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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요니 Dec 01. 2020

네팔에서는 귀국조차 쉽지 않다

2020년 네팔 국제선 이야기

 한국이 중국 다음으로 확진자가 았던 지난 3월. 아무리 한국인 여자 친구를 둔 오구즈라도 한인 숙소에 입실하기를 망설었지만, 결국 포카라 한인숙소 윈드폴에 입실했다. 당시 윈드폴은 하루 늦게 입실해야 했을 정도로 한국인 여행자가 많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동양인 혐오현상과 입국 제한 조치로 인해 대부분 네팔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작년 12월 세계여행을 시작했다던 부부와, 입대 전부터 계획한 세계여행의 꿈을 제대하자마자 실현하고 있던 젊은 청년만이 한국이 아닌 이집트행을 택했지만, 이집트도 곧이어 국경을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그들은 한국행 전세기를 놓치고, 카트만두에서 거의 2 달이다 더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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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내려와 다시 윈드폴로 돌아왔을 때는, 2주 전에 있었던 게스트들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이미 모든 항공권이 취소되기 때문에, 다들  전세기가 마련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기 항공료는 왕복 를 승객 나눠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승객이 많을수 운임비는 저렴해졌다. 대사관에서는 최대한 많은 승객을 탑승시키기 위해, 비행 날짜와 가격도 공지해주지 않은 채, 무작정 항공 수요 설문 조사 시행했다. 그 후 며칠 뒤, 대사관은  전세기를 신청한 사람들은 바로 2시간 후 대사관에서 마련한 카트만두행 버스에 탑승해야 한다며 급하게 공지했다. 락다운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버스 공고다들  싸느라 바빠다. 하지만 다시 한 시간 후, 버스가 다음날로 연기되었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국가기관답지 못한 어수선한 일처리였다. 게다가 버스도 빈 버스로 돌아와야 했기에 버스 요금도 2배 이상 청구되었다. 그래도 버스가 연기된 덕분에, 마지막 이별 파티 즐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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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이른 아침,  윈드폴에 머물렀던 게스트들도, 지난 1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시신을 아직 찾지 못 포카라에 남아있던 유가족들도 모두 카트만두행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곧 비행 편이 마련될 것이라는 공지와는 달리 카트만두에 도착하고도 2주가 지난 후에야 비행기가 운행되었다. 대사관의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 그들은 포카라보다 락다운 상황이 더 안 좋은 카트만두에서 2주간 갇혀있다시피  전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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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전, 카트만두 인천공항 구간을 운행하는 정규노선의 왕복 항공권은 40만 원대였지만, 전세기 요금은 오랜 협상 끝에 700불로 맞춰졌다. 편도 가격인 것을 감안하면 평소보다 4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다. 그 무렵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제선 운행을 중지하면서 세계 각국 재외국민들은 정부에 전세기를 요청했다. 중국 우한을 시작으로 갑작스레 입국을 금지해버린 이스라엘, 이란, 페루, 이탈리아 등 코로나 상황이 심한 곳부터 우선적으로 전세기가 투입되었다. 그 후로도 정부는 지속적으로 세계 각국에 전세기를 투입하여 한국인 송환 작전을 펼쳤다. 전세기 지원 초기에는 승객이 편도 운임비용을 부담하고 나머지 왕복 항공료의 절반은 정부 예산으로 충당되었다. 하지만 전례 없던 코로나 사태로 재외국민 긴급지원비는 빠르게 소진되었고, 대통령 전용기까지 띄워 운임비를 절약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네팔은 당시 코로나 위험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지원 우선순위에서도 제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거리가 더 먼 다른 국가들보다도 비싼 항공료가 청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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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게도, 한국행 전세기는 한국인만 탑승할 수 있었다. 따라서 터키인 남자 친구는 탑승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규정은 터키행 비행기도 마찬가지였다. 터키는 관광객 대상으로 국경을 선두로 열었을 정도로 방역을 빨리 포기해버린 국가 중 하나지만, 초기에는 주변 국가 (특히 이란)들이 모두 위험해져 있을 상황에서도 꽤나 오랫동안 코로나 청정국가로 남아 있었다. 그 당시 터키도 예외 없이 한국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 입국을 제한했. 만난 지 고작 한 달도 안된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계획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 결국 우리는 서로 귀국을 포기하고 계속 포카라에 남기로 결정했다. 코로나 사태가 이 정도로 장기화될 줄은 몰랐지만, 같이 있기로 결정한 건 천만다행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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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실이었던 윈드폴에는 우리 커플과 산에서 같이 내려온 홍콩인 미기만이 남았다. 미기의 상황은 우리보다 더 좋지 않았다. 당시 네팔에 남아있던 홍콩 사람은 미기를 포함하여 총 61명으로, 홍콩행 전세기를 띄우기에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따라서 미기가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중국을 경유하여 홍콩으로 돌아가는 방법뿐이었다. 