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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ur Dec 31. 2018

"아빠! 왜 링 맨 손가락이 짧아요?",
안중근의사기념

(2011.2.26, 방글이 4세)

50권짜리 '위인전기'를 주문했다. 아내는 이제 겨우 '가나다라'하는 애한테 너무 빠르다고 했다.

마음이 급했다.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 위인들의 삶을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넓지 않다. 결국 내가 잘 아는 건축물로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겨울이 끝나지 않은 2월 방글이를 데리고 남산으로 향했다.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의 남산南山은 참 중성적이면서도 어느 고을에나 있을 법한 이름이다. 실제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우리나라에는 백 개가 넘는 '남산'이 나온다. 서울에 있는 남산은 과거 한양의 경계 남쪽을 이루던 산이다. 지금은 서울의 경계가 넓어져 마치 텐트처럼 서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남산의 옛 명칭은 '목멱산木覓山'이다. '마뫼'라는 옛말에서 유래한 이 이름 또한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한양 백성들에게 남산은 가장 친숙한 공간이었을 듯 하다. 높이(남산의 높이는 262m) 면에서도 그렇고 주변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가를 봐도 왕이 머무는 궁궐이 있는 북악산(높이 342m)과 인왕산(높이 338m) 보다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산이 백성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쉽게 '남산'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1910년 고종은 자신의 친필로 쓴 '한양공원'이라고 새겨진 석비를 남산에 세웠다. 그리고 남산을 시민공원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1925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신사 조선신궁을 이곳에 세웠다. 1932년에는 절도 세웠는데 그 이름이 '박문사'다. 경성신사 조선신궁과 박문사의 위치는 남산 정상을 기준으로 북서쪽과 북동쪽이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정보원(구 남산어린이회관)과 신라호텔 자리다. 조선신궁은 식민지 조선의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하기 위함이었고 박문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찰이었다. 일본은 박문사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다 놨다.

조선신궁은 1945년 광복 다음날 폐쇄됐다. 일본인들 스스로 폐쇄했다. 조선신궁은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일본인들의 뿌리였기에 다른 사람의 손으로 훼손되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 폐쇄하는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박문사는 대한민국 건국 후 철거됐다. 박문사가 추모하고자 했던 이토히로부미는 1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다. 죽은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었고 그를 사살한 사람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었다.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한 일본, 그 일본의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상징했던 조선신궁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에 앞장섰던 이토히로부미, 마지막으로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낸 안중근의 관계는 한양 남쪽에 있던 산, 남산을 가운데 두고 관계맺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토 히로부미던 안중근이던 그들이 남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남산에 들어선 계기는 무엇일까? 남산에 안중근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자고 처음 건의한 사람은 안춘생이다. 안춘생은 안중근의 종질(오촌관계)로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9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안춘생이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 부지로 건의한 곳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다. 안중근이 살해한 인물이 이토히로부미이고 그를 추모한 절이 박문사이므로 박문사가 있던 자리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가 일견 더 타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논리로 안중근은 행동하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박문사보다 더 상위에서 조선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조선신궁 자리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짓자는 결정은 대의에 맞다.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흡을 하는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등박문의 정책이 동양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에 일신 일가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법정진술에서-

안중근의사를 기념하는 첫 번째 건물은 1970년 10월 개관했다. 안중근 순국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그렇듯 이 기념관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한옥이었다. 다시 40년이 지나 100년이 된 2010년 그를 기념하는 두 번째 공간이 만들어졌다. 첫 번째 기념관을 지을 때는 ''기념관'이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기념관'이 전시관이나 박물관과 비교할 때 차이점은 무엇인가?' ''안중근'을 기념하는 공간은 다른 사람을 기념하는 공간과 무엇이 달라야 하고 무엇으로 상징성을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시대 안중근의사 기념관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이 그랬다. 하지만 2010년에는 이 문제들을 되새길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첫 번째 기념관을 지을 때와 달리 무조건 하고나서 생각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고민은 공감대와 타당성을 넘어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했다.


새로운 기념관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가 2007년 열렸다. 대지는 옛 기념관이 있던 자리가 아닌 그 뒷편(남쪽)이었다. 흥미로운 건 공모전 설계조건 중 직사각형 대지(1,715㎡ = 35m x 49m)를 정해주고 1층 면적이 대지면적의 75%(1,300㎡), 지하층면적이 대지면적의 96%(1,650㎡)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주어진 직각사각형의 대지를 꽉 채운 건축물을 발주처에서 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기념관에 필요한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동시에 기념관이 남산으로의 조망을 막지 않아야 한다는 대지가 갖는 제약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것 같다. 뭐 설계안에 응모하는 건축가에게는 이 조건이 창의력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현상설계 당선자는 '디림DLIM'. 디림 설계사무소를 이끄는 건축가 임영환은 "이번 안중근의사 기념관 설계경기를 준비하면서도 그분의 글을 읽고 영상들을 보면서 그 행적을 쫓았던 과정이 결국 고인인 안의사님의 마음속 그림을 찾고자 했던 나만의 대화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했다 <논단 프로젝트 리포트 : 안중근의사 기념관, 임영환, 대한건축학회지, 200708(51)>. 새로운 기념관은 12개의 직육체면체가 4x3으로 나열된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설계자는 "'12'라는 숫자는 안중근 의사의 후광에 가려진 단지동맹 12인을 상징하며, 1909년 자신의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그들 속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조명하려는 의도다"라고 설명했다《SPACE 201010(515)》.


