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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Oct 13. 2019

태곳적 생(生)이 출몰하는 마을

_ 여행 10일째, 할슈타트

#1 기나긴 여정

[7시]

핸드폰이 요란을 떠는 바람에, 10평 남짓 숙소에 시시각각 변절하는 TV 대신 놓였던 고요가 깨어났다. 말쑥한 잘츠부르크를 떠날 시간, 1층에서 객을 맞던 고양이와 금빛 여물던 레몬나무와 사연 많던 에마와 모두모두 안녕.

[8시 13분]

산중 호수마을 할슈타트로 출발하는 150번 버스에 올랐다. 길은 멀고 하루는 짧아, 버스 전광판 시계대로 손목시계를 조율했다. 째깍째깍, 분침까지 잘 맞춰졌다.  

[9시 13분]

장크트길겐에 도착했다. 알프스 빙하가 녹아내려 만들어졌다는 잘츠깜머굿의 76개 천연 호수 중 하나인 장크트볼프강이 유유한 마을, 오픈 전인 선착장 매표소 입구에 캐리어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물안개 넘실대는 마을로 텀벙 뛰어들었다. 우듬지 울긋불긋 가을 태우는 마로니에부터 공동묘지의 생글생글한 메리골드와 베고니아, 낡은 겨울장화를 피어올린 사피니아, 여느 가게 앞에서 밤새 손을 맞는 꽃등까지…. 아침부터 꽃잔치에 취할 뻔했다.

꽃 장식이 유난한 이곳은 모차르트의 외가가 있는 마을, 시청 앞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모차르트 동상이 있다. 그의 어머니와, 결혼해 여기 살았다는 누이 난넬의 초상화가 함께 그려진 모차르트의 외가는 오픈 전이었지만, 크림색 외관이 시들지 않을 따뜻함과 풍요로움을 짐작케 했다. 이제 동네 아이들마저 깨어난 시간, 소란해진 놀이터를 지나 돌아온 선착장에는 시간을 잊은 여행자마냥 캐리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11시]

10시 20분경 유람선을 타고 장크트길겐을 떠난 지 40여 분 만에 샤크베르크 선착장에 내려섰다. 캐리어를 맡기고 빨간 증기기관차에 오르자, 칙칙폭폭 기관차 연기가 레일을 지우고 산중 마을을 지우더니 해발 1,734M 정상에서 흩어졌다.

정상의 카페에서는 대부분 맥주를 마셨지만, 허기진 나는 샌드위치와 핫초코를 먹었다. 그래도 모두의 눈은 한곳으로 모였는데, 파란 하늘을 날고 있는 빨간 행글라이더를 따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오락가락했다. 그 바람을 타면 시공을 초월할까, 꿈꾸는 눈빛이 서로 닮아 있었다.

[12시 25분]

제기랄, 분침까지 맞췄는데 할슈타트행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하산길, 탑승객 사진 더미에서 제 얼굴 찾는 숨박꼭질 후 정거장으로 질주했을 땐 방금 토한 매연과 1시간 후에나 올 버스를 기다려야 할 운명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엄지를 들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쌩, 쌩쌩, 쌔앵~. 몇 분이 지났을까, 먼지 잔뜩 뒤집어쓴 SUV 차가 머뭇머뭇 정거했다. 마침 바트이슐 역까지 간댔다.  

왼뺨으로 점 하나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관광 온 미스터 빈이라 착각했을 오스트리아 신사는 트레킹용 자전거로 꽉 들어찬 좌석 뒤편으로 돌덩어리가 된 캐리어를 실었다. 끄응~. 오스트리아 빈에 살면서 주말마다 마라톤과 산악 트래킹을 즐기러 이곳을 찾는다는 신사는 따라서 연미복이 아닌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잘츠부르크처럼 붐비는 도시에 가다니, 차라리 빈에 왔어야지.”

거두절미, 동유럽을 여행 중이라 답했다.

“뭐라구? 오스트리아는 중유럽이야!"

이후 낙후한 동유럽과 자신의 나라를 엮는 게 도매금 취급이라는 그의 부연 설명에 20여 분 길이 무한으로 느껴졌다. 대단한 자부심에 대해, 나를 대신한 라디오가 노래했다.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dust in the wind~.”

거짓말처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먼지가 일었다.

[14시 50분]

마침내 할슈타트 역, 돌고 돌아 이날의 목적지가 목전이었다. 바트이슐 역에서부터 함께했던 할머니의 여행 가방을 내려드릴 때, 한쪽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할머니의 오른뺨 왼뺨으로 입을 맞추셨다. 보트로 5분 여, 건너편 할슈타트에서 어떤 얼굴을 만나겠다고 아침부터 그리 서둘렀을까? 시계는 벌써 소용없어졌다.