홍콩 여권을 가진 미기에게는 중국인과 동등하게 국행 전세기 탑승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미기는 여느 홍콩의 젊은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반중 성향이 강했고, 중국이 코로나에 대해서도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을 경유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경유가 불가능 했고, 홍콩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람에 한해서도 2주간 자가격리 의무화다. 따라서 미기가 중국을 경유하여 홍콩을 간다면 중국에서 2주간 자가격리, 홍콩에서 2주간 자가격리, 총 4주 자가격리가 필요했다. 우리는 자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경우지만, 미기에는 자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없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5월이 되어서야 겨우 홍콩행 비행 편이 마련되었지만, 비행기가 네팔리 구르카 용병(영국군)들로 가득 차는 바람에, 미기에게는 탑승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홍콩이 아닌 네팔 여행사에서 마련한 비행기였기 때문에, 홍콩행 비행기의 우선권은 홍콩인 미기가 아닌 네팔리에게 주어졌다. 그 후로도 두 세 차례 비행 편이 있었지만, 여행사는 매번 다음 편엔 꼭 태워주겠다며 미기를 약 올리기만 했다. 희망고문이 계속되던 6월 초, 이틀 후면 정말 귀국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속아 카트만두로 이동했던 미기는, 카트만두에서 무려 2달이나 더 묶여있다 8월이 되어서야 겨우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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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말, 2주간 진행될 거라고 했던 락다운은 계속 일주일씩 연장되더니 결국 4달이나 더 연장되었다. 8월 이후에도 락다운 규제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완화되던 중, 네팔 정부는 8월 17일 국제선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장거리 버스도 슬슬 운행되기 시작했던 터라, 그 말을 사실로 믿었다. 하지만 네팔 내에 확진자가 급하면서 국경은커녕, 다시 락다운이 걸리고 말았다. 앞서 락다운을 강히 시행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며칠 (길어도 한두 달) 지나지 않아 락다운을 해지했지만, 네팔은 규제 정도가 강해지고 다시 완화되기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락다운은 연장선에 있다.

 외국인 입국 제한도 마찬가지였다. 10월 17일 이후 트레킹 목적으로 방문하는 관광객들에 한해 관광비자를 발급해주겠다던 네팔 정부는 10월이 되자 이를 11월 17일로 미뤘다. 그리고 11월이 되자 또다시 12월 17일로 미뤄졌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12월 17일에도 국경이 열릴지 확실치 않다. 비록 2주 자가격리가 의무화되어있긴 해도 국경을 한 번도 닫지 않았던 한국과는 달리, 관광수이 국가수입의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네팔은 한 해가 다 가도록 여전히 국경을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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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트만두 공항에서 출발하는 전세기는 4월 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4월에도 5월에도 한국행 비행기가 단 한대도 뜨지 않았다. 6월7월에는 각각 2대 떴지만, 다시 8월부터 현재 12월까지 단 한 대도 뜨지 않았다. 이는 항공편이 자주 었던 인도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델리, 노이다, 구르가온 부근에만  5000명의 한인이 살고 있는 인도와는 달리, 네팔 전역의 한인 교민의 수는 약 500명 정도로 현저히 적었다. 게다가 인도에는 삼성, 포스코, 현대, lg, 각종 은행들까지 대부분의 대기업이 진출해 있었지만, 네팔에 들어와 있는 한국 기업은 수자원 공사와 도로공사 정도뿐이었다. 항공수요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만큼 운임요금도 인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쌋다. 4월 초 전세기 요금이 80만 원대였던 것에 해, 그 후의 비행기는 모두 1000불을 초과했다. 항공사는 대한항공이었지만 한국인 탑승객에게는 네팔리보다 2배 이상 비싼 운임비 요구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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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전세기를 제외 모든 한국행 항공편은 네팔 여행사에서 마련했는데, 그 목적은 팔 노동자들을 한국으로 출국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미 귀국할 한국인들은 거의 다 귀국한 후였기 때문에 6,7월에 운행된 비행기 승객 대부분이 네팔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네팔 정부에서는 한국을 포함하여 네팔리 노동자 입국을 허가하는 국가들에 한해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출국시켰다. 관광업으로 벌어들일 외화가 끊겨버렸으니, 이주 노동자들의 수입은 네팔 경제에 더욱 중요해. 하지만 8월, 국내에서 로나가 2차 유행하면서 외국인 노동자 입국에 대한 국내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로 인해 네팔리 노동자 입국 허용도 중지되었다. 그렇 한국행 직항은 네팔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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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는 네팔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제선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소식은 네팔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많은 세계인들을 들뜨게 했지만, 네팔리들에 한해서만 열겠다는 뜻이었다. 9월 한 달 동안 세계 곳곳에서 네팔리들을 위한 전세기가 운행되었다. 한국은 이미 2월부터 서둘러 전세기를 마련했기 때문에, 네팔처럼 한인수가 적은 국가에도 최소 한 번씩은 전세기 지원되었. 반면 네팔 정부는 외국에 있는 네팔 노동자들을 나 몰라라 하며 반년 이상을 방치했다.  