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거나달 Sep 10. 2019

‘슈필라움’

                                                                                                                                                                                                                                                                                                                                                                                                                                                                            

 책을 많이 읽지도, 빨리 보지도 못하는 내가, 그래도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중에 한 분이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님이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일본 열광’ ‘남자의 물건’ ‘에디톨로지’ 등을 완독, 정독했다. 이유는 책이 재밌고, 쉽게 읽히고, 남는 게 있다. ‘참 훌륭한 작가다’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책은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인데, 제목을 왜 이렇게 길게 지었는지가 조금 의문이긴 하지만 역시 ‘학문적인 전문성 위에 색다른 통찰이 곁들여진 수작이다’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생소한 단어 ‘슈필라움’에 관한 내용이다. 작가의 소개를 그대로 옮기자면 슈필라움이란 ‘놀이(슈필)와 공간(라움)의 합성어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이다. 우리 사회, 특히 중년 남성들이 겪는 여러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슈필라움의 부재에서 온다는 꽤 설득력 있는 논리다.


 생각해 보면 나도 늘 꿈꿨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집을 지었던 거다. 경제학과를 나와 주식 투자에도 성공하고 경제 감각이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주변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친구 전희가 무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렸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서’ 서울 외곽에 조그마한 단독주택을 지었던 거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떻게 집 지을 생각을 했어?”라고 주변에서 대충 호기심으로 던지는 질문에도 근사하게 답할 게 생겼다. 이 지점에서 김정운 님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요즘처럼 ‘초록 초록’한 날에는 집 앞의 정원이 우리 동네 아저씨들의 ‘슈필라움’이다. 미술을 전공해 감각이 뛰어난 옆집 형은 요즘 꽃에 빠진 것 같다. 수십 개의 화분에 꽃을 심어 집 주변을 장식했다. 장미, 튤립, 카네이션 등 형형색색의 꽃을 참 정성껏 가꾼다. 아침 7시 출근길에 꽃에 물을 주는 형을 가끔 마주치는데, 잠옷에 부스스한 모습이지만 그 옛날 ‘봉봉브라더스’가 부른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가 생각날 만큼 꽃도, 형도 예쁘다.     


 사업을 하시다 은퇴한 앞집 아저씨는 나무를 가꾼다. 키와 모양이 다양한 여러 소나무가 중심을 잡고, 주목과 목련, 철쭉, 가시오갈피, 영산홍, 자산홍 등이 조화롭게 자리한 이 집의 정원은 자타공인 이 동네에서 최고로 꼽힌다. 나무를 고르고, 심는 것부터 계절마다 가지를 치고 매일 물을 주는 것까지 혼자서 다 하신다. 할 일이 많아진 요즘엔 더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데 정원의 나무들처럼 편안하고 넉넉한 표정이 참 좋다. 그 집과 우리 집이 마주한 관계로 내가 이토록 멋진 정원을 맘껏 감상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나의 슈필라움도 요즘 작은 정원, 그중에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은 텃밭이다. 기본인 상추와 고추, 방울토마토 모종을 매년 봄에 조금씩 심었는데 올해엔 오이와 가지, 깻잎을 추가했다. 모종을 심기 전에 흙에 미리 비료를 섞어주고, 흙이 건조해지면 물을 충분히 주고, 받침대를 세우고, 방울토마토의 경우 곁 잎을 떼어준다. 꽤 거창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올해는 조금 더 신경을 썼더니 확실히 결과가 좋다. 키도 부쩍 자라고, 열매도 빨리 달렸다. 관심을 주고 시간을 들이면 정직한 결과가 나온다는 거, 요즘 세상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더 보기































이전 02화 그래이집 (GRA-Y ZIP)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