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chur Oct 23. 2022

풍화를 생각하는 건축

한국 DMZ평화생명동산, 인제

자연은 중력을 거부하는 것들을 땅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반면, 건축은 중력을 거부하고 땅 위에 무언가를 세운다. 그래서 건축은 자연의 필연성을 거스르는 행위이자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는 결과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만든 건축은 자연의 복원력을 훨씬 넘어섰고 그 결과 자연 스스로 훼손된 상태를 되돌리는 일은 점점 멀어졌다.


설계자들 사이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남향으로 집을 짓거나 단열재 등을 사용해 건물 내부의 열과 에너지를 지키는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와 태양열, 지열, 풍력 등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액티브 하우스(active house) 그리고 이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의 친환경 건축의 등장은 이런 반성의 결과다. 다른 한편에서는 건물을 처음 지을 때부터 그 건물이 사라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땅 위의 암석이 분해되어 궁극에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풍화 작용'처럼 건축의 미래를 땅 위에 세워져 있는 상태가 아닌 점차 사라져 영(0)으로 되돌아가는 상태로 보자는 관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건축가로 승효상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축이 불멸하는 기념비가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 속으로 풍화되기를 바랐다. 강원도 인제군에 '분단의 현장에서 새로운 생명과 평화를 역설한다'라는 기본 구상으로 설립된 '한국 DMZ평화생명동산'은 승효상의 이런 바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승효상은 DMZ평화생명동산의 궁극적인 미래를 건물과 외부공간을 모두 포함한 단지 전체가 자연화되는 모습으로 가정했다.


DMZ평화생명동산 전체가 자연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 '시간'이다. 자연에서 풍화 작용은 결국 긴 시간을 전제로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풍화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재료를 건물의 외장재로 선택했다. 처음부터 단지를 둘러싼 산의 일부였던 것처럼 경사지에서 뻗어 나온 건물의 북쪽 벽은 황토로, 남쪽 벽은 내후성강(耐候性鋼)이라고 불리는 코르텐(corten)으로 마감했다. 황토는 시간이 흐르면서 금이 가고 부스러진다. 그리고 종국에는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거나 땅으로 떨어져 섞인다. 코르텐은 공기에 노출되어도 부식이 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출된 부분이 산화되어 붉게 변한다. 황토와 코르텐 두 재료가 보여주는 건 '시간의 흐름'이다. 황토와 코르텐으로 만들어진 DMZ평화생명동산 내 건물들은 완성과 동시에 자연의 풍화 작용이 시작되듯 아주 천천히 변하고 있다.

단지 전체의 자연화를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건 DMZ평화생명동산에서 자연의 영역을 가능한 늘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첫째 건물이 앉혀져 있지 않은 영역을 가능한 넓혔고, 둘째 건물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 엮었다. 구체적으로 대지 면적에서 건물의 바닥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 즉 건폐율을 낮췄다. DMZ평화생명동산의 건폐율은 2.63%에 불과하다. 건물이 앉혀지지 않은 영역은 인위적인 조경공간으로 만들기보다는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 같은, 다소 거칠어 보이는 외부공간으로 조성했다. 건물과 자연의 엮임은 건물의 배치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건축가 승효상은 자신이 설계하는 건축의 주제어를 '터무니'로 삼을 정도로 땅이 지닌 특성을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배치에 신경을 써왔다. ‘터무니’는 ‘터에 새겨진 무늬’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땅(land)’에 새기는 ‘기록(script)’이라는 의미의 '랜드스크립트(landscript)'다.


DMZ평화생명동산 내 건물들의 배치를 보면 동서방향으로 길다. 건물의 일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는 지점에서 반대쪽을 바라보면 건물이 DMZ평화생명동산 동쪽에 있는 설악산과 서쪽에 있는 대암산을 연결하기 위해 이렇게 배치됐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손깍지를 낀 것처럼 동쪽에서 시작된 8개의 건물과 서쪽의 도로에 면한 외부 조경공간은 서로 맞물려 있다. 동시에 주변 자연은 건물 지붕을 덮고 있는 녹지와 외부 조경공간을 통해 건물 사이로 스며들면서 설악산의 흐름과 대암산의 풍경을 교차시킨다. 이곳에서 외부공간은 인공화 된 자연이고 건축은 자연화된 인공구조물이다.

비록 교차와 엮임이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땅이 지니고 있었던 자연의 흐름을 되살리겠다는 건축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DMZ평화생명동산이 지어지기 전 이 땅은 주변 지역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흙을 퍼갔던 토취장(土取場)이었다. 그렇다 보니 땅은 파헤쳐진 채 덩그러니 방치돼 있었고 미생물의 이동을 포함하여 주변 자연과 단절된 상태였다. 하지만 토취장으로 이용되기 전보다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 이 땅도 주변 자연과 똑같은 상태였다.


고립돼 있지 않고 주변과 이어져 있는 살아 있는 상태가 자연의 핵심이라면 DMZ평화생명동산의 배치는 땅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었던 특성, 즉 자연의 흐름을 되살리려는 노력이다. 건축가는 주변과의 연결과 흐름이 되살아난 땅의 자연성이 새롭게 조성된 DMZ평화생명동산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서서히 풍화시켜 궁극에는 다시 땅으로 되돌릴 미래를 상상했다. 그래서 DMZ평화생명동산에 들어선 건축의 주제는 '위대한 복원'이다.

"전쟁, 대결, 죽임, 차단의 DMZ 일원을 '평화와 생명의 터전'으로 바꾸겠다"라는 DMZ평화생명동산의 목표를 보면 '풍화'를 통한 '자연화'의 대상은 결국 단지와 건축물이 아닌 'DMZ(비무장지대)'다. 다소 상징적이고 은유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DMZ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이 땅에 들어선 시설들과 DMZ 간의 연계성이 생긴다. DMZ에 대해 우리가 지향하는 제스처와 최종 상태가 바로 풍화 작용의 마지막 단계인 '사라짐'이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