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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Feb 25. 2022

내가 지나온 길이다

흙먼지가 자욱한 화성의 붉은 땅에 두 줄기 바퀴 바위 자국이 뚜렷하다.

내가 지나온 길이다. 지구의 누구도 와 보지 못한 길,

어쩌면 우주의 그 누구도 와 보지 못한 길.

내가 만든 길, 나의 길.

- 이현 글, 최경식 그림,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          

  


12시 넘어 집을 나섰으니 가장 더운 시간에 길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는 이미 짱짱하고 눈부셨다. 남들이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날씨다. 기온이 31도, 곧 길 위로 이글거리는 열기가 내려앉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새벽 6시경에 나섰다면 다 걷고 들어올 시간이건만 도저히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다. 가장 더운 때만이라도 시도해 보아야 할 텐데 성공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번 걷기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니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나갈 것이다.




  

내가 이리 엄살을 부리면서 가 보면 어르신 느티나무는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위엄 있게 서 있다. 한층 더 짙어진 푸른 잎들은 검은빛마저 품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몸통을 쳐다본 나는 울타리를 따라 걸으면서 속으로 걸음 수를 세어본다. 108걸음이다. 첫날 걸을 때는 102걸음이었다. 보폭에 따라 다르고 우연일 텐데도 일부러 108보로 맞추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한다. 신라 시대에 유행한 탑돌이를 하듯 신성한 나무 주위를 돌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적어간 문장을 보며 질문을 하면 어르신 느티나무에게서 늘 대답을 들으니 느티나무가 바로 부처이고 예수가 아닐까? 그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어 대화를 나누면 그 기운이 전해져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 주에는 지난주에 써간 엽서를 다시 가져갔다. 그림책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에서 뽑아 간 문장보다는 책이 품고 있는 이야기가 거대하고 벅차서 손끝으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주 더 품고 걷기로 했다.




  

그 작고 느린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가 기계가 아닌 생물체가 되어 진하게 말을 걸어와서일까? 로봇은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내게 전해져 오는 애처로움은 극에 달한 듯했다. 그러니까 거대하고 벅찬 것 가운데엔 애처로움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오퍼튜니티의 삶이 내 삶과 겹쳐져서 그 짧은 시간 안에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니, 짧은 시간에 끝내기에는 여운과 생각거리가 너무 많았다.

  

과학에 큰 관심도 없을뿐더러, 내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는 화성 탐사 로봇이라니 선뜻《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를 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림책 심리학 공부를 같이 한 동기가 이 책을 인생 그림책으로 바꾸는 것도 모자라 닉네임도 화성탐사로봇 오퍼튜니티로 바꾸었다. 책도 보았지만 기계 머리를 크게 확대해서 그려놓은 표지에서 마음이 전혀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줌모임 때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닉네임을 바꿔 쓰는 분위기에서도 그 동기는 매번 그 닉네임을 고수했다. 무슨 책이기에 그러는지 궁금해서 결국 샀다.

  

그런데 단 한 번 읽은 것으로도 나는 오퍼튜니티에게 감정이 이입되고, 마음이 아프고 벅찼다. 필사도 했는데 많은 문장에 밑줄을 치고 있었다. 그림책에 있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내 삶을 많이 돌아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그야말로 오퍼튜니티를 향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2004년 당시 스피릿이 화성에 착륙한 떠들썩한 뉴스를 보기는 했어도 지금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스피릿의 쌍둥이 탐사 로버인 오퍼튜니티의 존재가 내게는 미미했다. 그것은 6개월 후에 스피릿이 탐사하던 반대편에 착륙한 로봇이다. 그때는 탐사 로봇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화성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저 기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제 와 변명한다.

  

그런데 그림책을 읽고 나자 내 사고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다. 로봇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로봇의 입을 빌어 말을 하고 있으니 완전히 그에게 스며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에 관한 뉴스와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그림책 내용은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어져 있기에 이입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내가 잘 아는 사람이나 아이가 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황무지 화성에 풍선처럼 생긴 에어백 보호막에 싸여 착륙한 것만 같아 처음부터 가슴이 저려왔다. 오퍼튜니티가 스스로 에어백을 걷어내고 카메라가 달린 얼굴을 긴 목으로 세운 뒤 태양 전지판을 날개처럼 펼친 뒤 눈앞의 광경을 찍어서 지구로 보내자 과학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퍼튜니티의 수명은 90일로 기대되었으나 그 시간을 넘고 넘어 총 15년 동안 42.16Km를 탐사했다. 1초에 겨우 5센티미터 밖에 갈 수 없는 바퀴 6개를 굴러 물이 있는 흔적들을 찍어 지구로 전송했다. 붉은 먼지바람을 헤치고 구덩이를 건너고 언덕을 넘으며 자신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앞바퀴를 굴릴 수 없게 되면 뒷바퀴를 굴러 걸었다. 모래에 빠지고, 모래 폭풍이 불어 한 달이 넘도록 태양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퍼튜니티는 태양 전지판을 접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이고 모든 기능을 끄고 버텼다.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이 문장이 와닿는 막막함이라니! 어둠과 모래 폭풍을 온몸으로 맞서고 뼈저린 고독감 속에서 견뎌낸 오퍼튜니티가 다시 일어섰다. 기다란 목을 세우고, 카페라 렌즈를 활짝 열어서 뚜벅뚜벅 다시 걷는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자기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흙먼지가 자욱한 화성의 붉은 땅에 두 줄기 바퀴 바위 자국이 뚜렷하다.

