게 나오니까. 금세 인기 메뉴에 등극하고,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라는 타이틀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튼 가을이 되면서 외면받는 커피가 불쌍했다(나는 커피 편이다). 괜히 커피는 단풍과 어울리지 않고, 힙합을 할 것 같고, 거친 분위기일 것 같은 편견 탓이다. 실제로는 커피의 속은 향기롭고 다채로운데, 어째서 그걸 찍어 줄 수 있는 카메라가 없는지. 속상하다. 자고로 외면보다는 내면이 중요한 법인데 말이지.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지게 된 이후로, 누구나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사진으로 많은 것을 평가한다. 사람의 외모, 성격, 성공, 카페의 분위기, 인기도, 서비스, 맛. 보이는 게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너도나도 잘 보이길 원한다. 사람도 그렇고, 음료도 그렇다.
딸기가 없어도 딸기 스무디를 만들 수 있고, 청포도 몇 알이 들어가면 청포도 에이드가 된다. 맛은 뒷전이고 보이는 모양이 중요하다. 더군다나 이런 음료가 카페에서 가장 유효한 메뉴이니, 온통 보여주기 식이 된다. 이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음료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뭔가 맞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런 메뉴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슬퍼지는 것이다.
나는 가을에 커피를 마시는 게 좋다. 사진 찍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색깔이 알록달록한 음료에는 관심 없다. 단풍을 보면서 향기 좋고 맛 좋은 커피를 마시는 게 좋다.
찬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고, 울긋불긋한 단풍을 쳐다보고, 따뜻하게 데워진 잔을 붙잡고, 후후 불면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신다. 마실 때마다 고소한 향이 코끝에 스치고, 달짝지근한 땅콩 캐러멜 같은 맛이 입 속에 맴돈다. 쳇 베이커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리는 카페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아, 가을이구나.”하고 감탄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역시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다.
그런데 말이지요. 왜 가을에는 커피가 더 맛있어질까요? 커피 향도 더 풍성해지고, 맛이 더 달콤해지는 느낌입니다. 찬 바람이 불고 쓸쓸해지는 기운이 감돌면, 커피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