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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24. 2022

뼈마디가 쑤셨다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 김훈, 『풍경과 상처』





© geralt, 출처 Pixabay




그림책 심리학 강의 시간에 ‘감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면 첫째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미지가 있고, 다음으로는 내장에서 뇌로 보내는 내장 감각 이미지, 즉 자율 신경 이미지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골격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것들을 합한 것이 ‘감각’이라는 것이다. 평소 많이 쓰는 말인데 그저 뭉뚱그려서 우리 몸이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으로만 간단하게 생각했었다. ‘감각’이라는 말이 이토록 어려운 것임을 알았다.

  

그래도 내장 감각 정도는 알겠다. 어떤 것을 보거나 듣고 생각할 때 심장이나 위장 또는 대장의 반응을 느낄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근골격계에서 느껴지는 것이라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강이뼈나 손목뼈 등으로도 느낀다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내겐 그런 경험이 없다.

  

이틀이 지난 오늘 우연히 김훈 작가의 책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풍경과 상처》의 서문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을 열었다. 거기에 밑줄 그어 놓았던 문장들이 바로 ‘감각’과 연결되었다. “나에게, 모든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와 다음 페이지에 있는, “나는 모든 일출과 모든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이다. 김훈 특유의 표현법이기 때문에 밑줄 그어 놓았을 것이다. ‘상처를 경유’한다는 말은 내장 기관에서 먼저 느낀다는 말일 것이고, ‘뼈마디가 쑤셨다.’라는 말이 바로 근골격계에서 느껴지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의 문장들이 독특하고 끌림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예민한 감각 기관을 거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몸으로 읽어내야 했던 그림책 심리학이 내게는 쉽지 않았다. 무엇이든 뇌로 읽고, 뇌로 판단하고, 뇌로 평가하는 머리형인 내가 몸으로 읽어내는 것은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몸으로 읽어낸 것이야말로 훨씬 실감 나고 기억도 오래갈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인 글이 생생할 수밖에 없다.   

  

전부터 가장 존경하고 좋아한 소설가는 김훈이다. 김훈처럼 보고, 김훈처럼 느끼고 김훈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그의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를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김훈 작가는 풍경일까? 그렇다면 무슨 풍경일까? 강물이었던 그는 어느 사이 가을 산이 되어 있다가 노을로 지는가 하면 억새로 슬며시 피어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겨울나무의 뼈인가 하면, 이번엔 여리디 여린 봄의 새순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다. 그는 우주이며, 모든 풍경을 품고 있는 들판이다. 나는 그의 우주 속으로, 들판 속으로 들어가 한 줄기 빛살이 되고, 한 줌의 흙이 되어 거기에 스며들고 싶어 진다. 그래서 그의 한 줄 문장이 되고 싶다. 단 하나의 단어라도 좋으니 그의 손끝에서 우러나는 언어가 되고 싶다.’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의 감각 기관에 깊은 내공이 있었음을 알았다.


  




걷기로 한 날인데 피곤했는지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 김훈의 문장을 엽서에 쓰고, 나설 준비를 해서 상록오색길로 갔다. 어제부터 내린 장맛비는 오후가 되면서 그쳤다. 비가 오거나 해가 뜨거나 그 자리에서 전혀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느티나무 주위를 돌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은 풍경을 어떻게 읽으시는지요?”

  

어떤 질문을 해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어르신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답해 주었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도 초감각을 사용하여 지하 세계를 탐사 한다네. 그리하여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한다네. 어둠 속의 풍경을 읽고 인지해 내는 방법이지. 그리하여 몸에 필요한 영양분과 물들을 쭉 끌어올려 위로 가져다준다네. 혹여 내 근처에 베인 나무라도 있으면 뿌리로 양분을 전해주어야 하니 그런 나무는 없나 살펴보는 일도 잊지 않지.가지 끝으로는 햇살과 바람과 새 날갯짓까지 읽어낸다네. 상처가 아문 옹이로도 읽어내지. 내게 풍경은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네.”

  

아, 어르신 느티나무도 김훈처럼 상처와 온몸으로 읽어낸다는데, 나는 무엇으로 풍경들을 읽었을까? 정서 내지는 추억 또는 그리움 등이지 않았을까.

  





그쳤던 비가 보슬비로 바뀌고, 중간에 제법 굵은 비가 쏟아지던 상록오색길의 풍경은 여느 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제법 운치도 있었다.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풍경들을 다른 감각으로 읽어내려고 애썼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대신 김훈 작가라면 다음의 풍경들을 어떻게 읽어낼지 계속 생각했다.   


   

딱 버티고 서 있는 느티나무들 풍경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개망초 풍경

쑥 자란 갈대숲 풍경

연한 안개가 피어 있는 강가 풍경

붉어지고 있는 해당화 열매들

초록 벼들로 뒤 덮인 들판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풍경

사람들이 다니는 개천 길에서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머리를 깃에 박고 자는 거위 떼 풍경     

  


그가 저런 풍경을 보았다면 어떤 감각으로 읽어내고 어떻게 토해낼까?


일찍이 《자전거 여행》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 그의 묘사력도 보았고, 칼의 노래를 비롯한 소설 속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문장의 경지를 보았으니, 내가 어찌 그의 감각과 표현법을 훔쳐오고 어떻게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그가 살아온 삶과 그가 읽어 온 책이 다르고, 그의 사유의 깊이와 결이 다르거늘,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의 예리하고 예민한 근골격 ‘감각’을 어찌 따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난 그의 뒤꿈치라도 보고 배우고 싶으니 《풍경과 상처》를 읽고 또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리하여 나의 근골격 감각을 깨워보리라. 다만 나는 그가 아니므로 내 중심은 꽉 잡아야 하리.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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