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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Aug 07. 2021

어느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릇

세 번째 인터뷰

이제  가을이 시작되려던 무렵이었다. 킨츠기 수리를 위해 꼼꼼하게 쌓여 있던 포장지를 풀자 전혀 다른 느낌의 기물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쩐지 이제부터 시작될 계절들에 활약을 해야   같은 그리고 매년  계절에 활약을 해왔을  같은 기물들이었다. 하나는 약간 길쭉하면서 투박하지만 따스한 느낌이 드는 , 다른 하나는 소박한 듯하면서도  문양이 들어가 화려해 보이던 작은 잔이었다. 보자마자 ,  작은 잔으로는 분명 사케를 마셨겠구나, 크지만 한손에 들어오는 컵은 분명 평상시에 자주 사용했을  같은데.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일상의 소소하고 평범한 시간을 함께 했을 컵과  일상 속에서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주였을 잔이 조각과 파편이 되어 다시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일을 합니다. 검은 고양이 먼지와 함께 살고 있고 일상의 틈에서 잠시 자연 속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동물과 자연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환경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가는 지구에 더는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씩 실천하고 있습니다. 깨진 잔들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고쳐서 다시 쓰려고 모아둔 것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신가요?

물건을 살 때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라 정말 마음에 들고 자주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구매해요. 그래서 한 번 산 물건은 자주, 꾸준히 사용하고 망가져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물건에 정이 많이 들어 더 버리지 못하는 듯해요.


        수리를 맡기신 그릇은 언제 어떻게 구매하셨고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그릇 수리로 큰 컵과 작은 잔을 맡겼는데요. 큰 컵은 2012년 즈음에 단골 카페였던 '히비'에서 샀어요. 2009년에 문을 연 이 카페에서는 1년에 한 번 사장님이 일본에서 사 온 그릇들을 판매하는 '와사라이치'라는 그릇 마켓이 여셨어요. 워낙 예쁜 그릇이 많아 도토리를 저장해놓는 다람쥐처럼 매년 조금씩 야금야금 그릇을 사 모았어요. 당시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언젠가 독립하거나 결혼하면 많지 않아도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그릇이나 컵을 사용하고 싶었어요. 같은 모양의 검은색 컵과 비슷한 모양의 작은 컵도 세트로 사두었어요.


작은 잔은 2017년 교토에 있는 작은 빈티지 숍에서 구매했어요. 사케를 마실 병과 잔을 사고 싶었는데 마침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었지요. 주택을 개조한 가게였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어서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골랐던 기억이 나요. 주로 오래된 그릇을 판매하고 있어서 세트는 하나도 없었고 모양도 모두 달랐어요. 신중하게 고른 병도 잔 두 개도 모두 디자인은 달랐지만 어쩐지 잘 어울려서 기쁘게 품에 안고 돌아와 3년 정도 사용했어요.


        기물은 주로 언제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함께했던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큰 컵은 2013년에 결혼하면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그릇들을 꺼내 사용하게 되었어요. 저와 남편 둘 다 커피와 차를 홀짝거리며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걸 좋아해 7년 내내 곁에 두고 즐겨 쓰면서 아끼는 컵이 되었어요.


작은 잔은 주로 사케를 마실 때 사용했어요. 저는 그날 먹을 안주에 맞춰 술을 고르곤 하는데 어묵탕을 먹을 때 주로 사용했던 것 같네요. 계절은 역시 겨울이었고요. 모양과 무늬가 섬세하고 예뻐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기물이 어떤 이유로 손상되었나요? 그리고 그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히비에서 산 큰 컵은 2020년 초에 침대에서 책을 읽으며 물을 마시려고 머리맡 탁자에 두었는데 컵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다는 것이 탁 쳐서 넘어뜨리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어요. 제 손을 무척이나 원망했죠. 테이블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때 늘 함께한 컵이라 그 빈자리가 너무 크더라고요.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 똑같은 컵을 다시 가질 수도 없어 더 아쉬웠고요.


사케 잔은 씻고 나서 찬장에 올려두려다 떨어뜨렸던 것 같아요. 깨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쩍 하고 갈라져 버려서 매우 당황스럽고 슬펐어요. 집에 사케를 마실 잔이 이 잔과 또 다른 잔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쉬웠어요.


        사람들 대부분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버리는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버리지 못하시고 간직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많이 좋아했고 자주 사용했던 컵이라서 정이 든 것 같아요. 깨졌지만 미련이 남아 파편이라도 간직하자 싶어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잘 포장해 찬장에 모셔두었어요.


작은 잔은 그 잔을 샀던 그해 가을에 교토와 나라를 여행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차마 쉽게 버릴 수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사물에도 기억이 깃들어서 사용 전과는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무척 기뻤습니다. 그릇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정말 행복했어요.


        그릇을 기다리는 동안의 마음이 궁금해요.

그릇에 어떤 선이 그려질지 궁금하고 기대되었어요. 예전처럼 짝꿍인 컵들과 나란히 놓인 모습을 상상해보며 설레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릇에 생긴 자국은 사실 제가 떨어뜨려서 생긴 일종의 상처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수선된 그릇을 볼 때마다 예전과는 달리 왠지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앞으로 그릇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늘 그랬던 것처럼 저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함께 해줬으면 좋겠네요.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을요.





누구나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이 있다. 아무리 좋고 비싼 물건이 있어도 더 자주 손이 가는 일상 물건. 나에게도 그런 물건들, 그릇들이 몇 있다. 아침에 내린 커피를 마실 때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큰 컵, 맥주 마실 때 사용하는 작은 유리잔, 마치 코카콜라 잔이 연상되어 콜라를 마실 때마다 사용하는 투박한 유리컵. 조금은 특별한 아침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꺼내는 커피잔과 소서. 그 컵들을 가끔 물그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고 내 생활에 자리 잡고 있는지 눈앞에 펼쳐지면서 더 애틋해진다. 그리고 거창한 추억이 있지 않아도 일상에서 평범한 날을 함께하는 사물일수록 더 마음이 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이번 인터뷰에 응해주신 일러스트레이터와는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 뒤 기물을 직접 전하기 위해 2020년의 마지막 달에 직접 만났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많은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언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가 보던 어린 왕자 영문 문고판 헌책과 편지를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너덜너덜해진 헌책이었지만 아버지의 물건을 물려받았을 때 그 기분은 어떠했을까? 분명 그 책과 함께 그 안에 깃든 아버지의 일상의 기억까지도 함께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사물이 기억을 품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던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을 대하는 마음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킨츠기로 수리되어 다시 돌아간 컵과 잔은 그 겨울에 따뜻한 차를 담고 특별한 시간에 사케를 위한 잔으로 사용되었을까? 지금은 어떤 기억과 추억을 이어가고 있을지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진다.




기물을 맡기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 박정은

twitter.com/pjekr

instagram.com/1d1p_


*모든 인터뷰는 킨츠기 수리를 완료하고 기물을 전달한 뒤 서면으로 진행해 기획에 맞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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