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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15. 2022

빛살앤그림책

   

1인 연구소

그림책100

그림책 리더 김건숙

그림책으로 삶을 배우다. 나로 살다     

  


봄장마라 할 정도로 비가 잦다. 특히 걷기로 한 날에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날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고, 나 혼자 걷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날을 바꿔도 된다. 하지만 대부분 그냥 나선다. 대부분 날씨와 상관없이 내 일정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곧 나올 책의 원고를 교정 중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새벽에 2교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기에 잠시 짬나는 시간에 걷기로 했다.

  

다행히 집을 나섰을 때는 비가 잦아들었다. 대신 늦가을 날씨처럼 차가운 감이 있고 바람도 불었다. 하지만 걷기에는 나쁘지 않다. 늦었으니 걸음을 재촉해 느티나무 어르신 먼저 알현하고 가져간 명함 사진을 찍은 뒤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책 대신 명함을 준비했다. 밝은 파랑과 짙은 녹색으로 만들어진 명함을 각각 하나씩 가져갔다. 색은 달라도 명함에 담긴 내용은 같다. 그림책에세이 출간 후에 만든 것으로 ‘1인 연구소 그림책100’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명함을 만든 은 그림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오래 전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다시 말해 터전을 세우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제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에 상표 출원까지 하려고 했지만 ‘100’이라는 숫자가 변별력이 없다는 이유로 승인받지 못했다. 그래서 긴 시간 사용하고 있는 블로그 닉네임 ‘빛살무늬’ 가운데 앞 두 글자를 넣어 ‘빛살그림책’으로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100’이라는 숫자를 꼭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안 된다면 다른 사람도 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편히 사용하기로 했다.

  

왜 ‘100’이란 숫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거기에 담은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첫째, 내 인생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 가져온 숫자이다.

둘째, 그림책은 0세에서 100세까지 읽는 책이다.

셋째, 그림책은 100번 읽어야 한다.

넷째, 그림책에는 100가지 좋은 점이 있다.

다섯째, 죽기 전에 그림책100 목록을 만들겠다.     

  

이토록 많고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숫자이기 때문에 ‘100’을 버리고 다른 말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자랄 때엔 그림책이 없었다. 지금이야 어린이책이라는 고운 말을 쓰는데 그때만 해도 어린이를 위한 줄글 책을 동화라고 했다. 그것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교과서가 아닌 일반 책을 만날 수 있었고(이것도 몇몇 아이들에게만 해당), 동화책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림책을 만난 것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이다.

  

큰 아이가 유치원생이 되었을 때 우리 아이들을 책의 세계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 독서지도에 관한 공부를 했다. 덕분에 나도 그림책 세계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아이가 커가는 것과 함께 그림책에서 줄글 책, 역사, 세계사 등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큰딸과 딸 친구들을 시작으로 한 그룹 수업도 점점 늘어나서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 중학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수업을 하기 위해 공부하고, 그와 연관된 책을 읽다 보니 그 분야에 대한 내 지식과 능력도 커갔다. 그런데 여러 장르에서 가장 내 마음을 끈 것은 그림책이었다. 은유와 상징으로 압축된 내용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철학으로, 음악으로, 미술로, 그야말로 다채로운 분야와 시선으로 해석해내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단순히 내용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성찰하고 성장시키는 힘으로 연결했다.

  

어린이만 보기에는 그림책의 내용이 심오하고 강했다. 내가 50대가 되어 더 이상 아이들과 수업을 하기 어려운 시점이 되면 어른들과 그림책을 함께 읽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맞추었던 초점을, 힘든 삶을 거쳐 온 어른들에게 옮겨서 그림책이 그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건네주는 든든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어른이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읽는다는 소식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때였다.

  

가와이 하야오도 《그림책의 힘》에서 “그림책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 속에 담긴 세계는 더없이 넓고 깊다. 한번 보면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며 문득문득 떠올라 새삼 감동하게 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생 후반기야말로 그림책을 늘 곁에 두고 찬찬히 읽으라고 조언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 유머, 슬픔, 고독, 의지, 이별, 죽음, 생명 등에 대한 생각들이 아련히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책과 삶이 따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되었다. 명함에는 ‘그림책으로 삶을 배우다, 나로 살다’라는 문구를 써넣었다. 그림책삶을 연구하고, 그림책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와 모임을 하겠다고 1인 연구소를 만들었다. 이것으로 하나의 체계를 세웠다.

