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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Dec 11. 2020

시간은 이렇게도 흘렀다

2020 포카라의 시간들

 요가를 하고 샤워까지 끝낸 오구즈가 '배고파'하는 말로 나를 깨운다. 아침 늘 눈뜨기가 힘들다. 배고프다는 오구즈를 잠시 껴안고 만진다. 그의 체온과 촉감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침엔 내 살에 닿은 그의 피부가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에게서 좋은 샴푸냄새가 난다. 더이상 소변이 참기 힘들어질때까지 그대로 누워서 그를 껴안고 있는다. 겨우 일어나 화장실에 가면 아랫층에서 사장님이 혜연아-,하고 부른다. 급하게 바지를 올려입고 '네-'하고 대답한다. 방문을 열면 윗층까지 맛있는 냄새가 풍겨온다. 아랫층으로 내려가면 언제나 사장님 부부와 두르카가 있다. 사장님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하고 두르카에게 '나마스떼'하고 인사한다. 테이블을 닦고 두르카가 만 음식들을 옮긴다. 곧이어 오구즈도 내려온다. 멀리서 달려오는 정하다이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정하다이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고는 '안녕하세요'인사하며 들어오신다. 사장님은 주걱으로 밥을 뒤적거리고는 접시에 밥을 푼다. 정하다이는 국을 푼다. 나는 반찬을 담는다. 오구즈는 수저를 놓는다. 두르카는 부엌에서 김치를 가져온다. 오구즈와 정하다이는 많이 먹기 때문에 뭐든 더 많이 푼다. 예지는 편식이 심하기 때문에 고기위주로 반찬을 담는다. 나는 북어국을 먹지 않기 때문에 북어국이 나오면 국그릇 하나는 비어둔다. 오구즈는 멸치를 먹지 않기 때문에 멸치가 나오는 날이면 사장님은 오구즈만 멸치를 뺀 땅콩조림 따로 준비해주신다. 식사가 끝나면 과자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내 밥을 오구즈 접시에 조금 덜어낸다. 식사를 하면서 날씨 이야기를 한다. 사모님이 일기예보를 확인하고는 오늘의 날씨를 알려주신다. 그러고 나면, 먹으면서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를 한다. 주로 해산물 이야기다. 네팔엔 바다가 없기 때문이다. 그 후엔 한국 뉴스에 대해 이야기 하고 네팔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계 뉴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일 새로운 뉴스가 쏟아지지만 좀처럼 좋은 뉴스가 없다. 뉴스란 게 원래 그런거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심한 것 같다. 바깥으로 보이는 폐와 호수는 여전히 잔잔하게 흐른다. 과일이 들어간 라씨까지 먹고 나면 그릇들을 치우고 커피를 내린다. 정하다이가 사오신 커피 원두를 간다. 오구즈는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인다. 전기가 안들어오면 두르카가 냄비에다 물을 끓인다. 원두가 다 갈리면 물도 다 끓어있다. 커피를 내리면, 진한 커피향이 공간을 채운다. 쌓아둔 과자더미에서 먹고 싶은 과자를 하나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쓰고 진한 커피와 함께 달달한 과자가 입안에 들어오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은 오가는 이야기들을 오구즈에게 번역을 해주도 하지만, 대체로 번역을 해줄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주로 강아지들 이야기다. 편식이 심한 깐부가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 식탐이 강한 머니가 살쪗다는 이야기, 아이샤가 또 가출했다는 이야기들이다. 딱히 할 이야기가 없을 때는 각자 읽고 있던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들여다 본다. 그러고 있으면 어김없이 구걸하는 사람들이 수금하러 온다. 사장님은 매일 그들에게 돈을 쥐어주신다. 그 후엔 아줌마들이 채소나 과일을 머리에 잔뜩 이고 오신다. 시장 가격보다 비싸지만 사장님은 그냥 사주신다. 11시쯤 되면 다들 자연스레 흩어진. 오후가 되기 전에 가벼운 운동을 한다. 가끔은 실내에서 계단 오르 내린다. 윈드폴 1층에서 4층까지 28번 오르내리면, 아이폰은 아파트 50층만큼 올랐다고 말해준다. 아파트 50층을 오르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절었다. 그러면 샤워를 한다. 나는 땀을 흘린 날에만 샤워를 다. 계단을 오르는 건 자주하긴 힘들다. 보통은 밖에 나가 한시간 쯤 걷는다. 매일 같은 길로만 걷는다. 걸으면서 스쳐가는 풍경들은 이미 수백번도 더 본 풍경들이다. 