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거나달 Oct 20. 2021

봄날의 도리화 (桃李化)

  

 우리 집 정원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건 오얏나무라고도 불리는 자두나무다. 4년 전 옆 동네 

농원에서 8만 원을 주고 사다 심었는데 3월 중순쯤이면 하얀 꽃을 환하게 터뜨린다. 자두까지 잘 열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첫해를 제외하고 자두 맛을 본 적은 없다. 대부분 과실나무가 그렇듯 열매가 맺히면 

충해를 막기 위해 농약을 뿌려줘야 하는데, 다 영글기 전에 바닥에 떨어지는 게 절반이고, 남은 것들은 그냥 운 좋은 벌레들에 양보하기로 했다. 그래도 한 달 이상 볼 수 있는 하얀 꽃에다, 가끔 코를 갖다 대면 어릴 적 맡았던 아카시아꽃과 비슷한 달콤한 향을 선물한다.     

겨울을 지나 남경도화가 피기 시작할 무렵

 그런 자두나무에 올해는 라이벌이 생겼다. 작년 가을 어느 날, 뭔가 헛헛한 마음에 집 근처 농원에 들러 밖에서 겨울을 날 수 있고, 꽃을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작은 나무를 추천받아 2만 원을 주고 가져온 남경도화가 주인공이다. 이 친구의 다른 이름은 꽃복숭아나무. 겨울에 길고 곧게 뻗은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걱정했는데, 자두꽃이 필 무렵 빨간 꽃망울을 힘차게 터뜨렸다. 아직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키에도 화려하고 당당하게 꽃이 달린 모습이 자존심 있어 보여 좋다. 꽃말이 ‘사랑의 노예’ ‘유혹’인데, 내가 불혹을 지난 지 한참 된 지 모르고 출근할 때마다 날 유혹한다.      


 자두꽃과 복숭아꽃이 요즘은 ‘봄의 여왕’ 벚꽃에 많이 밀리지만, 예전에는 봄을 상징하는 

대표주자였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주나라에선 매화와 오얏을 꽃나무의 

으뜸으로 쳤다’는 구절이 나오고, 두보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 시인으로 꼽히는 이태백은 어느 봄날 밤 형제, 친지들과 복숭아꽃, 자두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시를 짓고 놀았던 감상을 적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挑李園序)’를 남겼다. 조선 말기 신재효가 지은 단가(短歌, 판소리 전에 부르는 

짧은 노래)인 ‘도리화가(桃李花歌)’도 있는데,  예쁜 꽃을 상징한 복숭아꽃, 자두꽃은 사실 제자 채선을 

묘사한 거라 한다. 당시 신재효의 나이 59살에 채선은 24살.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채선 역은, ‘국민 첫사랑’ 수지가 맡았다.      

 우리 집에서 자두나무가 의미 있는 건, 성 씨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 넷 가운데 세 명이

 ‘오얏 리(李)’씨다. 아이들에게 얘기해줬더니 동질감을 느끼는지 괜히 자두나무를 좋아한다. 그리고 역시 오얏 리(李)로 시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제수씨 이름이 ‘남경도화’와 같은 ‘남경’이다.     

 복숭아꽃, 자두꽃이 활짝 핀 요즘, 저녁을 일찍 먹고 집 앞을 나오면 1300년 전 당나라의 이태백이 된 듯하다. 그때 춘야연도리원(春夜宴挑李園)에선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줬다고 하는데,  도리화(桃李花)와 함께라면 그런 벌주쯤이야 몇 잔이라도 받아마실 것 같다.







하얀 자두꽃은 밤에 보면 더 예쁘다 

이전 03화 ‘슈필라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