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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18. 2020

다시 시작된 여행

Ep3. 인도에서 네팔 카트만두로

 인도에서 게스트하우스 매니저로 일하는 동안 지상을 걸어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5분 거리의 마트조차 걸어가기 힘들었다. 신호등도 없고 역주행까지 난무하는 인도에서 500m 떨어진 마트에 가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족히 20분이 걸렸다. 빵빵 거리는 경적소리를 내 질주하는 차들 사이에서도 여유로운 소와 멧돼지 떼, 개들과는 달리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한 발짝 나아갔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겨우 죽을 각오를 하고 용기 내어 도로를 건너야 무사히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파트 안에 갇혀 사는 게 너무 답답했던 날에는 이렇게 라도 마트에 다녀오곤 했는데, 500m 거리의 마트를 다녀오고 난 후의 피로감은 하루 종일 히말라야의 산을 오른 후에 피로감과 같았다. 그러니, 대학교 다닐 때도 버스가 답답해서 매일 1시간씩 걸어서 통학을 했을 정도로 걷는 걸 좋아하는 나라도 걷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껏 걷지도 못하고 아파트에서 갇혀 지냈던 지난 3개월간의 생활은 나에게 감옥살이였다. 그런 감옥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고, 네 두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인도에서 보기만 했던 검은 눈동자의 사람들이 가득한 타멜거리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서자, 늘 꿈꿨던 여행지의 다큐멘터리 영상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엔 어디든 산이 있었고 아래로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넜다. 먼지 섞인 자연바람이 어딘가 꿉꿉한 냄새를 싣고 불어오는 것도 좋았다. 다시 여행자로, 원래 내 모습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답답한 인도 생활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났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 그리고 여행을 다시 시작한다는 설렘, 이 삼박자가 만들어 난 환상 속에 젖어들었다.



 -솜사탕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에게서 분홍색 솜사탕을 구매했다. 딱히 먹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냥 기분이 좋아서 산 것이다. 그 사이 1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경찰이 불법영업을 단속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오랜만에 나타난 손님을 상대하느라 미처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경찰을 보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달아나는 동안 아이는 혼자 단속을 피하지 못했고 결국 가지고 있던 솜사탕을 모두 빼앗겼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그만 멍해졌다. 그 사이 아이는 울상인 얼굴로 50루피를 받아 들고는 사라져 버렸다. 빠르게 스쳐간 아이의 마지막 얼굴은 불 꺼진 부엌에 홀로 앉아 소주를 목구멍으로 들이붓던 아버지의 얼굴만큼이나 무거웠다. 나는 방금 막 도착한 새로운 여행지에 신이 나 있었고, 아이는 한순간에 모든 물건을 잃었다. 여행자와 소시민의 처지는 이토록 다른 것이다. 오랜만에 먹는 솜사탕은 아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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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트만두로 오기 바로 직전, 나는 혼돈의 도시 델리 빠하르간지에 있었고, 오구즈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다카에 있었다. 우리 둘 다 그런 곳에서 카트만두로 왔으니 상대적으로 카트만두는 굉장히 평화고 깨끗한 도시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카트만두는 결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카트만두를 아름답게 묘사한 글들을 볼 때면, 분명 그 글을 써낸 여행자들도 우리처럼 혼돈의 도시로 악명 높은 델리나 다카에서 온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20년 동안 카트만두 인구는 10배 이상 급격히 증가했다. 400만 인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카트만두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마그마티 강은 쓰레기로 뒤덮여 악취가 났다. 좁은 도로는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해 차들은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3시간씩 정체되어 있기도 했다. 여기에 큰 트럭이 껴있기라도 하면 사람이 통과할 틈도 없어 신호 대기 중인 차량 마냥 한참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카트만두에서 나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시끄럽게 울리는 경적소리 때문에 늘 피곤했다. 아무렇게나 올린 건물들은 조금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부실공사와 지진의 여파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두 건물은 사람이 넘나 들 수 있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꼬여 있는 전선들은 결국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도로 한복판을 차지했다. 2000m에 육박하는 고도에 피부는 건조했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미세먼지에 마스크를 써야 했다. (우리가 카트만두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네팔은 확진자가 없었다). 타멜거리는 히피들과 그들을 상대로 해쉬쉬를 파는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였다. 지난 10년간 카트만두는 이미 너무 변해버렸고, 지금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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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만 6개나 있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다. 하지만 카트만두를 단순 경유지로만 생각했던 탓에 이미 카트만두 여행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우리는 매일 카페만을 오가며 지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카트만두 여행을 아주 즐겼던 다른 여행자들이 성기에 무언가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수행자의 영상을 보여줬을 때도 그들의 엽기적인 문화가 꽤나 자극적이긴 했지만 우리의 게으른 발걸음을 이끌지 못했다. 카트만두에서 머문 2주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방문한 곳이라곤 숙소 근처에 있었던 원숭이 사원과 카트만두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두르바르 광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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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에 확진자가 없었던 3월 초의 두르바르 광장.

