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랜서의 귀촌, 시골에서 먹고살기
처음으로 월세를 못냈다. 함께 살기 전 닌나 씨와 둘이 이런 말을 했었다. 알바를 하건 뭘 하건 둘이 일하는데 설마 집세를 못내겠냐는. 웃으며 흘린 말이 사실이 될 줄이야!
코로나로 인해 여행작가로서의 일이 뚝 끈겼다. 한달에 1~2번의 해외출장과 꼬박 꼬박 썼던 원고들, 정신없던 책작업은 마치 신기루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지경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일을 한게 1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도 여행 이야기 대신 시골 밥상과 텃밭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쯤되자 정체성에 혼란도 오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뭐하는 사람인가. 여행작가? 시골농부? 농사로 밥먹고 사는 건 아니니 농부는 아니지. 그럼 그냥 시골 아지메? 주부? 결혼(과 비슷한 동거)한 경단녀?
힘든 시기라도 sns 속 다른 사람들은 야금야금 여전히 잘만 활동하는 것 같은데, 내 시계만 멈춘것 같다. 이제 앞으로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불안감과, 괜시리 도시에서 멀어진만큼 시대에 더 뒤떨어지는 것만 같은 무기력함도 찾아왔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기다리며 놀고만 있던건 아니다. 먹고는 살아야하니까. 요즘은 N잡 시대아닌가. 작가, 유튜버, 바리스타, 일러스트 등 한 사람이 여러가지로 표현되는 세상이다. 우리에게 n잡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여행작가 외 내 또다른 정체성은 영어 선생님이다. 호주에서 유학한 경험덕분에 서울에 있을 때는 여행작가로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강남과 분당의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한 학년 전체(반이 아님)가 10명 남짓하고, 그 흔학 학원하나 없는 시골에서는 이마저도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12살짜리 초등학생을 소개받아 과외를 시작했다. 미용실 집 딸인데 어찌나 순수하면서도 어른스러운지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학원 다녀보는게 소원이라니, 도시의 아이들이 들음 식겁할 이야기이다. 가장 가까운 학원까지는 적어도 20km가 넘는데 일하는 엄마가 매번 데려다 주고 할 수가 없어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4학년이 되면서 교과목에 영어가 들어가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했는데, 학교 수업만으론 힘든 점이 많아 고민하던 중 우연히 건너건너 내 소개를 듣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 째 그 아이와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닌나 씨는 여기와서 '편돌이'의 세상에 입문했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처음엔 돈 세는 것도 틀리고, 포스기 사용법도 까먹어 걱정 하더니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다른 편의점을 가면 여기는 진열이 어떴네 등 편의점 언어를 사용하면서 평을 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폐기 상품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이 되어준다.
코로나 이 후 주업과 부업이 전도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비는 확실히 도시보다 적게 든다. 그럼에도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기본 지출과 갚아야할 돈이 있어 위 아르바이트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인제에서 고추 농사를 하는 지인이 일손을 도우러 올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올해 코로나로 일손들이 빠지면서 인력난이 심각하긴 한가보다. 우리같은 초짜의 손도 빌리려고 하는거 보면. 닌나 씨와 둘이 며칠만 일하고 오면 그래도 한두달은 숨이 트일것 같았다. 물론 병원비가 더들거라는 주위 걱정도 일리가 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얼마전 알바몬 지원한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러 오지 않겠냐는 단비였다.
그렇게 시내에 있는 마트에서 일을 하게 됬다. 업무는 이벤트 행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며 룰렛 이벤트를 진행해 상품을 주는 일이다. 처음 마트 행사 업무를 지원할때는 솔직히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20대 중반 대형마트에서 시식 행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때는 학생이었고, 아프리카 여행비를 모으는 중이었다. 꿈으로 초롱초롱했고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그 때 사람을 대하는 일이 잘 맞는구나 새로운 적성도 발견했다. 부끄럼많은 그 나이대 학생들에 비해 큰 목소리로 씩씩하게 잘해서 계속 일이 주어졌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 때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마트에서 시식행사를 하는 나이대를 보면 대부분 20대 초중반 학생들 그리고 50대 이후 주부님들이다. 나와 같은 30-40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딘가 직장에 소속되어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향해 달려가야할 한창 나이에 과거 잠깐 머무는 것이라 생각했던, 꿈을 향한 과정이라 생각했던, 아르바이트로 돌아가다니 후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괴감도 잠시. 몇 군데 지원서를 넣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예전엔 넣으면 바로 전화가 왔었는데 말이다. 이제 원한다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나이대는 지났구나 깨달았다. 시켜주면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서글픔이 배가 되었다.
10여년만에 해본 마트 알바는 즐거웠다. 무엇보다 시원한 에어컨을 누릴 수 있으며, 돈을 번다는 행위 자체에 기쁨을 느꼈다.
여이- 아가씨!
작가님, 선생님-에 이어 이제까지 불리던 호칭에 한 가지가 더 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는 현실에 놀랐다.
"그래서 이거 행사해서 얼만데?" "ㅇㅇ이는 어딨어?"
작가일때와 선생님일때는 처음부터 반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 같은 나인데 말이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 어떤 명함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의 온도차를 느꼈다.
10대 때는 빛나기 위해 태어난 줄 알았다. 20대 땐 빛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30대가 되니 사람마다 각자 다른 시기와 반짝임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나만의 길을 가고 나만의 행복을 위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37의 지금 - 사람마다 다름을 알고있음에도, 나만 도태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단 한 번도 빛나보지 못하고 이대로 나이가 먹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먹어도 이렇게 아둥바둥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까. 아마 마흔 전 또다른 사춘기가 오려나보다.
나보다 연륜이 배로 높은 닌나 씨가 말했다. 넌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꼭 빛날 필요가 없다고. 너는 너일뿐이니 자신만의 색깔로 물드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닌나 씨는 파도 위 조각배처럼 요동치는 내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작가건, 선생님이건, 여이- 아가씨건 뭐가 됬든 나답게! 주인공 인생은 아니어도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다.
서두를 필요 없다. 반짝일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될 필요가 없다. by 버지니아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