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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20. 2020

나의 작업관에는 귀천이 있었다

Ep5. 히말라야 포터

 윈드풀에 입성하자 트레킹 준비가 일사천리로 끝났다. 막 산에서 돌아온 다른 여행자들에게 최신 정보도 얻었고, 윈드풀에서 트레킹화부터 스틱, 방한용품, 침낭, 물병 손전등까지 트레킹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공짜로 빌렸다. 산에서 당 보충할 과자들도 잔뜩 샀고, 사진 2장을 뽑아 트레킹을 위한 팀스와 퍼밋까지 발급받았다. 팀스와 퍼밋 발급에는 인당 5만원이나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큰 돈을 주고 들어가는 김에 푼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마르디 히말까지 한번에 다보고 올 작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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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새벽 5시 게하에서 나와 트레킹이 시작되는 나야풀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바그룽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대부분 여행자들은 나야풀까지 택시로 이동하기 때문에 일찍 나설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시간은 2배 이상 걸리지만 요금은 10배 저렴한 로컬버스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날이 밝았고, 날이 밝으니 설산이 보였다. 매일 늦게 일어난 탓에 네팔에 온지 거의 3주만에 처음 본 설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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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나야풀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분명 첫차가 7시라고 했는데 버스는 9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네팔도 외국인 입국을 막아버린 후라 나야풀로 가는 외국인은 우리 커플과 다른 유러피언 커플 한쌍 뿐이라 승객이 없었.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버스 안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창 밖으로 군인들이 더운 복장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게 곧 미래의 내 모습인 줄도 모르고 여유롭게 사모사와 계란후라이 튀김을 먹으며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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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다림에도 승객을 채우지 못한 버스가 드디어 움직이자 널널하게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버스는 10분도 가지 않아 다시 정차했고, 금새 만석이 되었다. 나야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는 같은 리듬의 네팔 노래가 무한 반복 되었고, 버스는 신나는 노래에 맞춰 놀이기구 탬버린처럼 흔들렸다. 3분에 한번 꼴로 엉덩이가 붕 떳다가 딱딱한 좌석 시트에 쿵 떨어지는 바람에 꼬리뼈가 아팠다. 마을을 벗어나자 창밖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졌지만 감상할 수 없었다. 미친듯이 흔들리는 버스에 나를 포함한 외국인 승객들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네팔리들은 익숙한 듯 아무 표정 없이 버스 손잡이만 꼭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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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시간 가량 이동한 후 꼬리뼈가 무감각해질 무렵 나야풀에 도착했다. 나야풀은 트레킹 시작지점이자 첫 히말라야 마을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등교라고 하기에도 하교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에 무리지어 지나갔다. 한국어로 쓰인 엄홍길 대장이 지었다는 히말라야 학교 간판을 지나쳐 팀스와 퍼밋을 확인 받고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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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를 오르는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가이드와 포터를 동반하지만, 우리는 가이드도, 포터도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그만큼 많은 정보가 있었기에 가이드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남미와 유럽 트레킹 상품 국외 인솔자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산악 가이드의 역할도 잘 알고 있었고, 히말라야는 비록 처음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산 꽤나 탔다는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포터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불편한 직업이라는 이유로 애초에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30kg가 넘는 무거운 짐을 들고 산을 오르내리는 포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제사회의 큰 이슈였다. 학창시절 읽은 히말라야 포터들의 인권 문제를 다룬 공정여행에 관한 책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다행히 그 책을 읽은지 10년이 지난 지금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는 포터들도 많아졌다. 실제로 산에서 만난 포터들은 그 책에 묘사된 포터들처럼 비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포터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물병이나 초콜렛, 카메라 따위가 든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도 고산병에 허덕이며 힘들어하대다수의 트레커들과 달리, 스틱도 없이 자기 덩치만한 크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도 산을 오를 수 있는 강인한 체력에 대한 우월감마저 느껴졌다. '래썸삐리리'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게 일하는 포터들 덕분에 불편했던 직업 한결 편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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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연히 시장논리를 따져보면 많은 트래커들이 오랜 산행에 필요한 많은 짐을 대신 지고가 줄 사람 필요로 했고, 포터들은 그 수요를 충족시기 위해 자연스레 생겨난 직업다. 