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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Nov 17. 2020

여행자의 사랑,여행자의 외로움

Ep1. 카트만두에서 재회한 남자친구

 내가 인도에서 일하는 3개월 동안 우리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터키인 남자친구가 비자문제로 인도 입국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제커플에다가 여행자 커플인만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3개월씩이나 떨어져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였다. 롱디커플에게 3개월 떨어져 있는 것 쯤이야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똥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움직였던 우리에겐 무척이나  긴 시간이였다.

 그런 남자친구와 3개월 만에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서 드디어 다시 만났다. 내가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남자친는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를 여행하며 인도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인도비자를 받지 못했고 카트만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남자친구는 다카공항에서 카트만두 공항으로 날아왔고, 같은날 나는 델리 공항에서 카트만두 공항으로 날아와 카투만두 공항에서 재회했다.


 카트만두 공항에서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내내 오랜만에 다시 남자친구를 만날 생각과 일을 끝내고 다시 여행을 시작할 생각에 두근거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이 일을 다시 실현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비현실적인 것이라 마치 꿈꾸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일을 좋아하는 것, 특히 그 일이 여행일 때 연애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할 만큼 힘들다. 이번처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일년의 대부분을 같이 여행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 여행을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여행자인 연인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어느 하나 쉬운 것 없는 이 모든 어려운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킨 내 남자친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그는 나와 동갑내기인 터키인 여행자다. 이름은 oguzhan tiras. 터키 알파벳g는 소리가 없는 묵음이지만 그냥 영어식으로 읽어서 오구즈한, 그걸 줄여서 오구즈, 요즘은 한국식으로 아예 오구라고 부른다. 우리는 대략 5년 전 여행을 시작했고, 여행을 아주 사랑하고, 가난하고 자유로운 여행 스타일을 추구하고, 그래서 히피 친구들이 많고, 가끔은 히피 커뮤니티에 속해 있기도 하지만 히피는 아니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위한 어느 정도의 인싸력과 관종력도 있지만 그에 비해 영는 그다지 유창하지 않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가리지 않고 (특히 채식주의자가 아니고) 정치색도 종교도 없고,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 문제가 비슷하고, 외모와 패션엔 관심이 없어 쇼핑을 싫어하고, 음주 흡연 마약을 즐기지 않고, 삶의 대부분을 여행으로 보낸다는 것 등 공통점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여행 중에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그 때 나는 평범한 서울 시민으로 살고 있었고, 오구즈는 한국의 살인적인 물가에 굶주려야했던 한국을 처음 방문한 여행자였다. 우리는 가난한 여행자라면 누구나 사용해봤을 법한 '카우치 서핑'을 통해 만났다. 카우치 서핑을 불순한 의도로 사용하는 여행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우리를 '데이터 어플로 만난 가벼운 사이'로 단정짓곤 했지만, 그렇게 만난 우리는 어쩌다보니 벌써 2년째 함께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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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부터 말하지만 그렇지만, 사실 우리 사이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우린 여행자였고, 그래서 진지한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린 둘 다 서로의 첫여친과 첫남친을 제외하고는 100일 이상 연인관계를 유지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벼운 만남만을 즐겼다. 떠나면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여행자의 만남은 언제나 짧고 가벼웠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김종욱 찾기'를 보며 여행서의 사랑을 꿈꾸지만, 여행자인 나에게 '김종욱 찾기'는 '여행지에서의 화끈한 웟나잇에 대한 추억'정도로 설명될 뿐이다.  그만큼 여행자에게 공유처럼 꽤나 잘생긴 남자와 꽤나 로맨틱한 상황에서 원나잇 할 수 있는 기회는 도시마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흔한 일이다. 공유처럼 잘생긴 남자도 외국에선 아주 흔하고, 여행이란 행위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행위다보니 로맨틱한 상황도 자주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나에게 연애, 특히 여행지에서의 만남감흥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데이트 폭력범으로 간주해도 좋을만큼 집착이 심했던 첫 남자친구와 모든게 처음이다보니 이별도 어려워 반강제적으로 길게 이어온 연애를 경험하고선, 더이상 연애 때문에 인생에 어떤 것도 잃을 수 없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을 4년 이상 실천해 왔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가 그렇듯 가벼운 사람을 가볍게 만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방어적인 연애 가치관과 첫연애 경험은 오구즈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히 가볍게 만나기 좋은 가벼운 사람이였다. 하지만 서로 그걸 알고 있었지만 여행 취향이 잘맞다는 이유로 꽤나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연인관계로서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애인 사이로 지정해 둔 후에도 떨어져 있을 때면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만났다. 서로 가벼운 사이로 끝날거라고 생각했었기에 당시엔 그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였다. 서로를 애인으로 칭하며 함께 여행을 한 지 4달 후에야 겨우 그 구질구질한 문제들을 들춰냈지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 무력해질 뿐이였다. 실컷 울고 실컷 싸우고 결국엔 이별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서로가 서로를 닮아 불쌍했고,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해 온만큼 감정이 커져버려 도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 물론, 그 전과는 다르게 서로에게 정직한 연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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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에서 재회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오구즈의 생일이 찾아왔다. 우리는 한번도 서로의 생일을 같이 보낸 적이 없었다. 제 작년 내 생일날 나는 아르헨티나에 있고 그는 홍콩에 있었다. 작년 그의 생일날 나는 필리핀에 있었고 그는 태국에 있었다. 다시 찾아온 작년 내 생일에 나는 인도에 있었고 그는 미얀마에 있었다. 그래도 작년 생일엔 인도에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일선물을 받았다. 비록 함께  순 없었지만 그는 인도 친구를 통해 꽃과 케익을 배달시켜 왔다. 그 날,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에 괜히 서러워져서 펑펑 울어버렸다.

 성인이 된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냈다. 특히 겨울에 태어났지만 추운 걸 아주 싫어하는 나는 생일을 한국에서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생일축하를 받아본 기억도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었고 한국에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도 이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기에 서로 공감하며 대화할 수 있는 게 거의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먼저 연락하거나 주변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니다보니 가끔 안부라도 주고받는 친구들까지 다 세알려도 열손가락이 접히지 않는다. 다행히 성격은 외향적이라 평소엔 외로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생일이 되면 부쩍 외로워진다. 생일날이면 괜히 카톡 친구목록을 뒤적거리며 연락하지도 못할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을 염탐했다. 그러고 있으면 더 서글퍼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많은 친구들은 여행하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여행자인 나는 그들에겐 일상적인 많은 것들이 아쉬웠다. 모두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지만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생일축하가 그렇고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들이 그렇다. 타지에서 보낸 지난 생일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친구가 나를 의도적으로 피했을 때 나와 똑같이 서글펐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년을 나와 같은 생일을 보냈을 오구즈의 생일엔 꼭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내가 네팔행을 서두른 이유도 오구즈의 생일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였다. 오구즈는 '생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큰 의미없는 그저 평범한 하루일 뿐이다' 하고 말했지만, 그건 뭐, 나도 항상 하고 다니는 말이다. 나는 처음으로 함께 보낸 그의 생일을 더 과장해서 축하했다. 그래서 단 걸 싫어하는 그는 3일 내내 초콜렛 케익을 먹어야 했고, 여행자에겐 들고 다녀야 할 배낭 무게일 뿐인 예쁜 쓰레기를 찾아 헤매야 했다. 이렇게나마 일상적인 일들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외로움을 함께 공유하는 여행자 커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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