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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17. 2020

여행자의 2020_락다운 in 네팔

프롤로그

-코로나가 없었던 2019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수 있었던 시절,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채웠다. 유럽, 아시아, 중남미 대륙까지 나에게 해외여행은 어느새 특별한 휴가가 아닌 일상이 되어 있었다. 작년에는 한국의 추운 겨울을 피해 떠난 태국을 시작으로 남자 친구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겨울, 통장잔고는 바닥났고, 한국에서 겨울을 보내기엔 너무 추웠기에 인도에서 한인 게스트하우스 매니저로 일했다. 배낭여행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나라, 인도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오랜만에 마음잡고 일을 시작했지만, 인도 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결국, 3달 만에 일을 그만두고 다시 겨울이 끝날 무렵,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네팔에서 남자 친구와 재회했다.

 -

  매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여행자들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목적으로 네팔을 방문한다. 하지만 추운 건 딱 질색이라 겨울을 피해 다니기도 바쁜 우리에게 추운 히말라야 트레킹은, '피해 다니기도 바쁜 겨울을 제 발로, 그것도 아주 힘들게 찾아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네팔에서 재회한 이유는 오직 터키인 남자 친구(오구즈)의 인도 비자 때문이었다. 내가 인도에 있는 동안 오구즈는 나를 보러 인도로 오기 위해 태국에 있는 인도 대사관을 몇 번이나 방문했지만, 주태국 인도대사관에서는 비자업무를 하지 않으니, 네팔에 있는 인도 대사관에 가서 신청하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나는 델리 공항에서 소정의 돈만 내면 바로 도착비자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공항에서 도착비자를 받을 수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국적이 다른 남자 친구에게 인도 바지 받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네팔에서 인도 비자발급은 신청일로부터 최대 10일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인도 비자만 나오면 바로 인도로 넘어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서는 가장 짧고 저렴한 15일짜리 도착비자를 발급받았다. 하지만 오직 인도 비자 때문에 오게 된 나라, 히말라야는 가볼 생각도 없었던 나라, 그래서 여행할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나라 네팔에서 일 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오구즈의 인도 비자 발급을 위해 인도대사관에 방문했다. 오구즈는 이미 태국에서 비자발급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두었고, 나에겐 든든한 한국 여권이 있으니 온라인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사진 2장과 돈만 챙겨 인도 대사관으로 향했다. 나에겐 아직 한 달 정도 남아있는 인도 비자가 있었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건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나라인만큼 오구즈가 비자신청을 하는 김에 같이 넉넉히 6개월짜리 비자를 다시 발급받을 생각이었다. 인도 비자를 발급하기 위해서는 인도대사관을 총 3번 방문히야하는데, 첫 방문 시엔 서류심사, 두번째엔 인터뷰, 그리고 둘 다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비자가 찍힌 여권을 찾으러 마지막으로 방문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구즈가 문제였다. 오구즈는 첫 번째 서류 제출에서 업이 직업 카테고리에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통장사본까지 첨부해 수입까지 증명해 보였지만 또 거절당했다. 결국엔 직업 카테고리에 있었던 이미 오래전 그만둔 '소프트 엔지니어'로 직업을 바꿔 적었고 예전에 다니던 회사 정보와 그때 쓰던 명함까지 첨부하고 나서야 겨우 일차 심사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럴듯한 직업이 없는 나조차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던 일차 심사에서 오구즈가 막혔던 이유는 단순히 국적 문제라고 추측했지만, 비교적 준수한 외모를 가진 다른 터키들이 인도를 여행한 것으로 보아 국적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분명 오구즈의 히피를 연상케하는 드레드락과 긴 수염이 비자발급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인도와 네팔은 동양철학의 중심지, 힌두교와 불교의 발상지, 물질주의를 벗어난 요가와 명상의 나라, 물가가 저렴하고 오래 머물기에 부담이 없는 국가인만큼 매년 수많은 히피들이 몰려 히피들의 성지로도 불린다. 하지만 인도와 네팔 정부 입장에서 돈을 거의 쓰지 않는 히피들은 관광수입을 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매년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자국민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짐일 뿐이었다. 관광비자에 제한이 없었던 네팔이 관광비자를 1년에 5개월로 제한하게 된 이유도 히피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란다. 이러한 이유로 카트만두 인도 대사관에 보이는 사람들은 히피들의 성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히피들 뿐이었다.



