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눈에 비친 상에서 진실성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한 작품이든지, 내면적인 세상을 표현한 것이든지, 그림은 하나의 비추는 거울 또는 밖으로 통하는 창문처럼 진실을 바라 볼 수 있는 통로라 믿는다. 이에 따라 모든 예술의 과제는, 많든 적든, 세계를 향한 바라봄과 내면의 추상적 심상을 하나로 묶어서 세상에 탄생시키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이는 그림이 필연적으로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보는 것"은 서구 유럽 문화 전통의 고대 시대로부터 진실을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눈을 다른 감각 기관들과 구분시켰는데, 그 이유는 보는 활동을 하기 위해선 항상 매체 - 예를 들어 빛과 같은 - 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태양은 빛을 내는 최고의 원천이고, 그러한 태양의 존재는 현존하는 진실을 인식하는 것을 위한 조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태양과 빛에 대한 이러한 중요한 위치와 의미는 플라톤의 로고스적 철학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진실은 주체의 외부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진실에 대한 개념 또한 바뀌었다. 모더니즘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본다는 것 자체는 더 이상 온전하고 완벽한 진실 혹은 현실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했다. 볼 수 있도록 작용하는 빛, 즉,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라는 건, 전체 빛에서 아주 작은 부분 - 빨강과 보라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오늘날 우리가 작가의 창조성의 최고점을 현실과의 대비에서, 그리고 환상의 부풀림 혹은 환상에 의한 보충에서 찾게 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의식에서 현실은 하나의 구성요소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의 형상에 투영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형상은 타락 이전의 온전한 형상을 의미하고 따라서 진실을 의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기준이 바뀌게 된 현 세상에서 이 의미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예술 작품과 성상의 관계, 그리고 창조성에 담긴 진실성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감히 풀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