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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Oct 08. 2019

당신의 꿈에 주문을 걸어

_ 여행 8일째, 잘츠부르크 1

#1 놀라운 오후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왠지 오종종한 발걸음이 어울리지 않았다. 미뉴에트에 맞춰 ‘단다단다’ 뛰어 볼까, 아니면 왈츠에 맞춰 ‘쿵작작 쿵작작’ 춤춰 볼까?

넷째 언니가 초등학교 졸업반 때 처음 그 음악을 들었다, 라고 생각한다(같은 곡임을 확신한다면 음악 신동이었을 테다). 언니는 종종 술지게미 냄새 지독하던 학교 급식 밀빵을 갖다 줬는데, 그날따라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사교육이라곤 일절 사양하던 엄마가 웬일로 그 언니한텐 주머니를 열었는지, 언니가 오후 수업을 파하고 주산학원까지 다녀오려면 한참 길이었다.

언니를 마중하러 가다, 소꿉친구를 만났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이랬다. 그 나이엔 맥락 없이 행동하는 게 보통이라, 집 나선 이유를 까먹고 미 고문단 앞 피아노 학원까지 재잘재잘 같이 걸었다. 뚱땅대는 건반 소리가 라디오 볼륨 키우듯 커졌고, 주머니 공기놀이를 하자 꼬드겼지만 모범생이었던 친구여서 거절당했다. 여차저차 나도 학원에 들어가게 됐고, 이번에는 친구의 수업이 마치길 오래도록 기다렸다. 하암~.


높고 낮던 음표가 우뚝 멈춰서고, 메트로놈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 차례 교습이 끝나고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와야 하는데, 학원 선생님이 두 사람에게 간식을 권하는 통에 바로 나오지 못했다. 학원에 다니고 싶지 않냐 물어봤던 것도 같고, 염치를 셈할 나이가 아니어서 대답보다 카스텔라로 뻗는 손이 빨랐던 것도 같다.

상담인 듯 아닌 듯 간식이 동날 즈음 키가 훤칠한 남학생이 들어왔다. 학원 맨 구석 피아노를 상대하기로 작정한 남학생이 허리를 쭉 펴 앉자, 이번엔 그에게 다가선 선생님이 휘적휘적 악보를 넘겨 뭔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세상 처음 듣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 하얀 손이 건반 위에서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달콤함을 탐했던 입이 쩍 벌어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아노학원에 보내 달라 졸랐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그 후로 이 핑계 저 핑계 친구를 좇아 피아노 학원을 서성였는데, 카스텔라 구경은커녕 음표 마구잡이 꼬여 꽝꽝대는 소음만 듣다 말았다. 얼마 후 친구네가 야반도주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오후 나들이는 갑작스레 끝이 났고, 돈을 떼이고 야단법석인 마을 엄마 들이 내버려둔 아이들끼리 잣치기 구슬치기에 손톱 밑이 새까매졌다.

다시 그(?) 음악을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가겟집에서 한 골목 위 새로 지은 양옥집은 시집 간 큰언니와 원양어선을 타러 떠난 오빠를 제외한 네 자녀가 생활하기엔 제법 넓었다. 그 붉은 벽돌집 응접실 장식장으로 귀한 물건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는데, 맨 위에는 금박 제목이 선명한 세로글 인쇄된 문학전집이, 그 아래에는 오빠가 외국에서 사온 와인과 보드카 들이 들쑥날쑥 모여들었다.  

그보다 더 아래 텅 비었던 자리에 턴테이블과 LP판 들이 진열된 건 이사하고도 한참 후였다. 언니들의 문화를 염탐하던 때였지만, 망가뜨리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아 LP판만큼은 아예 손대지 않았다. 물건의 주인인 은행원 둘째언니가 쉬는 일요일, 미몽의 턴테이블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벌레 잡던 새도 깜박 쉬어갈 거라 상상했던 일요일, 의식이 치러졌다. 대청소를 마친 둘째언니가 엄선한 LP판을 조심스레 턴테이블에 올렸다. 사춘기 넷째언니만큼 예민하던 전축바늘이 LP판 바깥으로 놓이자, 우웅 혹은 치직 소리를 가다듬어 구불텅구불텅 검은 판이 돌아가더니 오래 전 그(!) 음악이 연주됐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모차르트 협주곡이래.”

