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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21. 2022

당신의 눈은 내게 창을 열어주었어요


당신의 말은 내게 창을 열어 줍니다.

- 가즈오 이시구로, 『녹턴』, 234쪽



제주의 한 숙소에서 지인을 만나고 있던 나는 올레길 걸으러 간다고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19코스와 20코스를 두고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니 데칼코마니 같은 길이 양쪽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결정도 못하고 숙소도 나서지 못한 채 깨어났다. 꿈이었다.

  

상록오색길 걸을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 듯했다. 중간 중간 잠이 깼고, 8시도 안 되어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날이 더워지고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이 제주 올레길 꿈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다른 날보다 좀 이른 시간인 10시 40분경에 나설 수 있었다.





  

느티나무는 겨울과 초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껏 무성하고 진한 녹색으로 자신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르신 느티나무가  품고 있는 언어는 그만큼 풍성하며, 지혜는 그만큼 깊고, 인내심은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어르신 앞에 서면 위엄과 품격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어르신은 서 있는 그 모습 자체로 내게 창을 열어 줍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느티나무 둘레를 천천히 돌고 나면 늘 답이 들려오니 말이다. 설령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그리 빨리 나오지 않으니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두 번이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서 술과 음식을 바치고 절하는 사람을 보았다. 무속인으로 보였다. 그 정도로 느티나무엔 신성까지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있다. 그래서 상록오색길 걷는 출발점을 늘 느티나무로 잡는다.




  

이번에 가져 간 문장은, “당신의 말은 내게 창을 열어 줍니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시구로의 녹턴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문장이었다. 세 번째 책 《비로소 나를 만나다》의 출간을 바로 앞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 글이 누군가에게 창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말이다.

  

늘 그랬듯 이번 책을 쓰면서도 긴장과 불안감이 있었고, 이에 관해 쓴 부분도 있다.

     

“1차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피드백을 받을 때까지이다. 2차는 파일 속에 갇혀 있던 글이 종이에 인쇄되고 멋진 표지로 묶여, 세상 밖으로 막 나와 독자들에게 넘어갔을 때이다.”(김건숙, 「비로소 나를 만나다」)


 2차의 긴장감은 첫 리뷰에 따라 달라지는데 긍정적인 리뷰가 몇 편 이어진다면 나를 흔든 그것들은 일시에 사라진다. 그러면서도 책 내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품은 꿈이기에 의심조차 않는 것에서 비롯된 힘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왜 하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 철학마저도 사라지게 한다.

 

 “책을 엮는 것은 흠모하는 산을 오르는 일이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싶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출간을 계속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면서, 내 글이 책으로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지가 없으면서 내 글이 책으로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여전한 언밸런스 게임 속에 있다.”라고도 썼다.





© jplenio, 출처 Pixabay


 

 “당신의 글은 내게 창을 열어줍니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뜨거운 볕 속에서 열심히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쉬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얼음물을 꺼내 목을 적셨다. 그러고선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아지가 짖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인과 함께 옆 의자에 와서 앉아 있던 강아지가 몸을 날려 새를 쫓고 있었다.

  

견주인 젊은 아가씨가 내게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면서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가 보다, 나도 강아지 키운다, 몇 살이냐 하며 몇 마디 건넸다. 혼자 살면서 강아지를 키운다는 아가씨는 큰 딸과 동갑이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의 공감대는 빠르고 강해서 청년에게 바로 친근감을 느꼈다.

  

청년은 강아지 돌보는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자신이 사는 이야기로 이어갔다. 사회복지사 공부하면서 마트 아르바이트한다고 했다. “요즘 특별히 아르바이트할 만한 곳이 없어요. 스트레스도 받고 힘도 들지만 이제 준비하는 거 마칠 때까지만 하려고요. 그런데 내가 눈코 입이 없나, 청소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데 사장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아줌마들 상대하는 거라 힘도 들지만 이제는 정도 들고 괜찮아요. 행사하는 물건 연구해서 손님들에게 설명도 해요. 처음엔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무말랭이를 아주 많이 판 날 사장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손님들도 예뻐해 주시고, 며느리 삼는다는 사람도 있고, 사모님도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챙겨주셔요. 콩나물이나 숙주 같은 것 잘 주시는데 데쳐서 먹으면 맛있어요.”

  

종일 걸어야 하는 나는 청년이 이야기하는 동안 속으로 갈등했다. ‘언제 이야기가 끝날까, 어디에서 내가 일어나면 좋을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고 맞장구쳐 주기를 계속했다. 청년이 말했다. “원래 저 말 많이 안 하는데 먼저 말 걸어주셔서 많이 하게 되네요.” 그러면서 마트가 어디쯤에 있으니 놀러 오라고도 했다. 그 사이에 청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왔으며, 남자 친구도 있고, 강아지 이름은 뭔지, 마트에서는 얼마나 일했는지 등의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청년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상록오색길 걸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judowoodo_, 출처 Unsplash

  

나는 양산을 펴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전에 있었던 비슷한 일이 떠올랐다. 10년 전 자궁에 선근종이 있어 수술하고 입원해 있었다. 옆 침대 환자는 20대 아가씨였다. 얼굴도 예쁘고 붙임성이 좋은 청년이었다. 고향은 원주이고, 부모님은 이혼했는데 청년의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 살고 있다고 했다.

  

청년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아르바이트하면서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해서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알게 된 주방장과 동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세세한 것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평탄치 못한 가정사를 이야기했다. 밤늦게까지 내게 들려주면서 누구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나한테 다 털어놓게 된다고 했다. 어떤 날은 친구들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도 가정 형편이 비슷하였는지 고등학교 졸업 후 노래방이나 술집 등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친구들이 병문안 왔다. 밤새 일하고 왔을 그들의 차림이 청년과는 많이 달랐지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고, 청년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청년이 진료실에 다녀오더니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른 병으로 입원해 있었는데 피검사에서 그 무서운 에이즈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처음으로 본 에이즈 환자가 그 착하고 예쁜 청년이라니, 날벼락같은 그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소식을 들은 청년의 엄마가 새아빠와 함께 와서 청년을 원주로 데려갔다. 내가 몸을 잘 못 움직일 때는 다 먹고 난 식사를 가져다주는 등 친절하고 싹싹한 청년이었다. 길지 않은 삶 속에서도 고된 청년의 삶이 무척이나 안쓰러웠고,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엇나가지 않고 밝게 성장한 청년이 대견했는데 그 몹쓸 병에 걸렸다니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종종 청년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알 길은 없었다.




  

오늘 만난 예비 사회복지사 청년이나 병원에서 만났던 그 청년에게는 내가 그들 마음에 창을 열어주었던 것일까?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길거리에서, 병동에서 처음 만난 나에게 거리낌 없이 속내를 보였으니 말이다.

  

특히 오늘은 마스크를 하고 두 눈만 빼꼼 내놓고 있었으니 내 눈이 청년의 마음속 말들을 꺼내게 한 힘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마 이런 뜻이겠지.

  

“당신의 눈은 내게 창을 열어 주었어요.”

  

비록 오늘의 바람이 ‘글’로써 많은 이들의 마음에 창을 내주는 것이었지만 같은 말이 아닐까. 글은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니 말이다. 마음을 기울여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태도로 글을 쓰면 되지 않을까.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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