빨간 사리를 두르고 그 사이로 축 처진 뱃살을 드러내고 다니는 네팔 여성들,

꽉 낀 청바지에 핸드백을 울러 매고 서양식 화장을 한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

짚으로 만든 커다란 바구니를 이마에 이고 벽돌을 나르는 여자들

골목 곳곳에 있는 사원이나 불상 앞에서 사람들은 제3의 눈이라 불리는 티카를 찍어주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생수를 파는 건지 사달라고 구걸하는 건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잡상인들과 혼을 담아 정교한 만달라를 그리는 화가,

하얀 옷을 입고 마른 몸으로 멍하나 앉아 구걸하는 노인,

그리고 이 모든 게 신기한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쓴 사람은 없었다.

나에게 두르바르 광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마스크 없이 공존했던 마지막 풍경이 되었다.

(마스크가 없는 이 풍경을 이렇게 오랫동안 다시 못 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열심히 봐 둘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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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초기 당시 한국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걸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했지만,  인도와 네팔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오히려 더 코로나로 의심받았다. 인도에 있는 한 쇼핑몰에서는 마스크를 꼈다는 이유로 동양인 출입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인종차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비록 인도 국경이 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네팔이지만 한국에서는 여행은커녕 학생들이 학교도 못 가는 시국에, 마스크 없이 안전하게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건 괜히 미안하면서도 나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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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서둘러 인도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세계 최대 축제 중 하나인 홀리 축제를 인도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홀리를 보내겠다는 꿈은 이미 날아가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네팔에서 홀리 축제를 보내게 되었다. 이미 네팔 비자 연장도 끝났으니, 더 이상 카트만두에 머물 이유가 없었지만, 홀리를 카트만두에서 보내기 위해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홀리는 힌두교 달력으로 새해가 되는 날이다. (사실 네팔에서는 민족들 마다 사용하는 달력이 달라 새해만 30일이 넘기 때문에, 이 말은 엄밀히 따지면 사실이 아니다. 또한, 공식적으로 네팔에서 하는 새해도 4월 언저리였으니, 새해 축제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새해를 기념하는 축제라고 했으니 일단은 그냥 새해를 기념하는 축제라고 해둬야겠다. 네팔에서 거의 1년을 보내며, 많은 축제들을 경험했지만, 그 어느 축제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거나 혹은 다 다르게 알고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 어 축제도 뭐라 설명하기에 애매하다.) 엄격한 카스트제도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힌두교 문화지만, 홀리 때만큼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에게 가루를 던지며 놀 수 있는 축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당시, 이미 인도에도 확진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인도 정부에서는 홀리 축제를 금지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코로나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또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세계적인 축제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도에서도 골목 곳곳에서 축제 중이었다. 인도보다 하루 빠른 네팔 홀리 축제 때도 마찬가지로 네팔에 확진자가 딱 2명뿐이었기 때문에 홀리를 마음 놓고 실컷 즐길 수 있었다.

 홀리가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네팔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홀리 전부터 학교에서 가루를 던지고 논 학생들은 온몸이 엉망인 채로 하교를 했고, 곳곳에서 하얀 홀리 티셔츠를 팔았다. 홀리가 되면 사람들은 알록달록한 가루를 더 돋보이게 해주는 하얀 티셔츠를 입지만, 꼭 하얀 티셔츠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홀리 때 나는 회식 티셔츠를, 오구즈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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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잠이 일상이 되어버린 탓에 홀리 전날은 억지로 일찍 잠을 청했지만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11시가 되어서야 거리에 나왔다. 아침부터 이미 한바탕 했는지 온 골목에는 알록달록한 가루 파우더로 엉망이었다. 뒤늦게 다양한 색상의 가루 파우더를 사서 두르바르 광장으로 향했다.