이로써 일요일 대청소 후 통과의례처럼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스메타나의 〈몰다우〉,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등을 만났다. 안단테였다 알레그로였다, 악보 위 그 음악을 두드리고 뜯어대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은발의 지휘자 카라얀과 얼굴 모르는 음악가들 모두가 흠모의 대상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둘째언니가 일찌감치 시집을 가고, 대학생이 된 셋째언니가 대학가요제 LP판을 사들여 자매들이 유행가를 함께 흥얼대는 나이가 되면서 그 음반들은 골동품이 되고 말았다. 어쩌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 앞에서 잘난척하다 LP판을 떨어뜨려 끄트머리 이 빠진 모양새도 생겼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뱃속 아이를 풀러 온 음반의 진짜 주인인 둘째언니도 그 즈음엔 음반의 근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잊혀졌던 그 음악은 대학 시절, 그야말로 문득 다가왔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한참 팝송을 드나들다 입학한 대학 교정은 80년대 운동가요로 생소하기 짝이 없었고, 그날따라 강의실 창가에서 내려다본 진달래와 개나리가 보통 처량맞은 게 아니었다. 마침 교수님의 평조 같던 목소리를 들으며 고향 벚꽃이 다 졌겠구나 생각할 즈음, 느닷없이 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딴, 딴, 딴, 딴, 딴, 딴, 딴, 딴~”

파헬벨의 <Canon in D Major. 강의 시간 그 음악을 들었던 건 대학 시절 단짝도 마찬가지였다. 클래식 감상자로선 베테랑이었던 단짝의 귀띔으로, 최루탄 뒤집어쓰던 운동권 학생이 된 후로도 교내 동굴 같던 음악감상실에서 한낮의 클래식에 터질 듯한 가슴을 식히곤 했다.

클래식은 놀라운 오후이기도 했고, 경쾌한 오전이기도 했으며, 마음을 달랠 대학 시절의 오수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행 중 그 음악의 대가들을 만난다는 게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펄떡거렸다.


    

#2 음악 거장들의 도시를 향해

“음악의 도시라면, 빈?”

6시 55분 새벽 기차를 누가 타려나 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이쪽저쪽 좌석 위로 예약명이 허다하게 붙어 있고, 신문이며 크로와상이며 커피를 든 사람들로 가득한 기차는 순식간에 무더워졌다.

껴입은 옷을 한 차례 두 차례 벗다 티켓을 떨어뜨렸다. 그게 인연의 끈이었다. 그걸 주워준 건너 좌석의 중국인 유학생 루비가, 자그레브에 살고 있는 자신을 보러 온 엄마와 함께 류블랴나로 여행 가는 길이라며 이야기를 나누다 질문했다. 이 기차는 슬로베니아의 국경도시 도보바 역에서 여권 심사를 거친 후 류블랴나와 다시 국경도시인 예세니체를 지나 빌라흐, 잘츠부르크, 뮌헨 중앙역에서 멈출 예정이었다. 그러니 빈은 예정 밖의 도시였다.

“잘츠부르크로 가요. 모차르트와 카라얀 생가를 방문할 거예요.”

“아우구스부르크가 아니라 잘츠부르크?”

이번엔 홍콩 모녀가 비워둔 자리에 앉은 스위스 학생들이었다. 고향집 장식장의 고전문학전집처럼 두꺼운 책에 몰두하던 여학생들과 점심을 겸한 과일 들을 나눈 뒤였다. 독일 여행이 끝나는 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두 학생은 멕시코까지 다녀온 세계 여행가답게 엄청난 배낭을 짊어지고 이동 중이었는데,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태어난 아우구스부르크의 모차르트 박물관을 떠올린 듯했다. 많은 도시가 생전의 음악가를 초청한 바 있고 저마다 사후 그와의 연고를 자랑했으니, 그리 생각할 수 있겠다.

음악적 소양도, 언어적 스킬도 별로여서 얼른 K-POP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저 <강남스타일>만 읊던 그녀들은 진취적인 세계대중문화 탐색가가 아녔는지, 뉴욕 친구네 아이가 좋아 죽는다던 방탄소년단을 모른다 했다. 다만 음식 이야기는 곧잘 통해 갖가지 메뉴를 들먹였다. 매운 걸 좋아한다며 김치에도 엄지, ‘어메이징’ 건강식이라며 비빔밥도 엄지. 지나치게 소박한 점심이었나, 희망 메뉴를 들추다 꼬르륵꼬르륵 뱃고래가 울렸다. 백팩에 넣어둔 육포를 나눴고, 국적 따질 여유 없이 갈비 뜯듯 먹어치웠다.