내가 지나온 길이다. 지구의 누구도 와 보지 못한 길,

어쩌면 우주의 그 누구도 와 보지 못한 길.

내가 만든 길, 나의 길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 오늘도 나의 길을 간다.”

  


이 문장들은 오퍼튜니티의 일생을 내 삶으로 끌어와 흉내 내 보고 싶게 만들었다. 힘과 의욕이 떨어질 때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될 것 같다.

  



© billy_pasco, 출처 Unsplash


우리가 이 지구에 와서 한 세상 살다 가는 것도 오퍼튜니티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물론 오퍼튜니티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 달랑 혼자 떨어져 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다. 삶을 이끌어가야 하는 우리는 오퍼튜니티이고, 오퍼튜니티가 걸었던 화성은 우리 인생이다.

  

세상에 나오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하나하나 채워나간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넘어지고 다치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게 된다. 어떤 이는 지레 포기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도전하여 새 삶을 살아낸다. 오퍼튜티니의 말처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험도 없지만 발견도 없다.”면서 가 보지 않은 길을 계속 나아간다. 멈추든, 되돌아가든,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든 그것은 본인 선택의 몫이다. 우리 삶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뒤로 가는 것을 실패나 잘못이라 할 수 없듯,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성공이나 옳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가에 의미 있다.

  

나는 내 삶이라는 화성을 더 많이 탐험하고 싶다. 매번 문장을 적어 상록오색길을 일주일에 한 번 오르는 것도 내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처럼 길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낮 시간에도 꾸역꾸역 걸었다. 물론 더 뜨거워졌을 때는 잠시 숲길 걷는 것으로 우회할 수도 있다. 미련하게 더위 먹고 쓰러지면 안 되니 말이다. 오퍼튜니티도 태양이 없는 밤에는 전원을 끄고 모래 폭풍이 몰려올 때도 날개를 접고 죽은 듯이 있으면서 때를 기다렸다.

  

새로운 땅으로 계속 나아간 오퍼튜니티처럼 나 역시 삶을 새롭게 구성하여 나아가고 싶다. 나중에 그 길을 돌아보면서 “내가 만든 길, 나의 길”이라고 웃음 지으며 바라보고 싶다.




© castleguard, 출처 Pixabay

  

며칠 전 장형숙 할머니와 통화했다. 올해 95세 되신 할머니는 두 번째 책 《책 사랑꾼 그림책에서 무얼 보았나?》에도 실었지만 신문이나 책, 또는 TV를 보시다가 용기와 격려를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날마다 편지 쓰시는 분이다. 당신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이라 직접 댁으로 방문하여 책을 건네 드렸다. 재작년 일이다. 그랬더니 책을 껴안고 너무 좋아하셨다. 그래서 이번 책도 보내 드리려고 초저녁에 두 번 전화드렸는데 안 받으셨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 낮에 걸었더니 아주 씩씩한 목소리로 받으셨다.

  

지금도 책을 읽으시느냐고 여쭈니 전날에도 단골 서점에 갔다 오셨노라 했다. 반갑기도 하고 깜짝 놀랐다. 아직도 책을 읽고 계시다니! 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지금도 혼자 살면서 손수 밥도 하고, 버스 타고 밭에 가서 푸성귀도 기르신단다. 그리고 아직도 편지를 쓰신단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 존경합니다. 저도 그렇게 살겠습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책을 보내드렸다.

  

이런 것이 내가 새로 걸어가는 길이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이 무엇일지 꾸준히 찾아보고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다. 내 삶을 열심히 탐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도움이 될 테고,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도 좋고, 때로는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그러한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 같은 장형숙 할머니, 그리고 400년 넘게 언덕에 서서 힘을 실어주고 있는 어르신 느티나무의 삶도 오퍼튜니티의 삶이 아닐까?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에서 긴 시간 걸어서 맨살로 드러난 목과 종아리 등이 붉게 부풀어 올랐지만 내 안의 에너지도 그에 못지않게 부풀어 올랐다. 뜨거운 길 위를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줄 일이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불 때는 그 즐거움이 더해져 나도 모르게 “아, 인생은 즐거워라!”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     

나는 오늘 오포튜니티였다.      


상록오색길 15Km를 걷는 동안, 오퍼튜니티가 15년 동안 걸어온 땀과 열매가 전해져 오면서 나를 응원했다. 자신의 수명을 60배나 더 늘리면서 아름다운 임무를 마친 오퍼튜니티는 마냥 가엽기만 한 로봇은 아니었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 머리와 가슴과 발을 움직이게 하는 멋진 친구이기 때문이다.  (2021.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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