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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May 27. 2024

마음 편의점의 원플러스 원

제33회 용아 박용철 전국백일장 우수상 수상작


편의점은 편리하다 못해 지능적이다. 편의점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상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방대함과 효율성에 자주 놀란다. 어떻게 이런 좁은 공간에, 이토록 다양한 물건을 욱여넣을 수 있었을까. 사실 편의점의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고객의 요구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그렇다. 오늘날 인공지능을 활용한 마케팅 기술은 고객조차 모르고 있던 기호를 고객에게 제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체계는 인간의 뇌와 사뭇 닮았다. 특히 공간활용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뇌는 두개골이라는 공간에 갇혀있고 편의점은 계약된 몇 평짜리 공간에 갇혀있다. 뇌는 기억에 라벨을 붙여 신경계 어느 곳에 진열하고, 편의점은 상품에 라벨을 붙여 선반 어느 곳에 진열한다. 신경계와 선반은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뇌와 편의점은 철창에 갇힌 죄수가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그녀의 시 <뇌는 하늘보다 넓습니다>에서 이 점을 적확하게 포착한다.


제약으로 가득한 것이 제약이 아니었다는 깨달음.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생각이지만, 가뭄에 찌들어 쩍쩍 갈라진 내 마음에게는 비소식과 다름없다. 사막을 지나며 갈증에 시달린 사람에게 한 모금의 물이 생명과 다름없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다. 다시금 용기를 내서 조각조각 깨어지기 직전의 마음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라벨이 붙어있다. 경제적 위기, 관계에서 초래된 갈등, 상처 주는 말, 건강악화, 우울. 각각의 균열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의 덩어리들. 그것들은 그냥 무의식의 영역에 내동댕이쳐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에게서 태어났으나 내가 버린 그것들. 이제는 껴안아야 할 때다. 용기 내어 정리를 시도한다. 검댕이가 묻은 기억뭉치를 하나하나 들고 살폈다. 현미경으로 감정의 특징을 살피고 분류하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기억뭉치는 이미 시간의 힘으로 발효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정도면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려도 될 것 같다.


남은 것은 정리하는 일. 원플러스 원 판촉행사를 적용하는 건 어떨까. 편의점에 가면 내가 선택한 상품에 거의 언제나 원플러스 원, 혹은 투플러스 원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그런 시각정보가 접수되면 나의 마음은 나풀거리고, 손은 뇌의 통제를 벗어나 하나를 더 집어 들게 된다. 이제 신입 기억뭉치와 기존 기억뭉치를 묶어보자.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합치는 일. 이것은 희석이다. 비탄의 감정이 즐거운 경험과 시간의 힘으로 희석되는 것처럼. 기억의 원플러스 원 또한 감정의 출렁임을 완화시켜 준다. 그리하여 내 기억의 서랍에는 새로운 형태의 감정이 진열된다.


부정적 감정은 기어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모한다. 이 작업은 시간이 걸리지만 끝이 있는 일이다. 가끔 발효되지 않은 기억뭉치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통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일단 한 번이라도 직시한 기억들은 약해지는 것이 분명하기에 참을만하다.

 

감정을 대면하고 분류하여 마음속 편의점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희석된 감정은 좋은 기억으로 바뀌고, 좋은 기억은 다시 안 좋은 기억과 결합하여 희석되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이 작업의 끝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마음 편의점에는 좋은 기억이 가득 찰 테다. 그때쯤 되면 내가 선택하기 전에 마음속 편의점이 내 기호에 따라 적절한 감정을 제안해 주리라 믿는다. 오늘날의 편의점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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