속도를 줄이던 기차가 급기야 멈추는가 싶더니, 앞량의 기차가 떨어져 나가고 빨간 OBB 기차가 쿵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창으로 바짝 붙어 내려다보는 동양인에게, 빨간 헬멧을 쓴 채 위아래 붉은 제복의 역무원이 윙크를 보냈다. 마침내 방향을 바꾸어 달릴 기차는 조만간 이날의 도시에 멈춰 설 예정이었다.

동안 파트너도, 풍경도, 읽던 책마저 바뀌었다. 며칠 전 접어둔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를 펼쳤더니, 마담 모차르트가 여행 중 만난 신부에게 결혼 선물을 권하는 대목부터였다.

“소금은 귀한 물건으로, 가정의 행복과 후한 접대의 상징이잖아요.”  

소금광산이 있어 진즉 로마 대주교의 눈에 들었던 잘츠부르크, 음악 거장들이 태어난 이곳으로 오는 동안 심심치 않은 7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3 피아니스트 여행자

“하이.”

웃으면 덧니가 예쁜 그녀가 아는 체를 했다.

미라벨궁 모퉁이 모차르테움 음악원의 한인식당 히비스코스(무궁화)에서 공기밥 두 그릇과 2만 원 상당의 김치찌개를 바닥까지 훑어먹고 숙소에 들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삼위일체성당(드라이팔티히 성당)에 달린 수도원을 신학대학교로 개조한 후 그 일부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있는 숙소에 이미 체크인한 상태였고, 그녀는 막 도착한 신참이었다. 투숙객에게만 주어지는 청동 열쇠로 열리는, 밤 8시 이후에나 기능할 청동 손잡이가 속임수인 줄 모르고 헛도는 손잡이에 당황한 그녀. 높은 쪽 녹슨 구리색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겨 은밀한 세계의 문을 열자, 그녀는 사전 요령을 터득했을 뿐인 나를 용하다는 듯 쳐다봤다.

숙소 침대 위 놓여 있던 딸기잼.

이빨을 닦고 다음날 교통편을 알아보려 리셉션에 갔다가 그녀와 두 번째 마주쳤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숙소 가까운 마카르트 광장의 모차르트 레지던스로 함께 들어서면서 그녀가 인사를 건네던 참이었다. 잘츠부르크 카드를 내밀고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한 나와 달리, 유로화를 내고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를 받은 그녀는 자신을 '에마'라 소개했다.  

에마는 모차르트 가족이 모차르트의 10여 년 유럽 음악 연주 여행 이후 이사 온 이곳에서, 요즘 피아노와 흰색 검은색 건반 뒤바뀐 듯한 포르테피아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비롯한 모차르트 생전에 썼다는 손때 묻은 악기 앞에서 오래 머무르는 동안, 나는 17세 모차르트가 빈으로 떠나기 전까지 지냈다는 이 집의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렸다.  

방들은 한결같이 작았는데, 오디오 가이드 덕에 작은 콘서트홀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음악 천재의 자취를 좇는 사람들이어서, 대개가 발소리를 죽인 채 음표를 그러모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방에서 천부적 재능을 지닌 아이들과, 어린 모차르트에게 하루 7시간 이상 건반과 바이올린 연주를 훈련시켰다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가족 초상화는 아이들의 꿈에 무심한 엄마를 나무라는 듯도 했고 생계형 달리기에 가물가물한 내 꿈을 묻는 듯도 했다.   


“모든 것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해요.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기쁨을 얻겠지만 마음이 상할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럴 때 상처 받지 말고 남자의 어리석음을 떠올리며 기도하세요. 주님 낮에는 당신 뜻대로 했으니, 밤에는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누이 난넬의 결혼식에 부치는 모차르트의 재치 있는 편지글(번역글은 <모차르트의 삶과 죽음> 참조)에 미소 지을 때, 세레나데를 들려주던 오디오에서 <난넬 7중주곡>이 흘렀다. 동생 못지않게 재능 많은 누이에게 바쳐졌던 노래라는데, 난넬은 음악가가 아니라 아내의 삶에 귀속되었다 했다. 물론 오래 전 음악과 그 음악가를 만나러 왔기에, 위대한 천재에 가려진 다른 가족의 꿈은 모른척하기로 했다.  


