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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Aug 19. 2022

그 정원에 가고 싶다

30분 일찍 나섰지만 예약 시간은 이미 지나버리고 말았다. 주말이라는 걸 감안했어야 했다. 평소 운전 잘하는 남편도 코로나로 한국에 자주 나오지 못했기 때문인지 두 번이나 고속도로에서 잘못 빠져나가 지각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속을 태우며 용인의 숲 속에 있는 한 정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대통령상 받은 정원을 보게 되었다. 정원의 모습보다도 우리나라에 정원 공모제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림책 《패딩턴의 정원 꾸미기》에도 패딩턴이 정성 들여 가꾼 작은 정원이 ‘가장 멋진 정원 상’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원이 발달한 영국이 배경인데도 정원 대회라는 것이 낯설고도 신선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한 일인가 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대회가 있다니 많이 흥미로웠다.

  

난 그 정원을 동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검색해 보니 주말에 개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집에 오는 일정에 맞추어 예약해 놓아 큰딸과 셋이 가던 길이었다. 2시간마다 다른 방문객이 들어오기 때문에 늦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정원 주위에는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개인 정원이기 때문에 주소 공개도 하지 않는데 알음알음 찾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가 넘으면 웰빙이, 3만 달러가 넘어가면 가드닝이 사회적 이슈가 된다고 한다. 한때는 우리나라에 웰빙 열풍이 대단했는데 바야흐로 정원 시대가 열렸는지 방송에서도 정원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입구 쪽에서 인상 좋은 한 중년 남성이 주차 안내를 하고 있었다. 주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만 늦은 것은 아니었다. 속을 태운 나와는 달리 주인 부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정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식물을 구경하기도 하고,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입장료에는 음료 값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우리도 시원한 천연 과일 음료를 받아 마셨다.

  

정원은 한쪽이 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 더욱 고즈넉하고 운치 있었다. 정원 앞쪽도 숲인데 그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터였다. 정원엔 처음 보는 희귀 식물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눈길을 잡아끌었다. 꽃을 사랑하는 주인은 수시로 식물들을 몇십 만원씩 주문해 트럭으로 받는단다. 몇십 만원씩 책을 사던 나와 다를 바 없었다.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들도 정원의 아름다움에 한 몫 할 정도로 멋스러워 마치 식물 카페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음료를 마시고 본격적으로 식물 구경에 나섰다. 큰딸은 그새 휘 둘러보고는 별로 재미없다면서 자동차 안으로 갔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정원이 눈에 안 들어온다니 안타까웠지만 나도 그 나이 때엔 그러했다. 남편과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주인에게 궁금한 것들에 대해 물어보며 감상했지만 제대로 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세상엔 아름답고 특이한 식물이 보통 많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평소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남편도 그곳에선 적극적으로 묻고 살펴보았다.





  


남편이 일본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식물에 관심 있거나 기르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사자인 자신도 그러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사업체를 꾸리고 혼자 지내면서 그늘에 있던 자기 취향과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을 터이다. 남편이 1층짜리 집을 선택한 것도 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뜰이어도 임대회사에서는 정기적으로 잔디 깎는 기사를 보내 관리를 해준다.

  

가드닝 분야의 빛나는 에세이라 소개하고 있는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카렐 차페크는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남편의 뜰도 그야말로 손바닥만 하다. 어느 날 내가 그 뜰에 있는 작약을 좀 스쳤을 때 과묵한 남편이 소리쳤다. “아, 조심해! 안 되겠어. 울타리라도 쳐야지.” 뒤 이어 내가 말했다. “자기는 꼭 어린 왕자 같네. 어린 왕자가 자기 별에 있는 장미를 소중히 다루는 것처럼 자기도 B612호 같은 작은집에 살면서 뜰에 있는 꽃들을 소중히 살피니까.” 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남편은 봄이 되면 손바닥만 한 뜰 가장자리에 꽃모종들을 사다 심었다.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사람이 꽃이 피면 찍어서 보내주기도 하고, 내가 가기 전에 꽃이 먼저 필까 염려도 하고, 나와 함께 꽃집에 가 모종들을 사 오기도 했다. 아침이면 일어난 그대로 앉아 고요히 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등이 순하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뜰에 가 있기 때문이리라. 딸기, 토마토, 고추, 파 등을 심어놓고 그것들이 자라고 익어도 먹을 생각을 안 했다. 대파에서 하얗고 동그란 꽃이 피고, 방울토마토와 딸기가 빨갛게 익고, 오이가 늙고 짓물러 땅에 떨어질 때까지 그냥 두고 보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사무실에는 매달 일정 비용을 내고 관리해주는 화분을 놓았었는데 언제부턴가 직접 키우고 있다. 남편은 죽어가는 것들도 키워내는 금손을 가졌지만 나는 집에 들어오는 화분마다 빈 것으로 내 보내기 일쑤였다. 물을 너무 많이 주거나 너무 안 주기 때문이었다. 혹여 우리가 귀촌한다면 정원을 가꾸는 것은 남편 몫이고 즐기는 쪽은 나일 것이다.  

