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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14. 2022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는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중략)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5월인데 26도까지 오른다는 예보에 염려가 되었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어차피 사계절 내내 걷기로 했으므로 한 여름 뙤약볕도 피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건 약과일 것이다. 대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걷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에 잠든 바람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부랴부랴 딸이 먹을 식사를 준비해 놓고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선 때는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팔 토시와 장갑도 끼고 양산까지 챙겨 느티나무 앞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었다. 이번에는 느티나무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서 유유자적, 고독하게,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무인지라 걸으면서 내 안의 나와 함께 음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더욱 무성해진 느티나무 둘레를 두 바퀴 돌고는 급히 떠났다. 예보했던 것처럼 볕은 이미 강했다.




 이번에 뽑아 간 문장은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 나오는,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이었다. 여기에서 ‘책’ ‘길’로 바꾸어 “길을 걷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로 읽었다. 소설 속의 노 건축가는,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사회나 가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때는 해외에 나가 있는 경우였다. 해외라고 해야 남편을 만나러 가는 일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경을 넘으면 나를 가두고 있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에서 자연스레 놓여나는 기분을 많이 느꼈다. 말도, 건물도, 음식도, 문화도 전혀 다른 곳에 있어서인지 자유로움이 한껏 느껴졌다. 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종종 고독감을 맛보곤 했다. 특히 더 느낀 곳은 도쿄도립공원을 돌아다닐 때였다. 도쿄에 있는 9곳 모두 문화재 정원이어서 잘 꾸며져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정원에 갔을 때였다. 따스한 봄날의 기운이 정원 구석구석까지 스며와 더없이 여유롭고 차분한 날이었다. 정원의 조형미 또한 기품 있는 중년 여성의 자태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러함에도 왠지 모를 쓸쓸함과 고독감이 밀려왔다. 그리하여 빼어난 풍경과 고요한 분위기에서도 그 정취를 맘껏 누리지 못했다. 혼자 도시락을 먹는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을 보았다. 일본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 그들의 뒷모습에서 강한 고독을 느꼈다. 내가 그리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마터면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다 붙일 뻔 했다.

  

역시 일본에 있을 때 남편이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한 날이었다. 낮에 어딘가를 다니다가 들어오는 길에 역 앞에 있는 백화점의 레스토랑에 들러 파스타를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정면으로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격식을 차린 옷을 입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깡마른 노인이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아니 고독이라는 말은 그런 때 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의 주위는 돌처럼 딱딱한 분위기가 처연하도록 감싸고 있었다. 쳐다보는 나 자신까지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내 노년에도 그런 고독감이 밀려오는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날 정도였다. 시력도 떨어져 책 보는 것도 어렵다면 그 고독감을 어찌 견디어낼까? 노인과 고독은 짝지처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던가. 혼자 있는 자유는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노인에게는 자유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돌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 상록오색길을 걷는 대 여섯 시간 동안 나는 혼자다. 혼자서 만끽하는 자유 때문에 땡볕도 마다하지 않는다. 걷는 동안 가져간 문장을 음미하며 내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수행이나 명상을 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어떻게 지는 전적으로 내 자유이다. 가다가 그만 생각하고 싶으면 멈추면 된다. 아무리 그날의 목표가 있다 해도 나 스스로 수정해버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내 안의 검열관만 살짝 눈감아 주면 된다(물론 아직 그런 적은 없다).

  

대 여섯 시간 내내 가져간 문장을 떠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머리도 마음도 지치고 말 것이다. 대부분 그렇듯 1코스에서 문장에 집중한다. 거꾸로 도니까 그다음인 5코스에서는 뜰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간식을 먹는다.

  

이날은 3코스를 지나는데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찔렀다. 수변 공원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코로 숨을 깊게 빨아들이니 아카시아 향기가 더욱 빨려 들어오며 모든 시름이 사라졌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감정이 나를 채워주었다.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갑작스레 더워진 날씨에 자주 쉬어야 했다. 양산을 썼다 해도 의자가 보이면 쉬고 싶었다. 하지만 지붕이 없는 의자엔 섣불리 앉을 수 없었다. 지붕 아래의 의자도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다. 수변공원길을 걸을 때 기온을 확인해보니 28도였다. 이 날 서울을 비롯한 몇몇 지역은 31도를 넘기도 했다. 평소엔 가져간 물을 다 먹지 않은데 이 날은 편의점에 들러 한 병 사야 했다.

  

하지만 혼자 걷는 그 길 위에서 나는 행복했다. 40대 후반에 후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독서프로젝트를 했는데, 딱 10년이 지난 지금 걷기 프로젝트를 한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면서 과연 10년 후에도, 아니 그 전에라도 무슨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것인지 궁금했다.

  

이런 것들을 ‘내 생의 이벤트’라 이름 붙여 보았다. 한 십 대가 끝나고 새 십 대가 시작될 때 심적으로 어려울 시간들을 잘 넘어가게 해 준 이벤트들이었다. 특히 혼자서 하는 프로젝트들은 더없이 힘들고, 긴 시간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어느새 그 속으로 들어가 열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 걷기 프로젝트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매번 가져가야 할 문장을 고르고, 좋지 않은 날씨에도 걸어야 하고, 다녀와서는 글을 써야 하는 나름의 임무가 있다. 그래도 자연과 함께 혼자서 걷는 일은 매력적인 일이기에 매주 나서게 된다. 걷고 났을 때마다 얻는 기쁨도 크다.    

  

걷기 프로젝트는 분명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충만해진다. 멋진 문장이 담겨 있는 책을 업고 걸으면서 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고, 적어간 문장이 몸까지 통과 해갈 수 있도록 수시로 꺼내 읽고 음미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하니 마음이 나긋해지고 말랑말랑해진다. 무엇보다 혼자 갖는 시간의 매력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법정 스님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엔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더위 속에서도, 빗속에서도,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나는 내 발이 힘차게 내디딜 수 있도록 홀로 내 몸을 저어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독이 찾아올 노년에 그 쓸쓸한 고독이 내 몸에 고여 흘러넘치는 일이 없도록 예행연습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는 노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양산을 높이 쳐들었다.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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