“정말 좋았어. 작은 음악회에 다녀온 기분이야.”

나란히 모차르트 다리를 건널 때였다. 나는 보았는데, 그녀는 들었구나.

“모차르트 음악을 무척 좋아하나 봐.”

모든 음악 천재를 동경하지, 난 피아니스트니까. 지금은 애들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만….

“와우!”

예고를 졸업한 후 구니타치 음악대학을 거쳐 대학원까지 다녔다는 에마. 못 알아듣는다 싶었던지 대학교 이름을 핸드폰에 써 주었다. 검색해 보니 이곳 출신의 실력 있는 음악가들이 줄줄이었다.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의 주인공들을 배출했던 모모가오카 음대보다 명문일, 그것도 실재하는 음대 출신이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히사이시 조가 유명한 선배네∼.”

“호호호, 맞아.”

그녀는 모차르트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OST로 유명한 선배처럼 대단한 작곡가는 아녔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곡을 만든 음악가들을 만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음악 도시 여행을 계획했고 10년 만에 그 꿈을 이루었다니, 그녀 역시 대단해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연주곡이 뭐야?”

고전음악만큼 뉴에이지 음악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애니메이션 OST가 별나게 좋아졌어. 호호호, 애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런가?”

“난 <붉은 돼지>, 음~음~.

“‘Bygone days’? 그루브한 곡을 좋아하는구나. 난 <에반게리온>의 ‘잔혹한 천사의 테제’랑 <원피스> 의 ‘We are’가 좋아. 신나잖아.”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광했던 나여서, 애니메이션 음악에 심취하던 에마여서, 둘은 금세 짝짜꿍 흥이 맞았다. 어느새 둘은 모차르트 광장을 지나 레지던츠 광장 옆, 묀히스베르크 언덕 위 하얀 숫사자처럼 앉은 호엔잘츠부르크가 바라보이는 카피텔 광장에까지 이르렀다. 야경을 보러 그 높은 곳을 오르기로 했는데, 에마가 잘츠부르크 카드를 갖고 있지 않아 푸니쿨라 대신 두 발로 걷기로 했다.

“너무 아름다워!”

정상은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오른 몇몇 사람만 차지할 수 있는 좁은 터. 꿈을 향한 집념과 사사로운 일상에의 포기, 부족을 채우는 누군가의 희생…, 꿈을 꾼다고 모두가 정상에 오르는 건 아니다.

성 아래 부복한 불빛처럼 꿈꾸는 눈빛으로 꿈을 이룬 자를 바라보던 나. 꿈꿀 수 있는 시간은 또 얼마나 짧던지,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 졸업 후 꿈이 뭔지 고민할 새 없이 통장 잔고에 맞춰 살았다. 돌아보니 꿈이었나 싶던 몇 가지는 정작 용기가 없어 한 발 못 내밀었으니, 살아가기 급급해서 살아온 대로가 꿈이겠거니 여기지 않으면 억울한 인생. 내 형편은 그랬다.


이제 내 꿈은 인생 부록쯤으로 생각할 나이, 아이들 꿈을 응원하는 엄마로 역치(易置)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 또한 만만치 않. 아직 아이들의 꿈도 정의할 수 없거니와, 극성과 방만 사이 모호한 좌표의 엄마여서 제 꿈은 제 몫이겠거니 물러나 있다가도 아가고픈 삶이 살아갈 만한지 성급히 따져보며 우왕좌왕이다. 내 삶에 준한 척도일랑 내려놓고, 이번엔 시간이 아이들의 편이길 바라야지.

그때 또다시 노래가 들렸다. 돌아보니 에마가 부르는 금시초문의 노래였다. 성 아래 만발한 도시 불빛에 어둠의 장막이 머뭇대는 동안 무대에 오른 음악가처럼 열띤 에마, 어쩌면 자작곡일지도 모를 그녀의 노래가 여물지 못한 꿈을 불러 모았다. 고향의 작은 피아니스트의 현재마저 궁금해지던 찰나, 주문을 거는 그녀에게 화답하듯 하늘의 별이 무수히 반짝였다. 많은 꿈이 해피엔딩이길, 나도 함께 반짝 웃었다. 모든 것에 양면이 있는 줄 깜박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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