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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29. 2024

삼투(渗透)


영혼에도 농도가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영혼과 영혼이 만났을 때 ‘삼투’가 발생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편 그렇다면 농도가 진한 의식과 농도가 연한 의식이 만났을 때 연한 의식의 총량이 줄어들고 진한 의식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문득 일상을 생각해 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발생하는 ‘삼투’ 현상 진한 농도의 사람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일. 이 또한 자명해 보인다. 연한 농도의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를 그에게 투사함으로써 의식의 총량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연한 농도의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진한 농도의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설령 그 관계가 가족 혹은 연인이더라도 흐릿한 선은 그어놓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이 엉키다 못해 사라질 수 있다.


요즘 나처럼 연한 농도의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 기술의 발전속도가 적응의 속도를 추월해 버린 탓에 물리적 접촉을 월등히 능가하는 비물리적 접촉이 잦아졌다. 그러니까 내외부를 가르는 어떤 ‘막’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다. 정확하게는 경계가 무척 얇디얇아졌다. 나도 잘 모르는 선호를 알고리즘은 이미 알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나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어서 굳이 나에게 물어보지 않더라도 나란 존재를 재구성할 정도다.


초거대 AI 기업들이 공익을 표방하지만 커튼 뒤 가려진 진실은 가볍지 않다는 것. 그것은 물리적인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의식’과 연관된 일이라 더욱 섬뜩하다. 두 가지 형태의 ‘내’가 존재한다. 하나는 탄소 유기체인 DNA가 만들고 수백억 개의 뇌신경 세포와 수백억 제곱의 커넥톰으로 규정된 나. 다른 하나는 실리콘 무기체인 알고리즘이 만들고 수백억 제곱을 가볍게 능가해 버리는 전기신호의 연결로 규정된 나. 어느 쪽의 농도가 더 진할까. 연한 농도의 나는 이 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결정 장애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영역까지 명쾌하게 결정해 버리는 알고리즘. 게다가 그 결정이 내 마음에 꼭 든다는 사실. 이점이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감정이 혼란스러우므로 이성의 힘을 있는 힘껏 쥐어짜 본다. 마른걸레를 짜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첫 번째 생각. 알고리즘이 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일은 사실 단편적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피상적인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어 붙여 만든 나. 알고리즘의 결정과 나의 결정이 같더라도 과정은 천지 차이라는 점이 작은 위안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따져봐도 알고리즘은 아직 의식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지 못했다.


두 번째 생각. 인간은 물로만 구성된 게 아니다. ‘삼투’ 현상으로 의식의 총량이 줄어들더라도 물만 빠져나간 것이지 알갱이는 그대로 남아있지 않는가. 자아가 알고리즘에 대체될 위험이 느껴지더라도, 한 가닥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건 그 작은 알갱이들을 믿기 때문이다.


마른걸레에서는 물이 빠질 대로 빠져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다. 불면 날아갈 듯 힘 빠진 가냘픈 이성의 조각들. 마치 정신승리를 위한 독백이자 현실을 부정하고자 스스로 놓는 마취 주사 같다. 진실은 달궈지는 냄비에 들어가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안락함을 느끼는 개구리. 이런 냉혹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까.

미로에 빠진 나는 제자리에 서서 이 글을 올렸을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 글자는 이진수로 변환되고 다시 전기신호로 바뀌어 나라는 데이터 모음에 축적될 것이며, 가상의 나는 이 글과 과거의 나를 합쳐 미래의 나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것은 반복된다. 반복은 프로세스로 고착된다. 시간의 힘은 다시 태어난 가상의 나를 순식간에 ‘낡은-나’로 만들어 버리고, 그렇게 ‘낡은-나’는 다시금 삼투라는 법칙에 이끌려 ‘미래-나’에게 흡수되는 우아한 프로세스.


법칙을 닮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자 존재를 삼키는 삼투의 끝이다. 결국, 증류되어 남은 건 알갱이를 향한 갈망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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