 

 두르바르 광장으로 가는 길은 전쟁이었다. 사람들은 카스트도 없는 외국인에게도 '해피 홀리'를 외치며 가루 폭격을 날렸다. 가루뿐 아니라 물을 뿌리기도 했다. 2층이나 3층쯤 되는 건물 위에서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뿌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홀리 때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아이들이었는데, 순진한 웃음에 속아 그들을 절대로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 이들이 주로 쓰는 무기는 가루가 아니라  물이다. 가루는 금방 다 써버리지만, 물은 계속해서 무제한으로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그냥 붓기도 하고 혹은 물풍선을 던지기도 하는데 이 물풍선을 잘못 맞으면 등에 피멍이 들 정도로 아프다. 게다가 고도가 2000m 가까이 되는 카트만두의 3월은 밤이 되면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하다. 그러니 아무리 낮이라도 온몸이 흠뻑 젖고 나면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춥다. 하지만 시퍼레진 입술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실거렸다.


 가루 세례와 물세례로 온몸이 완전히 더럽혀진 후에야 겨우 두르바르 광장에 도착했다. 꽤나 늦은 오후 지도 두르바르 광장은 광란 그 자체였다. 광장 바닥은 컬러 파우더들이 섞여서 두껍게 쌓여 원래 흙밭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팝송도 케이팝도 아닌 네팔 음악에 춰 신나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 넓은 광장이 조금의 틈도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자칫 남자 친구의 손을 놓치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우리는 손을 꼭 붙들고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루 범벅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빈 곳 (옷 속이나 콧구멍이나 귓구멍 등)을 찾아 가루를 뿌렸다. 혹은 이미 가루 범벅인 얼굴 위로 끊임없이 새로운 색의 가루를 발라주었다. 덕분에 카메라로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내 얼굴색은 변해 있었고, 피부가 따가웠다. 하루 종일 춤을 출 수 있는 네팔리들과는 달리 고작 몇 시간 만에 체력은 바닥났지만, 그 어떤 축제보다도 환영받았던, 함께 즐길 수 있었던 축제였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했는데 몇 번을 씻어도, 저렴한 염색약으로 염색을 한 후 머리를 감을 때처럼, 온갖 색들이 뒤섞여 계속 빠져나왔다. 샴푸도, 비누칠도 5번 정도 하고 나왔지만, 여전히 귓구멍과 콧구멍 사이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가루가 남아있었다. 옷이 낡아 떨어져도 몇 번을 기어 입을 정도로 옷을 잘 사지도 잘 버리지도 않는 우리지만, 홀리 때 입었던 옷은 도무지 빨 자신이 없어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샤워를 하고 몸이 개운해지니 배가 고파왔지만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해가 떨어지기까지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와 제대로 된 첫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멕시코 코코 봉고와 같은 세계적인 클럽도 여럿 가봤고, 스페인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 소떼들이 달리는 것도 봤고, 일 년 내내 축제인 브라질 해변도 맘껏 렸고, 유럽 전역에서 열리는 에픽 파티에도 종종 참가했지만, 홀리만큼 모두가 이처럼 광적인 축제는 없었다. 왕년에 이비자에서 엉덩이 꽤나 흔들었던 오구즈도 그동안 경험한 축제 중에 홀리가 가장 광적인 축제임을 인정했을 정도다. 게다가 다른 축제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알코올이나 약물 없이도 모두가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취한 사람도 있긴 하지만 다른 축제등에 비하면 그 비중이 현저히 낮다) 요가와 명상의 나라라는 네팔의 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그 어떤 국가보다도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네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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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란의 축제를 보냈으니, 네팔에서도 확진자가 안느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며칠 후, 네팔에서도 한국을 포함한 5개국 (한, 중, 일, 이란, 이탈리아)의 입국을 금지했고, 그 며칠 뒤엔 모든 외국인 입국을 전면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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