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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Sep 26. 2019

황금물고기를 찾아서

_ 여행 6일차, 플리트비체

# 1 누구에게나 허락된 숲

밤의 복도를 따라 휴게실 말총머리 목소리가 기어들 때마다 베개에 머리를 짓이겼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단체 투숙객으로 왁자했던 자정 무렵, 내 침대 2층에 올랐던 여학생이 샤워 후 한 줌 빛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방문을 단단히 잠궜을 땐 공범자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참 후 말총머리가 문을 열어달라며 복도에서 난리쳤던 일, 이층 여학생이 그야말로 고양이 쥐 잡을 때마냥 사뿐 계단을 내려와 걸쇠를 풀던 일, 벌컥 문이 열리며 대판 싸움이 날 줄 알았는데 거대 그림자에 포획된 말총머리가 제 잠자리로 조용히 기어오르던 일 등이 꿈인 양 생시인 양 지나고 반짝, 아침이 밝았다.  

코를 골던 말총머리와 이번에는 상관치 않겠다는 듯 꿈쩍 않던 여학생을 남겨두고, 자다르를 떠나기 전 마지막이 될 아드리아해와 일별하러 나섰다. 이 도시 최고령자라는 성 도나트 성당 앞 돌벤치에는 푸르스름한 아침 공기가 오래된 시절을 꿈꾸고 있었고, 로마인이 섬겼다는 제우스상과 이름 모를 신상 들은 그야말로 이야기로만 남아 그조차 믿지 않을 갈매기 발 아래 놓여 있었다.

아침의 자다르는 빈집, 만들다 버려둔 장난감 레고 블록처럼 축대가 무너지고 병정 인형 하나 없는 도시였다. 중세 항구도시로 번성했던 자다르는 제4차 십자군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수라장이 되었다는데, 전쟁 전부터 지금껏 높다랗게 솟은 ‘수치의 기둥’만큼은 녹슨 고리까지 고스란히 남아 인고의 시간을 매달고 있었다.


이제 어제의 길을 되짚어 시외버스터미널. 덜덜덜 캐리어 소리가 티켓을 문의하는 사람들, 지도를 펴고 일정을 따져보는 사람들, 신문을 펼친 채 옆 사람과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 그 사이로 아침을 구하는 비둘기떼에 묻힌 채, 시동 건 버스와 도착하는 버스 사이를 들락거렸다. 아직 플리트비체행 버스는 도착 전, 카페에서 아침을 주문한 후 구석까지 들이치는 아침 해에 먼지를 들키곤 바짝 늙어버린 의자들을 바라보았다.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버려져도 개의치 않을 빈 의자들에 주인이 나타났고, 덩달아 비둘기도 많아졌다. 먹잇감을 향해 한 보 한 보 집요하게 다가서는 주름진 발, 앞뒤로 고갯짓하며 초록이었다 잿빛이었다 하는 두터운 목과 사정없이 쪼아대는 그 뾰족 부리는 도시의 무법자 혹은 호스텔을 제 집처럼 누볐던 녀석을 떠올리게 했다. 구구대며 사방을 탐하는 이것들은 정말 싫다니까.


도착했을 버스를 향해 가다 먼발치 낯익은 그림자에 벼락을 맞은 듯, 비둘기떼 모여 앉은 카페에라도 돌아갈까 망설여야 했다. 큰 모션과 소음으로 정류장을 장악하고 있 무법자는 다름 아닌 말총머리와 속닥 그녀! 더한 낭패는 그들이 한참을 먼저 도착한 나와 같은 버스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탔다는 거였다.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지, 2시간 지나 플리트비체에 내릴 때도 두 사람이 함께였다.

평일 오전 10시에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110쿠나의 입장권을 사는 줄에 얽히고설키자, 더 이상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과 한참 떨어질 생각으로 인포메이션까지 들러, 데스크 머리 희끗한 아저씨를 택해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볼펜 돌리는 솜씨가 끝내줬다.


“코스를 추천해 주세요.”

“…그러므로 C 코스가 좋겠군요. 표를 주시면 설명해 드리죠. 좋아요. 여기가 입구고, 이리로 올라간 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부근에서 숙박한다면 가장 긴 K 코스를, 5시간 이내 다닐 참이라면 H나 C 코스, 두세 시간밖에 없다면 A나 B 코스를 추천하는 모양이었다. 이 중 C 코스는 H에 비해 풍광을 바라보며 걷는다는 점에서 좋다던 아저씨는 숲에서 헤매지 않도록 표 뒤의 간략한 지도에 갈 길을 그은 다음 번호를 매겨주었다. 역시 볼펜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땡큐. 그런데 짐 보관소는 어디죠?”

어깨를 으쓱하는 인포메이션의 또 다른 안내인, 누군가 짐 보관소 열쇠를 가져가서는 몇 분째 감감 무소식이랬다.


