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광장, 수원
막다른 길이다 싶으면 옆으로 이어지고 연결되나 싶으면 막다른 길이 나왔다. 거미줄 같은 골목의 한 귀퉁이에서 난 또래 친구를 찾는 아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다른 한 귀퉁이에서 늦은 저녁 집까지 바래다주는 연인의 시선을 가늠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 길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은 사람들의 기억을 오랫동안 담을 수 있다. 학부의 마지막 학년, 수원화성 공모전에 함께 참가했던 나와 친구들은 그렇게 수원 화성(華城) 안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각해보면 공모전에서 우리는 화성의 옛길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두 도시공학과 출신이었음에도 건축물을 설계했다. 당연히 공모전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당시 화성 내 골목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길을 걷다 어느 순간 나타나는 화성과 옛 건물들이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간신히 걸을 만한 폭의 골목길이 조금 넓고 반듯한 길을 만났을 때 화성과 그 안에 옛 건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하이라이트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豐樓)가 보이는 장면이었다. 팔달산의 북쪽 능선을 배경으로 신풍루가 있었고 그 앞에 홍살문은 종로의 끝에서 또 하나의 프레임(frame)을 이루고 있었다(아래 사진).
신풍루의 원래 이름은 ‘진남루(鎭南樓)’다. ‘진남(鎭南)’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남(南)쪽을 진압하다’가 된다. 아마도 화성 행궁이 한양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화성에 애착이 많았던 정조는 진남루의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이름의 유래는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까지 거슬러 간다. 한고조의 고향이 패군 풍현 중양리(沛郡 豐縣 中陽里)였는데, 이후 ‘풍패(豐沛)’는 ‘제왕의 고향’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지어진 건물 중 ‘풍(豐)’자가 들어가면 대부분 ‘풍패’를 의미한다. 전주의 객사에 ‘풍패지관(豐沛之館)’이라고 쓴 현판을 단 이유도, 전주의 남문을 ‘풍남문(豐南門)’이라 부르는 이유도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전주가 풍패가 되면 이성계는 제왕이 되는 논리다. 정조가 화성 행궁의 정문에 신풍루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이곳이 또 다른 ‘제왕의 고향’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모전에 참여했던 친구끼리도 뜸하게 연락할 만큼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가족과 함께 주말 산책을 위해 화성을 찾는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 공모전 대상지로 정했던 곳을 지날 때면 지도를 들고 골목을 누비며 치열하게 토론했던 젊었던 우리가 그곳에 서 있는 것 같다. 이후 화성 내 길들은 조금 반듯해졌다. 그리고 곳곳에 크고 잘 설계된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섰다. 전통식생활체험관(위 사진)이나 수원전통문화관처럼 새로 지어진 한옥을 보고 있으면 실제 그런 건물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새로운 문화시설과 한옥들은 2011년 전담팀을 구성하며 시작된 ‘수원화성 르네상스 사업’의 결과물이다. 화성 내부 도심을 역사 기반의 문화관광벨트로 구축하는 도시재생사업인 수원화성 르네상스사업은 2016년 4월 일반 근린재생형으로 국토교통부의 지원대상이 되기도 했다. 현재 화성은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도 남부지역을 대표하는 어엿한 관광지가 됐다. 이곳을 오는 많은 방문객들이 미술관, 박물관을 비롯해 전통체험시설을 찾는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한 공간들이 생겨나면서 ‘행리단길’이라는 별칭도 붙었고 주말에는 화성행궁열차를 타기 위해 꽤 오래 기다려야 한다.
방문객들이 늘어나다 보니 지자체에서는 대규모 행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성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은 없었다. 화성의 동문격인 창룡문 인근에 무예를 수련하던 동장대가 있기는 했지만 너무 구석이었다. 결국 2004년 수원시는 화성 행궁 앞에 광장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08년 9월 화성행궁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의 크기는 광화문 광장(18,840㎡)보다 큰 22,331㎡다. 크기로만 가늠할 수는 없지만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앞이 아닌 행궁 앞에 더 큰 규모의 광장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내게는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실제 본 화성행궁 광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광장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장면은 팔달산의 북쪽 능선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 행궁이다. 골목을 돌고 돌다 어느 순간 보였던 과거의 장면과 달리 현재의 풍경은 탁 트여있다. 이 때문에 홍살문은 이전보다 더 앞으로 나오게 됐는데, 이를 통해 상징적인 문에서 광장의 영역을 한정하는 프레임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행궁 앞 광장은 화성의 원형은 아니다. 화성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화성전도(1801, 아래 왼쪽)’에서 행궁 앞은 행랑채를 갖춘 집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 경복궁 앞에 육조거리나 지금의 화성행궁 광장처럼 빈 공간은 아니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수원화성의 지적원도(아래 오른쪽)’를 봐도 화성행궁 광장이 조성된 자리에는 몇 개의 부정형 필지와 구불구불한 옛 길만 있었을 뿐이다.