  

#2 고치며 이어가는 삶

입맞춤은커녕 점심을 지나는 레스토랑에서 일손을 거들던 매니저를 한참 기다려 시모니 게스트하우스 싱글룸에 들었다. 물론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수개월 전 예약하느라 애쓴 보람을 느끼게 했다. 깊은 산이 차곡차곡 호수에 담겨 일렁였고 어디로도 물러나지 않는 오후의 볕으로 호수 마을은 온통 눈부신데, 냅다 질러 오가는 유람선이 반짝이는 햇살을 부수었다 말았다 가만있질 못했다.     

좀이 쑤신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삐거덕삐거덕, 수백 년 된 숙소를 나서서 현재의 마을을 구경하러 나섰다. 천연소금과 입욕제, 어린이용 던들 등속을 흥정하는 이들과, 오리와 거위의 싸움을 구경하며 사람 사이를 어슬렁대거나 주전부리를 찾는 이들로 퍽이나 혼잡한 시골길이었다. 딴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버스정류장이 마을의 끝이었다.

근처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소금광산 때문에 할슈타트(Hallstatt, 소금마을)라지만, 내게 지하 막장은 공포여서 뒤로 돌아 능선을 따라 올라앉은 마을 골목을 누비기로 했다. 지나온 마을 못지않게 오래된 집들이었으나, 푸슬푸슬 삭은 데 없이 덧대고 잇대어 잘도 버티고 있었다. 이들의 삶을 지탱한 목수인지 연장 수집가인지 확인한 바 없는 어느 집 외벽에는 뭐라도 뚝딱 고칠 법한 사다리부터 대패까지 빈틈없이 내걸려 있었다.

높이 오를수록 마을도 깊어져 오가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산머리 서 있는 성당 문이 아무에게나 열려 있었다. 그 안마당에 있던 공동묘지 대개의 생몰년시는 “1918년 생~2010년 졸”, “1914년 생~2009년 졸”~, 이랬다. 여기 어르신들이 지나간 나이를 겪지 않은 이방인에게, 고쳐지고 덧씌워진 집들처럼 지난 시간을 포용하며 다가올 시간을 끈덕지게 살아가라 일러주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이제 한곳에서 나고 자라 영원까지 함께하는 이들과, 이곳에서 밤을 지내기로 약속한 사람들만 남아 헐거워진 골목. 동네 어귀로부터 멀리 호숫가 레스토랑까지 점점이 호박등이 켜지고 산머리 가로등도 불침번을 나서겠지만, 까마득히 몰려오는 어둠을 막아내진 못했다. 산과 호수가 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마을 구석구석이 가웃없이 사라졌다. 동안 잘 튀겨진 슈니첼을 딸기잼에 발라 먹고 감자튀김까지 한 접시, 깨끗이 먹어치웠다. 21세기 핸드폰이 종종 먹통이 되는 시공간, 태곳적 어둠에 꼼짝없이 갇혔다.   

       


#3 거꾸로 시간 여행

“엄마한테도 엄마 아빠가 있었?”

태어날 무렵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던 외가 어른들을 알 턱 없는 쌍둥이가 네 살 때의 일이었다. 도와주는 손 없어 쌍둥이를 키우느라 동네 어귀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해, 어린이날은 엄마의 엄마와 아빠를 찾아가기로 했다.

바닷가 마을이라 신나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남해를 면한 진해로 내려가는 대여섯 시간 동안 보채고 치대고 짜증냈다. 남편은 결혼하고 10년이 넘도록 고작 몇 손가락에 그치는 진해행이었으면서도, 서울하고 한참 멀리 촌에서 나고 자랐다며 별 웃기지 않는 농을 던졌다. 솔직히 고향 가는 나도, 휴게소 두세 번 들러 가는 기나긴 고속도로에, 참 멀리도 떠나왔구나 한숨지었다.

호박등 주렁주렁 달려 있던 할슈타트 레스토랑 입구

마침내 진해로 넘어가는 장복터널, 산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오도카니 고향 마을이 나올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양어장 아랫마을로 들어가야 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20년 넘게 혼자 사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빈집으로 쇠락을 거듭하던 친정집은 몇 해 전 남의 손에 넘어갔다. 하여 옥신각신할 새 없이, 드라마 <로망스>로 유명해진 진해천 옆에 자리한 오빠네로 향했다.

쌍둥이는 처음 뵙는 외삼촌 내외가 되게 낯선 눈치였다. 그래도 외가랍시고 푸지게 먹고 자고 일어나, 어린이날 개방되는 해군사관학교에서 모형 거북선에 올랐고 <난중일기> 한 구절인 줄 모르고 탁본도 떴다. 다음날은 고향 떠난 지 서른 해가 다 되어가던 나조차 생소한 장소들을 방문했는데, 편백나무길을 걸었고 엎어놓은 소쿠리를 닮아 ‘소쿠리섬’이라 불리는 섬마을로 배를 탔으며, 바닷길 열리는 진해해양공원 앞에서 소라 고동 찾느라 엉덩이 죽치고 앉은 아이들을 물 들어오기 전에 돌아가자 타일렀다.  