열쇠를 기다리던 세 일행에 내가 더해졌다. 그때 인포메이션 닫힌 문 밖으로 자다르의 속닥 커플이 지나갔다. 바로 옆 화장실에 들를 모양이네. 때마침 볼일이 급했지만, 캐리어를 어쩌지 못하니 다리를 꼬았다. 숲을 향하기 전 화장실을 다니러 가는 줄도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한참 만에 다시 나타난 자다르의 속닥 커플이 하필이면 인포메이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설마~.

“여기 있어요.”

배려 없고 염치 없는 커플을 수치의 기둥에 매달았어했는데, 흥 칫 뿡이다.

인포메이션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짐 보관소. 오두막 문을 여니 빛 드는 시렁마다 노랑, 빨강, 파랑 색깔도 요란하니 다국적일 게 뻔한 캐리어와 배낭으로 빼곡했다. 두리번, 커플의 배낭을 수색해 내동댕이치려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식의 황망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허락된 숲, 사소한 심술일랑 내려놓고 가볍게 출발하기로 했다.


#2 금단의 숲

숲은 아이들의 놀이터여야 했는데, 어른들은 한사코 고향집 근처 덤불 우거진 그곳에 가지 말랬다. 어린 나와 동무들은 하는 수 없이 오징어 닮은 그림을 그리고 깨금발로 싸우거나, 전봇대 진치기 놀이를 하거나, 구슬치기 딱지놀이마저 시들해지면 숨바꼭질을 했다. 그때마다 들어가지 말라던 그곳에 숨으면 절대 술래가 될 수 없겠다 싶었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녀석들이 있었는지, 숲 속 그 땅에 숨어들었다 주인한테 발가벗겨져 페인트까지 칠해지는 바람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단 소문이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만 오갔다. 소문이 퍼질수록 그 땅의 비밀도 비대해졌다. 숨어든 녀석 중 한 아이가 수백 년 된 황금물고기를 봤댔다.


지금은 진해 내수면생태환경공원이 된 그 땅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부터 양식 어종과 그 생태 환경 등을 연구하고 관리하던 양어장, 황금물고기를 키울 법한 장소였다. 생뚱맞은 소문이었지만 초등학생인 우리 아이들 만한 나이 때라 사실을 확인하고파 안달이 났다. 하늘도 그 간절함을 눈치 챘는지, 양어장 관리소장네 큰딸과 어떻게 면을 트게 됐다.

고갯마루 정문으로 당당하게 양어장 있는 그 땅에 들어갔더니, 숲길이 한참이었다. 한시바삐 황금물고기를 찾아 아래쪽 양어장으로 뛰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 귀한 게 진짜 존재한다면 손쉽게 찾아낼 수 없을 거란 정도의 영악함은 있었다. 관리소 오두막을 지나 소장네 들러 얼음 띄운 미숫가루를 홀짝이며, 그 댁 큰딸이 골칫거리라던 남동생을 우선 따돌리기로 했다.


숲속에서의 숨바꼭질은 기막힌 아이디어였으나, 나보다 오래도록 숲을 벗한 남자아이를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어린 녀석이 나무 높은 곳을 타고 올라 도망하려던 우리를 정찰하고, 죽은 나무둥치에 숨어들었다 달아나려던 누이들의 뒷덜미를 잡을 줄이야. 결국 작은 바구니를 챙겨들었을 때 날다람쥐 같던 남동생을 제 엄마 품에 떨굴 수 있었다.

숲길은 생각보다 험해서 오르는가 싶으면 내려가고 내려가는가 싶으면 다시 올랐다 꺾였다. 가던 길에 고사리란 건 왜 그리 많던지, 친구가 된 큰딸은 그것도 뜯자 달겨 들어 시간을 지체했다. 얼른 어장을 둘러보고픈 마음도 모르고 숲길은 이어졌고, 여기저기 송충이, 거미 등속의 숲속 친구들에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마침내 쑥색 들판, 쑥이든 풀이든 닥치는 대로 뜯고 그 옆으로 난 어장에 들어야 했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친구를 달래 단속하는 이 없는 어장에 잠입, 한두 군데가 아닌 어장을 서로 떨어져 살피기로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고, 고기들은 팔뚝만하니 어시장에서 본 듯 아닌 듯 갈색 주황색 검은색….


그 후로 몇 번이고 날다람쥐 남동생과 놀아주고 숲길을 헤맸으나, 소금쟁이와 물방개와 황금빛 물고기 정도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마저 친구네가 이사 가면서 접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땅은 다시 금단의 구역으로 돌아앉았다.