걷다 보면 하루에 꼭 한 번은 죽은 까마귀를 보게 된다. 죽은 까마귀를 보는 건 언제나 기분 나쁜 일이다. 낮에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락다운으로 카페가 영업을 중단하면 게하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가 낮잠을 자지 않는 이상 카페에 간다. 카페에 가면 나는 메뉴판보지 않고 무조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하지만 오구즈는 날마다 먹고 싶은 음료가 다르다. 그래서 어느 카페로 갈지는 에 의해 결정된다. 밀크티를 마시고 싶은 날에는 코즈모에 가고, 찌아를 마시고 싶을 때는 굿데이에 가고, 라떼를 마시고 싶을 때는 히말라야 자바커피에 가고,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을 때는 화이트 레빗에 간다. 바나나 라씨를 마시고싶을 때 가는 카페는 아직도 이름을 모른다. 이 중 가장 자주 가는 곳은 화이트 레빗이다. 소켓도 있고 와이파이도 잘 돼서 작업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몇시간 쯤 보내고 나면 다시 윈드로 돌아온다. 윈드폴로 돌아올 때 쯤이면 배가 고프지만, 곧 있으면 저녁시간이기 때문에 뭘 먹는 건 포기한다. 하지만 유난히 배가 고픈 날에는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나 베지 페스츄리를 사먹곤 한다. 윈드폴로 돌아오면 몸무게를 잰다. 배가 고플 때 체중을 재면 좀 더 적게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몇 일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로 많이 먹어도, 한 몇일 조금 덜 먹어도 체중변화가 없다. 다섯시 반이 되면 저녁식사를 하러 제로갤러리로 간다. 셔터를 내리고 제로로 향하면 강지들이 따라 온다. 이주에 한 번은 제육볶음을 먹고, 또 이주에 한 번은 삼겹살이나 보쌈을 먹고, 또 이주에 한 번은 돈까스를 먹고 가끔은 김치찌개를 먹고 생선을 먹고 탕육과 짜장면을 먹고 양념치킨, 깐풍기 치킨, 국수와 냉면 먹는다. 특식으로 떡볶이요리가 나올 때도 있고 가끔은 달밧도 먹는다. 특별한 날에는 와인이나 맥주도 함께 마신다. 음식 양은 항상 넉넉했지만, 음식을 남긴 적은 없다. 몇 달 동안 안정적으로 제공받았던 식사 공급에도, 여전히 배가 부른 것보다 음식을 남기는 게 더 힘들다. 하지만 사장님 가족들은 먹고 싶은 만큼만 적당히 먹었다. 굳이 다 먹어야 한다는 강없이 편안히 식사를 하다. 음식이 남으면 누구라도 먹는다고 생각하셨다. 다 못먹을 것 같아 미리 덜어둔 음식은 다른 누구라도 먹을 것이고, 먹다가 남겨진 음식은 깐부와 머니가 먹고, 개들이 못먹는 채소는 다음날 아침 돼지 농장에서 수거해 갔다. 비가 오지 않으면, 저녁 식사 후에 한시간 정도 걷는다. 걸으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는다. 가진지하게 미래를 이야기한다. 해가 지 윈드폴에 도착한다. 저녁엔 카페인이 없는 차를 끓인다. 녹차를 끓일 때도 있고 카모마일이나 얼그레이, 가끔은 장미차, 티차, 진저레몬티를 마신다. 차를 내리면 아침과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고, 가끔은 무거운 이야기 한다. 윈드폴을 채웠던 말들에는 어느 한마디 온기 없는 말이 없었다. 들쑥날쑥한 감정이 있는 그대로 다 표현되는 바람에 못난 말들 다소 공격적으로 나갈 때도 많았데, 사장님은 언제나 따뜻하게 내 말을 들어주신다. 아홉시쯤 되면 불을 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오면 주로 유투브를 보거나, 편집을 하거나, 책을 마저 읽거나, 오구즈에게 시비를 걸며 시간을 보낸다. 와이파이가 좋으면 영화를 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오구즈는 대게 나보다 먼저 잠이 든다. 오구즈가 잠이 들고 한두시간 쯤 지나면 나도 잠이 든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전날과 다름없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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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몇 달동안 달라진 것이라곤 날씨 뿐이다. 겨울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도착한 네팔에서 무더운 여름도 왔다 갔다. 유난히 길었던 무순이 끝나고, 다시 공기가 차가워졌다. 지난 5년간 한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사계절을 네팔에서 고스란히 느꼈다. 짧았던 산딸기철이 끝나고, 망고철이 시작되었고, 망고를 실컷 먹었다. 망고철이 끝나니 사과철이 왔다. 사과철이 끝나니, 순달라의 절이 돌아왔다. 매일 아침 식후 먹는 라씨에 들어간 과일은 계절에 따라 여러차례 변했다. 