사이 비자가 만료네팔 노동자들은 외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없었지만, 네팔 정부는 그들을 외면했고, 그들은 그대로 난민 신세가 되다. 한국처럼 외국인 노동자 배려하는 나라 경우에는 그나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중동국가에서 일하던 네팔리 노동자들의 상황은 달랐다. 락다운과 동시에 중동에 있던 네팔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그 동시에 주거공간도 잃었다. 추방당한 네팔 이주 노동자들은 하루에 몇천 명씩 공항으로 몰려들었다. 아랍 정부에서는 네팔 정부에게 국민들을 데려가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네팔 정부에서는 이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무려  반년이 지난 9월이 되어서야 전세기를 띄어 네팔리들을 자국으로 송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세기 운행 자금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지만, 반년 이상 국민들을 방치한 네팔 정부는 아닐 것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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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체류 중이던 네팔리 노동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9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대씩, 총 4대의 대한항공 비행기가 운행되었다. 네팔에 남아 던 한인들은, 그동안 운행되었던 비행기와는 달리 빈 비행기로 올 필요가 없으니, 더 저렴한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한국에서 네팔리들을 태우고 날아온 비행기는 다시 빈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도, 승무원도 있었지만 항공사 입장에서는 큰돈이 안 되는 소수의 손님을 태우기 위해 입출국 국가 신고 등의 복잡한 절차들을 거치는 게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자국민에 대한 배려가 안타까운 면모를 보여줬다. 10월이 되자, 대한항공 카트만두 지점은 아예 완전히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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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7월을 마지막으로 한국행 직항 비행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홍콩, 두바이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몇 달 지나지 않아, 홍콩과 말레이시아에서 네팔발 비행기 입국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선택 상항이 줄어들었다. 네팔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입국이 허용된 많은 나라로 노동자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네팔리 확진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네팔에서는 출국 전에도 2주간 자가격리와 PCR테스트가 의무화되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네팔발 기내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중국이 무상으로 원조한 PCR테스트기가 무려 50%의 오진율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성 판정을 받은 네팔리들가짜 PCR 문서를 만들어 비행기에 탑승하기도 했다. 가짜 PCR 테스트 문서는 기사화가 될 정도로 네팔 내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미 워킹비자를 발급받고 출국 준비를 하는데에 큰 비용을 지불한 네팔리들은 아무리 양성반응이 나오더라도 출국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들로 네팔은 국가적 신뢰를 잃어버렸고, 네팔에서 들어오는 비행기를 금지하는 국가가 늘어난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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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 네팔에서 출국할 수 있는 다른 선택 사항들이 생겼다. 코로나 상황에 다양한 노선을 운행했던 터키항공과 카타르 항공 10월 중순부터 카트만두에서도 정규노선을 운행했다. 덕분에 네팔에 남아 있던 외국인들은 이 두 항공사를 통해 이스탄불이나 도하를 경유하여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규 노선인만큼 비행편도 자주 있었고, 가격도 안정화된 덕분에 50만 원대의 저렴한 한국행 티켓을 발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책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항공권을 미리 발권을 하기엔 위험부담이 있었다. 지난 3월과는 달리, 비교적 방역에 성공한 한국은 매번 바뀌는 입국 정책에 대한 위험 부담이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매일 확진자가 3만 명 이상씩 발생하는 현재 터키의 상황은 3월의 한국과 같다. 불과 며칠 전, 경유지로 고려하고 있었던 두바이에서는 갑작스레 터키인 입국을 금지를 시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인 남자 친구와 국경을 넘는 것도, 다시 락다운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터키로 돌아가는 것도 불안했다. 그렇다고 한국 가기에는 자가격리 부담이 . 게다가 한국의 겨울은 너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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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 불가능해진 2020년,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모국으로 귀국함으로써 여행을 끝마쳤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은 다른 여행자들보다 먼저 끝났다. 다만 한국이 아닌 네팔에서 끝났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여전히 네팔을 핑계 대며, 네팔에 머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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