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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31. 2024

글타오르네!


왜 다들 그럴 때 있지 않나. 고민했던 문제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풀리고, 꽉 막혀있던 생각의 물꼬가 둑 터진 저수지처럼 쏟아져 내리는 순간이. 지금 내 머릿속이 그렇다. 뇌에서 아드레날린이 뭉텅 분비되고 아이디어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1.4리터짜리 그릇에 담긴 회백색 세포에서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의미들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아무런 조짐 없이. 아무런 계기 없이. 인과관계의 법칙과는 무관한 듯. 물탱크는 보이지 않는데 수도꼭지에서는 생각의 글자가 무더기로 흘러나온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뉴런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뇌에는 대략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이것이 각각 1,000억 개의 연결을 갖는다. 1,000억의 1,000승. 불가해한 숫자다. 이 불가해한 가능성에서 발생한 하나의 돌연변이일까. 원인과 과정은 모호하고 결과만 뚜렷하다.


임계점이 임박했다. 특정 생각에 묶여 있던 뉴런이 탈출을 꿈꾼다. 꾸준하게 땔감을 넣어준 덕분에 물의 온도는 어느덧 100도를 돌파하고 물은 액체에서 기체로 변한다. 글이 타오르는 순간이 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의 누군가. 그건 나다. 나는 장갑을 낀 채 과열된 펜을 살며시 쥐고 수증기 같은 글을 쓰고 있다. 손이 글을 먼저 쓰고 생각이 따라가는 광경. 앞뒤가 뒤바뀐 현상이 사뭇 우스꽝스럽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 쓴다. 불길이 사그라질세라.


하얀 종이 위. 펜으로 글자를 쓰는 순간 검은색 스파크가 튄다. 깜깜한 밤하늘. 전기 입자가 일그러지는 순간 새하얀 스파크가 튀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하나는 흰색 배경에 검은색 흔적. 다른 하나는 검은색 배경에 흰색 흔적. 도무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치열함을 보여주는 흔적들. 낙인이자 각인이다. 번개가 그랬듯 글자 또한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각한다. 무언가를 볼 수 있도록 포착하고 무언가를 만질 수 있도록 정지시키는 일. 그리하여 글자는 대못이 된다. 안쓰러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지만 나는 계속 쓴다. 불길이 사그라질세라.


망상처럼 떠다니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글자로 인해 존재가 고정된다. 포착당함과 동시에 가격표가 붙은 존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유를 잃어버리고 불구가 되어 타인의 손에 거래된다. 불행한 일이다. 더없이 고고했던 ‘존재’가 한없이 추락하는 것도 모자라 계속 팔려 다니며 끊임없이 왜곡된다니. 인간 때문일까. 불확실성을 못 견뎌하고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름 붙이고 범주화하는  이기적인 본성. 소유하기 위해 대상을 죽이는 습관. 인간은 확실성을 위해 스스로 생동감을 포기했다. 인간은 망치, 글자는 대못. 존재를 가만히 두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나는 계속 쓴다. 불길이 사그라질세라.


가만 보니 글자는 사실 잘못이 없다. 다른 나라 글자를 보면 낙서처럼 보이듯이 빛의 스펙트럼을 거쳐 망막으로 들어오는 구불구불한 모양이 무슨 뜻을 전해주는 건 아니다. 글자는 의지가 없다. 정해진 일을 불평불만 없이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의지가 없는 존재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부당한 일이다. 더 슬픈 광경이 보인다. 대못이 다른 존재와 함께 고정되어 있다. 마치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것 마냥 말없이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 선 모습. 비참한 일이다. ‘존재’라는 피사체에 박혀버린 글자는 이미 부당하고 비참한 일을 겪고 있다. 슬픔이 치밀어 오르지만 나는 계속 쓴다. 불길이 사그라질세라.


나는 아직 수증기 속에 있다. 장갑을 낀 채 과열된 펜을 잡은 상태로. 글은 생명을 얻는 족족 기화된다. 수증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고, 호흡에 따라 내 몸을 순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땔감 삼아 계속 쓴다. 불길이 사그라질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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