다른 수많은 직업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생겨난 존중받아 마땅한 직업이지만, 이 직업에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에는 나의 무의식에 잠재된 직업적 편견 한 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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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말라야 포터를 직접 본 건 이번이 처음이였지만, 그동안 와 비슷 많은 직업들을 목격했다. 인도네시아 이젠산에는 택시라고 불리는 손수레가 있는데, 손수레 택시기사들은 손님을 태운 손수레를 앞에서 한 명 끌고, 뒤에서 한명이 밀며 산 정상까지 승객을 실어 나뤘다. 100kg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영국 서방식민국가에서 온 거구의 서양인이 이 산악 택시를 탔을 때는, 무려 4명에서 수레를 밀어 올리기도 했다. 그 광경은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인들이 식민지 원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오구즈는 서양 뚱땡이를 포함한 산악 택시 승객들을 '저럴거면 차라리 산에 오지 라'며 맹렬히 비난했지만, 나는 그건 지나치게 감성적인 생각이라며 비판했다. 어쨋든 그들이 원하는 것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우리가 아닌 서양 뚱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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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나도 오구즈와 같은 마음이였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이건 도무지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직업군이였다. 안데스 산맥에서는 주로 당나귀를 이용다. 당나귀에 관광객을 태우고, 현지인은 그 당나귀를 끌고 산을 오르는 식이다. 인도네시아 보다는 나은 형태였지만, 하루에도 몇 번을 당나귀를 끌고 고산을 오르내리는 현지인도, 그들에게 이끌려 올라가는 당나귀들도 깊은 콧바람을 내쉬며 힘들어했다. 사람들은 지친 당나귀를 움직이기 위해 그들의 엉덩이를 자주 세게 때렸다. 나는 안데스의 당나귀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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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살았을 때는 종종 릭샤 이용하기도 했는데, 순수 인력으로만 움직이는 자전거 릭샤는 피했다. 쿠바에서는 영업 당해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자전거 인력거가 너무 불편했던 나머지, 쿠바노를 태우고 직접 자전거를 밟은 적도 있었다. 이런 직업은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일본에도 존재했다. 일본 역사 도시 교토에는, 개화기라는 컨셉에 맞춰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처럼 튼실한 다리를 가진 사람이 말처럼 뛰어서 움직이는 인력거였다. 일제 치하에 살았던 수많은 김첨지들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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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불편한 직업들을 마주할 때면 여행기분이 확 잡쳐버릴 정도로 우울해졌다. 왠지 내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은 죄책감과 내심 그들을 무시하는 마음과 상대적 우월감, 혹은 안도감, 그걸 애써 부정하는 자아분열현상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내 우울함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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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의 일이다. 인도는 비공식적으로 세계서 가장 인구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이자 여전히 염격한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만큼 노동력이 거의 공짜라고 봐도 무관할 만큼 인력이 저렴하다. 따라서 그 인력이라는 것이 쓸떼없는 일에도 남용되었다.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에도 입주민 만큼이나 노동자가 많았다. 나는 거의 매일 그 노동자들을 모아 군기잡는 모습은 봐야했고, 그건 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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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엘레베이터를 탈 때마다 보이는 벨을 눌러주는 직원이였다. 승객이 20명 쯤 타서 벨을 누르기 힘든 커다란 쇼핑몰 엘레비이터도 아니고 4명만 타도 답답할 정도의 작은 엘레베이터에 왜 벨보이를 써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층에서 내릴지 말하는 것보다 내 손가락으로 층수를 누르는게 훨씬 간단한 일이였지만, 이 간단한 일도 사람을 쓰는 게 인도다. 벨보이는 고작 벨을 눌러주기 위해 엘레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불꺼진 엘레베이터 안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 좁아 터진 엘레베이터 구석에는 항상 의자가 있었다.

 나는 24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좁은 엘레베이터에서 벨보이와 꽤나 긴시간을 보내야 했다. 벨보이는 지루한 듯 언제나 하품을 쩍쩍 해댓고, 그 때마다 그 뻐근한 기운에 전염된 것 같았다. 일주일 쯤 지나자 벨보이는 나에게 몇 층에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24층을 눌렀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다시 하품을 쩍쩍 해댔다. 혼자 엘레베이터를 탈 때는 대게 그랬지만, 다른 인도 입주민과 엘레베이터를 타게 되면 벨보이는 계속 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두 손을 모우고 엘레베이터에 올라가는 숫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뒷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뭐 저런 한심한 인생이 다 있나싶어 짜증이 났다. 그 후로는 그의 얼굴을 볼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짜증을 낼 수도 짜증을 낼 마땅한 이유도 없었지만, 그를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의 뒷통수를 째려보다 문득 유투브에서 우연히 보게된 한국 대기업 갑부 직원들에게 쌍욕을 하며 갑질하는 영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쌍욕을 짓걸이는 대기업 갑부의 모습에 내 모습을 입해 벨보이에게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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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 문 열다.

내가 이런 소름돋는 상상했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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