기념관의 진입은 북서쪽 끝에서 서쪽 면을 따라 지하1층으로 차츰 내려오는 경사로 -'명상의 길'- 를 따라 진행된다. 경사로 우측에 '경계의 못'이라는 수공간이 있고 벽천壁泉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어록이 새겨져 있다. 방글이는 이 '경계의 못'에서 무명지無名指를 끊은 안중근의 손을 처음 접했다. 방글이가 물었다. "아빠! 손바닥! 그런데 링 맨Ring Man이 짧어요." 링 맨은 당시 방글이가 보는 책에서 무명지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난 지금은 방글이가 링 맨이 짧은 손바닥만 지금 기억하면 그 이유는 나중에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명상의 길'을 따라 지하 1층까지 내려와 좌측으로 돌면 기념관 주출입구가 나온다. 주 출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천장까지 트인 참배홀이 나온다. 이 공간이 이 건축물이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기념관인 이유를 설명한다. 세 개층을 관통해 떨어지는 빛 아래 안중근의사의 좌상이 놓여있고 태극을 감싼 피로 쓴 '대한독립'이라는 글씨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카메라 셔터도 누르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봤다. 아니 그가 나를 응시했고 난 그 응시에 대응할 수 없었다. 왠지 그가 묻는듯 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누구예요?"

방글이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안중근 선생님. 방글이 아까 링 맨 짧은 손바닥 봤지? 그 손바닥이 이 분의 손이야."

방글이에게 짧게 설명해주고 참배홀을 보니 조금씩 공간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참배홀을 감싸고 있는 벽은 대부분 화산석이다. 그래서 공간이 묵직하다. 그런데  몇 가지 요소들이 조금 어지럽게 보였다. 이 모든 것을 상상 속에서 지워봤다. 마치 칼로 자른 듯 화산석으로만 마감된 공간에서 안중근의 좌상을 마주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너무 엄숙하고 압도적 이었을까? 그렇다면 안중근의 좌상을 기단에서 내리고 참배객이 서 있는 눈 높이에 안중근 좌상의 눈높이를 맞췄다며 어땠을까? 아무것 없이 참배객과 안중근의 좌상 만이 있는 공간에서 눈을 마주하는 경험.

전시공간은 참배홀을 지나 지하1층, 지상1층, 지상2층 일부에 있다. 층간 이동은 에스컬레이터로 하는데, 이동하면서 안중근의 좌상을 본다는 의도로 참배홀 오른쪽에 사선으로 개구부를 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참배홀의 공간감이 산만해졌다. 에스컬레이터의 소리도 그렇고. 


전시 관람을 끝내고 계단을 통해 내려오면서 기념관 주변의 풍경, 특히 남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설계자는 12개의 직육면체 중 유일하게 투명한 유리로 처리하고 불규칙하게 꺾인 계단을 만들고 심지어 의자까지 배치하여 관람객이 느리게 이동하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왜 그랬을까? 난 이곳이 '안중근과 현재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라는 건축가의 청유로 이해했다. 만약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주변과는 단절된 채 전시공간이 전달하는 내용만 전달하고 만다면 역사책 한 권을 단순히 글자로만 읽어주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념관은 '기념공간'이자 '공공공간'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념관에서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 삶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살아있는 역사', '기념관이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시관의 깨알같은 글씨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에 건축가는 관람을 마치고 아직 기념관 안에 있을 때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과 내가 사는 공간 사이의 관계를 찾기 바랬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로 된 직육면체를 감싸고 있는 수공간은 '상징못'이고 그 상징못의 물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벽으로 나뉘어 있지만 시각적으로 연속된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 방글이에게

"방글! 오늘 안중근 선생님 만나거야.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큰 희생을 하신 분이셔. 아까 링 맨 짧은 손 봤지? 링 맨 만 짧은 이유는 나중에 방글이 더 크면 설명해 줄께..."

뚱한 표정의 방글이를 보고 있는데 한 중년의 부부가 나에게 물었다.

"저기(기념관을 가리키며) 뭐하는 데에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예요."

"안에 뭐 있어요? 입장료 받아요?"

"안에 안중근의사관련 자료등이 있구요. 입장료는 없어요."

"(부부끼리 이야기하며) 그냥 가자"


새로운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형태적으로 그렇게 흡입력 있지는 않다. 상단 모서리에 '安重根'이라는 한자어가 세로로 적혀 있지만 유-글라스U-Glass의 아리아리함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기념관이 신축되면서 기존 기념관의 위치보다 30m 가량 더 뒷쪽으로 밀렸다. 기념관 일대에서 주축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른다. 구체적으로 밀레니엄서울힐튼 앞 도동삼거리에서 백범광장을 거쳐 교육연구정보원 주차장을 지나 분수대에서 N서울타워로 향한다. 이 축에서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더 멀어진 셈이다. 다행히(?) <남산르네상스 2단계 사업>을 통해 백범광장에서 기념관으로 연결되는 길이 만들어졌다. 차후 교육연구정보원과 기념관 가운데 있는 야외주차장을 공공공간으로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설계자: 임영환&김선현&디림건축(2010)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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