광장에서 행궁과 팔달산을 바라보며 ‘수원 화성만의 고유함’에 대해 생각해 봤다. 수원화성 르네상스사업이 문화관광벨트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최소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보고 싶어 하는 것, 느끼고자 하는 고유함, 그리고 화성만이 갖는 장소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화성행궁 광장을 비롯해 수원화성 르네상스사업으로 조성된 미술관과 박물관은 과거 화성이 지니고 있던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화성행궁 광장은 모더니즘(modernism) 이후 많은 도시들이 추구한 기념비(monument)를 배치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따랐다. 바로 ‘공지확대(more open space)’다.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정통 도시계획에서 마치 미개인들이 마법적 물신을 받들어 모시듯이 근린공지를 놀랍도록 무비판적으로 숭배한다”라고 비판한 ‘공지확대’가 항상 잘못된 방법은 아니다(Jane Jacobs, 1961,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 New york ; Vintage). 하지만 그 방식이 화성 안, 그중에서도 행궁 앞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성은 디즈니랜드나 롯데월드 가운데 우뚝 서있는 귀족이 사는 서유럽의 성(Castle)과 달리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로서의 성(Fortress)이다. 그래서 화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성 안에 왕과 더불어 백성이 사는 영역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성은 일정 영역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다. 당시 백성들에게 성 안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도시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즉, 성 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밀도가 높고 혼잡한 공간이었다. 반면, 성 밖은 경작지를 중심으로 부분 부분 촌락을 이루는 성긴 밀도를 지닌 탁 트인 영역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화성행궁 광장처럼 넓은 공지는 화성 내부가 유지해 왔던 성격과는 상반된다. 그래서 정조가 행차했다는 어도(御道)가 만들어지고 거친 박석을 깔아 옛길을 재현했다 하더라도 화성행궁 광장은 성 안이 아닌 성 밖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사 도심에 새로 만들어지는 공간과 건축물은 언제나 찬반을 일으킨다. 화성행궁 광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화성행궁 광장은 개장과 함께 화성 내 기성(旣成), 즉 콘텍스트(context)가 됐다. 그렇다면 최소한 화성행궁 광장은 광장이라는 속성을 이해하고 잘 구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광장(廣場)의 속성은 이름 그대로 ‘넓은 장소’에 있지 않다. 오히려 광장의 속성은 그 장소를 둘러싼 건물과의 관계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화성행궁 광장을 바라보면, 일단 광장의 서쪽은 팔달산을 배경으로 행궁이 펼쳐져 있다. 2021년 화성행궁 2단계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광장의 서쪽 영역은 행궁으로 꽉 차게 된다. 광장과 행궁은 궁을 둘러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담은 두 영역을 나누는 장치이지 서로를 연결하는 장치는 아니다.
행궁 반대편의 동쪽 영역은 왕복 5차로의 정조로가 지나간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와 광장의 행위가 만나는 접점은 존재할 수 없다. 광장 남쪽 영역의 반은 주차장이다. 그나마 나머지 반에 수원문화재단과 홍보관이 있다. 광장과의 적극적인 관계 맺음이 가능한 용도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왕복 2차로의 도로와 화단이 있다. 그래서 둘 사이는 멀다. 이제 남은 건 북쪽 영역뿐이다. 다행히 광장 북쪽을 지나가던 도로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광장 북쪽에 새롭게 들어선 건물은 수원시립미술관이다. 현대산업개발이 수원시 권선지구에 6,600세대 규모의 도시개발사업을 하면서 기부채납 형태로 지은 문화 및 전시시설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의 입지는 상징적인 광장에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시설을 배치한다는 공식이 적용됐다. 문제는 광장의 북쪽 한 면을 미술관이라는 단일 건물이 대응함으로써 입면이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무엇보다 미술관으로의 진출입 외 광장과 건물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가 없다는 점이다. 실제 광장에 면한 수원시립미술관의 입면 길이는 75m가 넘는다. 여기에 광장과 미술관의 관계를 만드는 출입구는 두 개 뿐이다. 사실 미술관이라는 용도와 행궁 주변에 11m 고도제한이 설정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물의 형태는 낮고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성 내 새로 지어진 건물들 –수원시립미술관을 비롯해 화성박물관, 팔달구청- 의 입면은 모두 길다. 그렇다 하더라도 건물의 전면 공간과 건물 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은 다른 문제다. 두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나 문이 적다면 카페나 휴게공간과 같은 기능을 배치해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수원시립미술관의 개념 중 하나가 ‘문(The Gate)’이라는 사실이다. 수원시립미술관 설계를 맡은 간삼건축은 이 건물을 “역사와 만나는 문, 미술과 만나는 문, 자연과 만나는 문”이라고 설명했다(간삼건축 홈페이지). 설계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화성행궁 광장에 면한 수원시립미술관은 높은 ‘투과성(permeability)’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투과성은 어떤 환경에서 이동경로의 선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나타내는 이동성의 척도다.”
설계자의 설명과 도시에서 투과성의 개념을 차치하더라도 수원시립미술관이 과거 그 자리에 있었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그랬듯 화성행궁 광장과 주변 도시조직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미술관을 가로지르는 복도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복도는 전시공간을 담고 있는 상대적으로 큰 덩어리 사이로 나 있다. 그래서 좁고 길다. 여기에 복도 양쪽 벽을 사선으로 기울인 건축가의 감각이 더해져 마치 암석 사이에 만들어진 계곡 같다. 수원시립미술관 홈페이지나 설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복도 양쪽의 경사 구획은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설계자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다. 심지어 한 언론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화성의 견고함과 성벽의 질감을 보여주기 위해 (경사 구획에) 송판 무늬 거푸집을 활용했다”라고 한다.
하지만 수원시립미술관의 복도가 미술관 신축으로 사라져 버린 골목길의 차용이 되기 위해서는 송판 무늬 거푸집을 활용한 공들임 보다는 시민들의 공간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더 돋보여야 한다. 그래야 수원시립미술관은 개념으로서의 문이 아닌 광장으로 연결되는 문이 될 수 있다. 미술관 홈페이지에 나온 “전통을 매개로 도시와 자연이 숨 쉬는”이라는 소개는 솔직히 아직은 공허하다. 미술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이 소개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노출콘크리트 덩어리 안에 있는 작품들과 그 안에서의 행위들이 광장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한다. 동시에 광장에서 일어나는 시민들의 행위들도 미술관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시각적 투과성만큼이나 물리적 투과성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연히 그 오고 감은 과거 골목길이 그랬듯 미술관의 복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