  세 번째로 인도대사관을 방문하던 날, 오구즈의 서류가 겨우 통과되었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 무렵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위험한 나라가 되어 있었고, 많은 나라에서 한국인 입국 제한을 시작했는데 그 중엔 인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는 한국인 대상 모든 유효한 비자를 무효시켰고, 도착비자 제도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하루 사이에 모든 게 변해버렸다. '나는 한국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아무리 한국이 위험한 상라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그 날, 히피들만 북적이던 인도대사관에서 처음으로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한 분은 뭄바이에서 사업을 시던 분이었는데, 어제저녁 카트만두에서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공항에 갔다가 탑승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대사관으로 왔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인도에서 구호활동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잠깐 카트만두에 워크숍을 온 사이에 국경이 막혀버렸다고 했다. 당시 인도는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인도인의 입국까지 막아버릴 정도로 철저히 국경을 봉쇄했다. 인도 사람도 인도로 갈 수 없는 판국에 제 아무리 인도에서 왔다고 한들 다시 인도로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우리는 인도로 갈 수 없음을 인지해야 했고, 뭄바이에서 사업을 하던 사업가도, 노트북을 포함한 모든 생활용품이 인도에 있다고 했던 구호활동가도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잃어버린 특권

 한국 여권은 내가 처음으로 가져본 특권이었다. 한국 여권은 free-pass권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여권 하나만으로 대부분의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었)고, 입국 심사도 까다롭지 않다. 간혹 관광비자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통장잔고 따위를 증빙하지 않아도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여행 중에 아무리 거지꼴을 하고 다녀도 국경에서 문제가 생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구즈와 함께 여행을 하며 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특권임을 새삼 실감했다. 여행 중 난처하거나 위험한 상황이 기면 항상 나서서 나를 지켜주는 오구즈는 국경을 넘을 때만은 감히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입국심사관이 오구즈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온갖 이상한 질문들로 쏘아붙이는 바람에 오구즈를 빈정 하게 만드는 일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오구즈는 나에게 구호 신호를 보냈는데, 그의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입국심사관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으면 나의 위치는 일상을 견디기에도 벅찬 소시민에서 그것과는 아주 다른 일상을 즐기는 관광객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어린 나이에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권에 찍힌 알록달록한 세계 각국의 도장을 보며 누군가는 내가 금수저인 줄 착각하기도 했지만 우리 집은 기초수급대상을 간신히 피한 차상위 계층이다. 한국에서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살아온 나는 외국에서 소위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유행에 뒤처진 촌스러운 나의 옷은 세계 패션시장을 선두하는 k-패션이었고, 홈쇼핑으로 대량 구매해둔 저가 화장품은 K-뷰티를 이끈 고품질 한국 화장품이었다.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어 기미가 올라온 검붉은 내 피부는 상대적으로 밝았고, 예쁘단 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평범한 얼굴이지만 같이 사진 찍어 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리 헬조선을 외쳐도 나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잘 사는 시대에 태어난 축복받은 세대였다. 한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국가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곧 기회다. 나는 그 기회를 여행이란 형태로 만끽했다.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내가 제일 가난하고 못난 것 같아 그게 좀 억울할 때가 있었는데, 한국 여권은 내가 처음으로 가져본 특권이었다. 사실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지만 말이다.


 네팔에 도착한 날 저녁 우연히 들린 식당에서 아직 10대인 듯 보이는 종업원이 국적을 물었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이 난 얼굴로 bts를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 한껏 들뜬 질문에 실망히싴고 싶지 않아 가끔 만나는 사이라고 농담했다. 그녀들의 요구로 사진도 찍었다.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환영받는 일은 이미 너무 익숙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카트만두 식당을 마지막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팔도 한국인 입국을 금지했다. 인도와 네팔뿐 아니라 한국인 입국을 금제 한하는 국가들은 하루에도 10개국씩 빠른 속도로 늘어갔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를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은 위험하지 않은 수준이라, 한국을 포함한 5개국 (중국, 한국, 일본, 이란, 이탈리아)만 금지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처음으로 동양에서도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bts와 잘 아는 친구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먹혔던 내 얼굴은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터키 국적의 남자 친구와 함께 세계여행을 하면서 늘 남자 친구 때문에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제한되었는데, 처음으로  남자 친구의 국적이 아닌 나의 국적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으로 가져본 특권이 사라졌다.


  그래도 '이 시국'이 금방 지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행은 주기적으로 있어왔다. 사스도 있었고 메르스도 있었다. 늘 생소한 질병의 이름이 들려왔지만, 그 이름이 위혐적으로 느껴지기 전에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었다. 질병과의 전쟁에서 항상 인간은 승리했고, 늘 그래 왔듯이 코로나도 별 거 아닐거라 생각했다. 우린 여행을 계속할 것이고 인도 여행이 조금 뒤로 미뤄진 것일 뿐이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15일짜리 네팔 도착비자가 만료되기 전까지는 인도가 국경을 열 것 같진 않으니, 우리는 행선지를 인도 대사관에서 네팔 투어리즘 오피스로 변경했다. 81불을 더 지불하고 비자를 한 달 더 연장했다. 그 누가 이럴 줄 알았겠냐만은 이럴 줄 알았으면 60일짜리 도착비자를 받건데, 가장 짧은 도착비자를 받는 바람에 비자비를 2배 이상 더 지불했다. 생각지도 못한 네팔에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되었으니, 네팔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봤다. 산에는 죽어도 가기 싫은데 네팔 하면 떠오르는 게 히말라야뿐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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