그 다음날엔 진해 신명물이라는 해안도로를 달렸고, 365계단으로 유명했던 진해 탑산을 케이블로 한달음에 올라 이순신 장군과 왜군의 격전지였다는 진해 안골포 등을 전시 지도로 탐색했다. 그리고 벚꽃빵을 사고 주전부리를 하느라 한참 늦어진 오후, 드디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가 있는 공원묘지로 향했다.

가파른 산을 올라야 하는 쌍둥이는 지칠 법도 한데, 엄마의 엄마와 아빠를 처음 만난다는 게 흥분됐는지 후다닥 뛰어올랐다.

“그런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무리 산을 타고 올라도 엇비슷한 봉분들과 함자만 다를 뿐인 묘비들이었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아이들 외삼촌은 지난 명절에 꽂아둔 국화를 갈고 몇 가지 과일과 부모님 생전 잘 드시던 막걸리를 혼유석에 차린 후, 천천히 입을 여셨다.   

“여기 누워 계시지.”

이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의 아이들이 고개를 수그리며 외쳤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일어나세요! 저희 왔요!”

친가 문턱을 넘으며 하던 소리대로였다. 저승문을 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만나뵙고 싶었으나, 묘 떼 아래 흙 한 톨 움직일 가망은 없어 보였다.


참 많이도 변한 고향은 내게도 흥미로운 관광지였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정작 보여주고 싶은 건 달리 있었다. 그것은 공장으로, 마을로, 쌀을 이고 져 날랐던 억척 외할머니와 사시사철 아지랑이 봄날처럼 사시던 외할아버지가 웬일로 한마음 되어 가꾸던 화단이었다.

가겟집 담을 나누던, 과수원을 한다던 옆집으로 무화과가 익을 때마다 서리하던 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어느 날엔가 가겟집 안마당에 옆집에서나 보던 석류나무와 무화과와 감나무가 한꺼번에 심어졌다. 몇 해나 과수를 맺었는지 세기도 전에 살림집 삼아 양옥집을 한 채 더 올리면서 화단도 세 평 정도 더 생겨났다.  

살림집 담을 넘어온 옆집 동백이 툭툭 떨어져 벌건 꽃무덤을 만들면 이때다 하고 우리집 목련꽃이 봉오리째 폈다. 연산홍과 배꽃이 연방 터지는가 싶으면 다시 담 따라 옆집 능소화가 늘어졌고, 그때마다 우리집 치자꽃은 머리가 아프도록 진한 향으로 맞섰다. 가을에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국화 화분으로 검고 작은 진드기들이 잔뜩 엉겨 방으로 기어들까 무서웠다. 그나마 호랑가시나무 빨간 열매는 겨울방학 신호탄이라 반가웠는데….

나와 함께 자랐던 그 화단은 진 남의 손에 갈아엎어졌을 테라, 부모님 산소엔 조화가 물색없이 쨍쨍했다.  


  …100년 동안 진해도 많이 바뀌었다. 부산 쪽으로 확장된 평지에 들어선 아파트들을 보면, 어린 시절 논밭이던 창원의 들판에 쑥쑥 들어서던 아파트들에 놀라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다. 그렇게 새로운 동네는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엄마가 걸었던 골목, 내가 걸었던 골목, 엄마와 내가 함께 걸었던 골목은 또 그것들대로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 김탁환, <엄마의 골목> 중에서  

   

책을 덮었다.
그때, 고향에서 서울집으로 돌아올 때, 쌍둥이는 “엄마와 같은 고향이면 좋겠쪄.”라고 말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직접 뵙진 못했지만, 그분들이 엄마를 품어 사람답게 가꾸었던 곳에 정을 느꼈다니 가슴이 뻐근했다. 이 아이들이 자라 돌아볼 그 고향에는 내가, 남편이, 우리 가족이 함께 걸었던 많은 길과 이야기가 남아 있겠지. 그러니 우리 부부의 삶도 여기 사람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뚝딱뚝딱 고치고 여미며 끈덕지게 끌고 가야 하겠지.  

이제 더 이상 나이 들지 않는 친정엄마의 나이에 임박한 나는, 손바닥 위로 할슈타트 어느 담벼락에서 딴 붉은 열매를 올려 천천히 굴려봤다. 깜찍하고 동그란 열매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만지작댔던 엄마의 유두를 꼭 닮아 있었다. 달리 보면 쌍둥이가 물었던 내 유두 같기도 했다.

태곳적 어둠에 안겨 자궁 이전의 자궁으로 이끌리는 밤, 간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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