그동안 포카라에는 많은 히피들이 조용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3월부터 함께 지낸 히피들이 남아있었다.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올 때 같은 버스를 탔던 히피도 여전히 이 곳에 있다. 곱슬곱슬하게 생긴  검은 푸들을 안고 다니는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도 여전히 건강하시다. 하루종일 걸어다녔던 피부가 검은 여자도 살이 많이 빠졌다는 것 빼고는 그대로다.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햇빛을 피해 자리를 옮겨 다니며 호수를 바라보며 돌을 문지르던 아저씨는 오늘도 호수를 바라본다. 러시아 히피커플의 아이들은 그사이 키가 많이 자랐다. 제로갤러리의 안나붓다도 키가 많이 자랐다. 락다운 중에 포카라에서 태어난 것 같은 유럽아기는 이제 혼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중국 여자와 영국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노란 머리의 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아이도 이제 웬만해선 넘어지지 않고 걷는다. 올드스타에서 태어난 검은 강아지도 이제 제법 성견처럼 보인다. 머니는 여전히 잘 먹어서 뚱뚱하다. 앞에서 보면 잘생겼지만 뒤에서 보면 살이 뒤룩뒤룩 쪄있다. 부쩍 늙어버린 깜부는 흰털이 많이 자랐다. 서포나네 고양이도 많이 자랐다. 비카스는 오늘도 낚시를 하고 터키여자는 오늘도 춤을 춘다. 시간이 이렇게도 가는구나, 시간이 흘렀다. 매일이 토요일이고, 그 다음날은 월요일이 되었다가 또 그 다음날은 토요일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4월이 가고 6월이 가고 9월이 가고 11월이 가고 12월이 왔다. 이 곳에는 모든게 그대론데 그 사이 한국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카가 돌잔치를 했다. 몇 안되는 친구 중 한명 결혼을 했다. 4월에 예정되어 있던 결혼식이 8월로 미뤄졌지만 결국 가지 못했다. 영원히 교복을 입고있을 것 같던 남동생은 수능을 쳤다. 친구는 나에게 고양이처럼 산다고 했다. 고양이의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걸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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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다운 동안 감정기복이 심했다. 마음이 편해지다가도 여기서 뭐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좋은 사람들과 실컷 떠들고 나면 쉽게 행복해지다가 혼자 있을 때면 또 다시 우울해졌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땀을 빼고나면 상쾌해지다가 하루종일 갇혀있는 것같아 답답해지기도 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1분 1초가 다르게 모양과 색을 바꾸는 모습이 마법같은 날이 있다가도 똑같은 풍경에 지루해지는 날도 있었다. 인도에서 처음 짜이를 마신 날을 기억한다. 우유맛이 나고 똥냄새 비슷한 우유 비린내가 나고 후추맛도 나고 생강맛도 설탕맛도 소금맛도 커리맛도 나는 것 같고 구수한 곡물 맛도 나고, 이름모를 각종 향신료들의 맛이 다양하게 썩여 나왔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맛이 동시에 난다는 게 신기했고, 모든 맛들이 하나같이 자기주장이 강한 게 신기했고, 그게 또 어떻게 기가 막히게 입안에 맴도는 맛을 내는지 신기했다. 네팔에서는 짜이찌아로 불린다. 찌아는 인도의 짜이만큼 맛이 강하지 않다.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맛이다. 네팔은 찌아같은 나라다. 따뜻하게 시리고, 조용하게 시끄럽고, 낡지만 새롭고, 이기적이게 배려심이 많은 물욕이 들끓는 해탈의 나라다. 그래서 나는 네팔이 싫고 좋다. 어떤 맛이든 맛이 너무 진해서 내 감정을 쉽게 과열시키는 게 싫었고,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젊은 날을 촌구석에 박혀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내 얼굴에 잔주름이 늘어난 게 억울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들어가는 시간들을 함께해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게 행복했다. 그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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