황금물고기는, 그러니까 내 인생을 희롱한 첫 번째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이런저런 것으로 매번 바뀌었지만, 황금물고기만큼 나를 들쑤신 게 또 있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숲을 찾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3 삶이란 나를 키우는 숲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또한 크로아티아에 속한 땅이라, 오래 전 로마인을 거쳐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등 많은 나라의 차지가 되곤 했단다. 그들 국경이야 어찌됐든 상관없이, 수천 년 동안 카르스트 지표면으로 흐르던 강물은 석회암과 백악의 층적에 의해 막혔다 다시 흐르고 막히길 거듭하여 에머랄드 크고 작은 호수 16개를 품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입구 표지판을 대충 훑고 얼마 걷지 않아 1,280미터 벼랑 아래, 나무줄기를 기어가는 개미떼처럼 색색의 인간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꿈틀대는 선은 갈라져 우측, 이곳에서 가장 높고도 많은 수량을 자랑한다는 벨리키 슬랩(폭포)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갈림길마다 폭포 이름 및 방향을 알려주는 팻말이 있어 사실상 헤맬 일 없는 그곳에서, 해발 630미터라는 벨리키 슬랩만큼은 코스에서 살짝 빗겨나 있었다.


벨리키 슬랩을 돌아나와 카로데르바츠, 가바노바츠, 밀라노바츠 호수를 지나 코즈악 호수까지 차례로 올랐다. 인포메이션에서 추천한 대로, P3라 표기된 선착장에서 점심을 먹고 배에 올라 P2로 이동한 후 다시 걷기로 했다. 그러면 몇몇 작은 호수를 지나고 부루게티, 그라딘스코, 갈로바츠, 오크루글랴크 호수까지 내처 걸은 후 S3라 표시된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서 출입구 2를 통과, 다시 출발점인 출입구 1에 도착하게 된다. 계획대로라면 늦은 오후 예약해둔 겟바이버스를 타고 자그레브까지 이동, 한인민박에서 그날 밤을 지낼 것이다.   

그런데 폭 1미터 나무 데크로 이끼가 한창이어서 길이 무척 미끄럽거니와, 한국 숲길에 으레 놓이던 난간 가름막 하나 없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수학여행을 온 현지 학생들, 갓난아이를 엎은 젊은 부부 등 사람들에 막혀 제 보폭대로 걷기 쉽지 않았다. 까짓것, 버스를 놓친들 어떠랴. 앞질러 서두르기보다 천천히 걷고 시시때때 머무르자,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장소에 마음을 종종 빼앗기곤 했다.

숲을 다시 만난 건 우연이었다. 집안 난리에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뒤늦게 들어간 직장생활에 무릎이 꺾일 때, 주접을 떨어도 부끄럽지 않을 곳이 필요했다. 가족의 요구가 들끓는 집은 더이상 사적 공간이 아녔기에, 무작정 버스에 올라 사람 드문 정거장에 내렸다. 숲길이 시작되는 곳, 들짐승처럼 떠돌기 적격인 장소였다.

북한산 중턱 승가사인지, 뚝 떨어질 듯 걸터앉은 문수사인지, 아니면 절을 떠돌다 꼭대기 바위에 앉은 노승에게서인지, 목탁소리가 들릴 때까지 많은 날이 지났다. 다시 몇 해가 지났고, 나를 다독여준 숲을 마주할 여유도 생겼다. 그때 개나리 진달래 화관 들쓰던 봄의 숲은 갓난아이처럼 경이로웠고, 한참 살 올라 풀마저 빼곡하니 길은 사정없이 좁아지고 매미와 뻐꾸기와 뜸부기 저 잘났다 짖어대는 여름 숲은 날뛰는 청년만 같았다. 또 제멋 부릴 줄 아는 가을 숲 지나, 잎 하나 없는 가지로 흰눈 짊어지던 겨울 숲은 저물어가는 노년만 같았다. 그렇게 숲은 다시 봄을 살고,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 순리대로, 앞으로 난 길을 받아들이며 살아야겠다고, 하산하는 길마다 다짐했다.


“오우, 유진!”

4시간 숲길이 끝날 무렵, 스플리트에서 하루를 함께한 프로그래머 인도 여인을 다시 만났다. 플리트비체 트레킹을 권했는데, 자그레브로 곧장 오르려다 이곳에 들렀다는 그녀도 C 코스를 택했단다.

“Nice to meet you.”

이미 한바탕 트레킹을 즐긴 사람마냥 티셔츠 흥건하게 땀에 젖은 오동통 그녀의 지각생 남편이 뒤이어 손을 내밀었다. 내 얘길 많이 들었다는데, 도대체 어떤 얘기였을까? 남편 뒷담화 말고 별 나눈 게 없어 쑥스러워하며, 가을이 한참 먼 부부를 가을 속에서  배웅했다.

숲은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거였다. 내 안에, 황금물고기를 품었던 숲으로부터 오르락내리락 길을 내어 한창 가을로 물든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천천히 그 숲길을 다 걷고 나면 나는 좀 더 단단해질 것이란 생각이 또 다른 무지개마냥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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