  

지금에야 그림책 붐이 일어 그림책 강의나 모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참여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그림책은 어린이들의 것이었다. 나만 해도 과연 어른들이 그림책을 읽을 것인가, 또는 정말로 어른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정표도 없이 막연하게 포부만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른에게 선물할 기회를 찾고 있을 때, 아는 분의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버러 쿠니의 《강물이 흐르도록》과 함께 3권을 가져가서 읽어드리라고 선물했다. 이것이 어른에게 처음으로 한 선물이었다. 그이는 어머니에게 가서 읽어드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집에 가서 자신이 쓴 공책을 가져오라고 해서는 지난날의 이야기를 딸에게 조곤조곤 들려주셨다고 한다. 잠시나마 몸의 고통을 잊고 자신의 삶 어느 지점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기뻤다.

  

블로그에는 어른들도 그림책을 읽자는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어른과 함께 읽는 그림책’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림책을 소개하였다. 지금은 이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져서 그냥 ‘그림책’이라고 바꾸었다.

  





어느 날 문득 그림책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을 읽으면 주인공과 연결되는 사람이 떠오르고, 책이 연결되고, 영화가 연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낸 책이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이다. 이 책 때문에 그림책 강의와 모임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림책 활동가로서의 데뷔가 이루어진 것이다.

  

1인 연구소 ‘그림책100’을 만들면서 많은 고민 끝에 나를 ‘그림책 리더’라 했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람, 그림책 모임을 이끄는 사람을 의미한다. 주문한 명함이 내 손에 쥐어지고 이틀이 지난날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아무한테도 명함을 주지도 않았고, SNS에도 올리지 않았다. 홈플러스 문화센터에서 온 강사 섭외 요청 메일이었다. 그런데 제목이 ‘그림책 모임의 리더로 모시고 싶습니다’였다. ‘그림책 리더’란 이름을 아무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문화센터 차장이라는 이와 긴 시간 미팅을 마친 뒤 문화센터에서 그림책 리더로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나로 살기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이미 만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덥석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왜 나로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그걸 진행하는 데에 있어 걸림돌은 무엇인지, 걸림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의 과정을 거쳐 인생명함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2기까지 하고 나서 코로나19 때문에 수업은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이 외에도 4명이서 모여 이끌어가던 모임도 잠정적으로 멈추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모임도 그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온라인 모임으로 하나 둘 열리고 있다. 현재 나는 작년에 만든 온라인필사 모임만 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이번에 명함을 들고 나와 걸은 것은 휴식기에 들어 가 있는 ‘일인 연구소 그림책100’의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탄생한 연구소를 코로나 핑계로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는 자책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 좋은가?

  

다른 그림책활동가 가운데엔 코로나 시대에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비 대면으로 말이다. 비교적 순항을 타고 그림책 활동가로 데뷔하고 그림책 모임을 한 것도 대부분 내가 꾸린 것이 아니라 요청을 받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집합이 금지되니 자연스럽게 모임들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림책은 많이 사서 쌓아두고 있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고,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계속 출간되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먼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다른 활동가들의 모임을 보면 불안 해지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전부터 어른 대상으로 그림책 강의를 하겠다고 했지만 꼭 대면으로 한다고 한 적은 없다. 아니, 코로나 시대가 올 것이란 예상을 못했기에 대면이냐 비대면이냐 자체를 생각할 수는 없다.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만나게 해서 힘과 위로를 얻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꼭 다른 이들과 같은 형태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안 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아직도 경쟁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꼭 그러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좋아하는지 물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도 밀려 있는 책이 많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좋아하는 것이 읽는 것과 쓰는 것이라면 그림책에 관한 것도 그쪽으로 하면 된다. 어떤 형태이든 모임을 하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모임이 생각났다. 바로 남성들의 모임을 꾸려보는 것이다. 며칠 전 《아빠! 아빠! 아빠!》라는 책을 만나면서 전에 했던 그 생각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텍스트로 사용할 다른 책도 떠오르고, 주제와 발문까지 떠올랐다. 집에 와서 메모해 두었다.

  

다른 이들처럼 기관에 신청서를 내볼 생각도 아예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림책 강의나 모임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처럼 그림책과 다른 낯선 대상을 연결하여 글을 쓰거나 블로그를 비롯한 다른 SNS에 그림책을 소개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요즘은 선물할 일이 생기면 그림책 선물을 많이 해서 전파시키고도 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활동을 보며 불안해하거나 경쟁하지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얻자.




이런 결론과 몇 가지 큰 그림을 그리고 나니 불안감이 어느 정도는 해소됐다. 걷는 것이야말로 스승이다. 상록오색길이 스승이다.

(2021. 5. 27)


   

* 그림책 활동가 명함은 결국 ‘빛살앤그림책’으로 바꾸었다. 몇 가지 떠오른 프로그램을 준비해 두었다가 새 명함으로 활동하지는 생각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그림책이 많은 이들의 삶 속에 빛살처럼 스며들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명함 색도 빛살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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