  

카렐 차페코는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작은 화단이라도 필요하다고 한 것인데 남편에게 있어 뜰은 타국에서 홀로 지내며 맞는 외로움을 덜어주는 반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정원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일본에 가면 유명한 공원에 가기를 좋아하고 도쿄도립 정원 9곳을 다 돌아보았다. 도립 정원은 에도시대의 영주나 거상들이 소유했던 정원이기도 하고, 메이지 시대 이후 특색 있는 정원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들이다. 그런 만큼 규모도 크고 개성 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정원에 누구의 손길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번에 다녀온 정원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 순간 눈앞에 놓여 있는 결과물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내겐 아파트 안에서 기르던 식물들을 죽인 경험이 있고, 현재로선 화분 몇 개 키우는 게 전부지만 정원을 잘 가꾸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정원에 관한 책들도 사서 읽는다. TV에서 정원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 많이 집중해서 본다.

  

그리하여 정원 가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정도는 안다. 남편도 지금은 예전만큼 뜰에 열중하지 않는다. 큰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반 갈라 거기에 고추 모종을 넣어 일본에 가져가기도 하고, 미처 화원에 나오지 않아 못 사간 나팔꽃씨를 사다 달라하고는 우산 쓰고 그 씨를 심던 모습이 선한데 말이다. 그만큼 정원 가꾸는 일이 힘들다는 얘기일 것이다.

  

정원을 향한 카렐 차페크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변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은 정원에 비가 내리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햇살이 비치면 그건 정원을 밝게 비추는 햇살이다, 저녁이 되면 정원이 휴식을 취하겠구나 생각하며 기뻐한다. “라는 문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원에 밀착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니 말이다. 정원가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화해온 생물이라면 무척추동물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등뼈란 하등 쓸모가 없다는 그의 유머 있는 말에서도 짐작한다. 정원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정원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이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잎이 떨어지고 꽃이 진 가을에도 할 일이 있고, 심지어 1월에도 날씨를 경작하느라 바쁘단다. 따라서 나같이 집안 정리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손바닥만 한 것일지라도 정원을 소유하는 일은 멀고도 먼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기에 어찌 정원과 식물에 대해 일일이 공부해 가며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대신 숲을 찾아가든가 남이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을 찾아가는 것으로 대치하려 한다. 흙을 만지고 키우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겠지만 그 일부분이라도 나의 즐거움으로 가져오려 한다.  






지금 꼭 빌려오고 싶은 정원이 있다. 박태후 화가가 가꾸고 있는 나주의 죽설원이다. 50년 넘게 그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닿은 곳이지만 인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정원이다. 일본 정원을 보면 볼수록 우리 숲을 향한 갈급증이 일곤 했다. 일본 정원이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그 여운이 오래가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가꾼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옥잠화가 양옆으로 쭉 서 있는 길에 질경이들이 들어차서 질경이 양탄자 길이 된 죽설원의 일부분만 보아도 박태후 화가의 정원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원예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운 농업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급적 자연 상태로 자라도록 인위적 손질을 줄인단다. 화가는 요즘에 보기 드문 한국식 정원을 고집하고 있는 뚝심 정원사이다. 토종 야생화와 나무들, 그리고 우리 전통의 생활문화가 그대로 녹아있는 죽설헌에 발길이 닿는다면 그 순간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지니고 나온 본성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잘 보존해 나간다면 우리네 삶은 빛날 것이다. 그 본성은 바로 자유이다. 주인장의 배려로 자유롭게 자란 나무들이 자연미를 발산하듯 우리도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산다면 자유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된다. 죽설헌에 가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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