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쓰는 비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조만간 새소리에 종소리에 아무튼 소리 들이 더해져 눈을 뜨지 않고는 못 배길 터. 새벽 6시, 한국에서처럼 우유를 배달하고 신문을 돌리던 오토바이 소리일랑 들리지 않았지만, 다시 잠들긴 애매한 시간.
말똥말똥, 아침을 구할 겸, 전날 인도 여인과 쏘다녔던 골목의 동틀 무렵도 살필 겸, 외출을 감행했다. 갈래갈래 이어진 골목 들을 넘나든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벌써 성곽 밖, 지난밤 어지러이 흥청대던 리바 거리도, 세계적 브랜드 쇼핑몰로 휘황찬란하던 마르몬토바 거리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잠들어 있었다.
인위적 조명에 기대었던 현대 문명이 몸을 낮췄으니, 오래도록 이 도시를 점령했던 과거가 위엄을 과시할 차례. 그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방이었다는, 지금은 텅 비어 내 그림자가 비석처럼 길게 늘어뜨려진 공간에서 이날의 태양을 맞기로 했다.
"야옹~"
한 줌 남은 어둠인 줄 착각했던 검은 고양이, 이럭저럭 버려진 채로도 좋았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묻지 않던 검은 고양이의 출현은 놀랄 일이 아녔다. 하루여서 아쉬운 스플리트, 무르익기 전이라도 좋았던 인연, 무사태평 여행하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이 모든 걸 묵사발내며 중국인 관광객들이 요란스레 들이닥쳤고, 검은고양이와 나는 각자의 다음을 준비하러 떠났다.
스플리트처럼 이날의 도시 자다르도 한 달 여행의 출발지와 종착지를 잇는 선의 한 점일 뿐이었다. 그런데 마린보이 차림의 한 호스텔이 눈길을 끌었다. 아무것도 아녀도 내게 특별해지면 여행지, 의도한 점이 된다.
“안녕, 혼자 여행해?”
처음이 어려울 뿐, 여행하는 아무에게 말을 건넸다.
“후훗. 그러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여기 나쁜 남자랑 같이 다녀.”
건너편 동양 여인의 옆자리에는 흰머리가 성긴 서양인 남자가 익살스러운 윙크를 보냈다.
“남.편?”
“노, 남자친구!”
마주 웃는 커플. 웃는 포인트가 같다는 건 마음이 통한다는 것. 청춘의 단어로 표현하기 다소 연배가 있어 보였지만, 까불까불 농담도 잘 통하는 두 사람에 끼어 함께 젊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내 표정은 속을 터도 괜찮을 고양이 같았을까. 성급히 묻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어떻게 이 버스에 동석하게 됐는지 듣게 되었다. 이로써 홍콩에서 한 직장에 다니는 부부이길 꺼리는 이 커플이 10년째 함께 살고 있고, 동거기념일 즈음하여 2주씩 여행을 다니던 차에 올해는 동유럽을 다니러 왔다 그날 자다르 석양을 보러 가는 길임을 알게 됐다. 뜨거워지는 한순간을 위해 모두가 벅찬 기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쯤 듣고 가족이 그리운 홀로 여행객이라 마냥 부럽다 말했다. 덜컥, 이틀간 어떤 가족과도 카톡을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에 야속함이 자석 철가루 엉기듯 들러붙었다.
“괜. 찮. 아.”
말을 꺼내고 보니 진짜 그리웠고, 내 처지가 무거워져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던 모양이다. 홍콩 여인이 서툴지만 또박또박 한국어로 토닥였다. 억지스럽게 입꼬리를 치올렸으나, 예삿일이 아닐 수 있는 무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뭔가 놓친 것 같아, 선글라스를 벗고 핸드폰을 자세히 살피기로 했다.
“아 유 오케이?”
아직도 궁상맞은 얼굴이 남았나, 함박웃음을 띠고 힘차게 답했다.
“아임 오, 케이!”
하지만 묵묵부답의 핸드폰에는 오케이라 쓸 수 없었다.
차는 세 시간에 다다를 무렵 자다르 버스터미널에 멈춰 섰고, 잠시나마 일행이 된 세 사람은 시내버스를 타고 자다르 구시가지로 향했다. 동안 남자의 유치하달 수 있는 몸 개그에 킥킥대며 둥싯둥싯 유람선을 신호 삼아 내려섰다. 곧장 자다르 구시가지 동쪽 ‘바다의 문’에 들어서자, 갑작스레 덤비는 취객처럼 도심의 왁자함이 달려들었다.
놀라움을 과장되게 표하던 나쁜(?) 남자와 홍콩 여인은 다른 골목으로 떠나갔고, 청춘이 가시지 않은 그들을 따라 도심의 흥도 비칠대며 멀어져 갔다. 이로써 아직 절망이 될지 희망이 될지 모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범벅된 파티룸에 홀로, 그야말로 홀로 남겨진 기분으로 서 있었다.
#2 자유분방한 청춘, 천사호의 룸메이트
캐리어와 다시 한 조가 되어, 전 객실 바다를 바라본다는 이날의 숙소 ‘부티크 호스텔 포럼’으로 나아갔다. 로마 포럼을 마주하고 그 너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얗고 직사각형인 건물. 그 위치가 마음에 쏙 들었고, 외양도 홈페이지 소개대로 늠름했다. 사진처럼 1층 카페테리아는 활달했으며, 룸만 약속대로라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입구가 어디람? 몇 번의 공회전, 짐작하던 건물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성 도나트 성당과 마치 한 쌍처럼 서 있던 성 아나스타시아 대성당 종탑 아래를 돌고 돌았다. 이곳 전통 수공예 자수를 팔던 거리의 노파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세 번째 회전 무렵 어줍짢은 눈인사를 보냈더니, 희미한 미소로 검지를 치켜들었다. 뿅, 보이지 않던 쪽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선 호스텔은 영락없이 댄디한 마린보이였다. 흰 벽에 도배된 파란 줄무늬도 그렇거니와, 4인용 도미토리 룸의 주황색 침대틀 위로 하얀 보 덧씌워진 매트리스가 똑떨어지게 깔끔했다. 무엇보다 호스텔은 청년다운 호방함으로 아드리아해를 통째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엔 녹주석으로 반짝대는 아드리아해가 시시때때 관능을 뽐내는 여인처럼 열린 창 한가득 차올라 있었다.
벌렁, 침대에 누워 선글라스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붙박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삽시간에 다시 일어나 앉았다. 뜬금없이 하얀 도마 위에 오른 붉은 도미가 떠올랐다. 홍콩 동거남녀가 괜찮냐 물었던 건 붉은 비늘이 낀 듯 오른쪽 눈동자가 온통 충혈됐기 때문이었다.
지구 저 너머, 소아과를 운영하는 고향 친구에게 다짜고짜 카톡을 보냈다.
‘유럽이야.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충혈 제거제가 있다면 가르쳐 주시게.’/‘그런 안약은 스테로이드제가 들어 있어 의사 처방 없이 구하기 어려워. 크게 불편함 없다면 그냥 다녀봐. 시간이 지나 충혈이 사라질 때까지 입 대는 사람들은 많겠다만….’
여기 어디 입댈 사람 누가 있을까. 어쩔 수 없다 싶어 다시 몸을 뉘였다.
“리얼리? 나도 로마로 가.”
건너편 이층침대에서 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소곤소곤, 속닥속닥. 언제부터 저기 있었담. 문제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떠들 기세라는 데 있었다. 이로써 낮잠은 물 건너갔다. 그러고 보니 훤히 열린 방 창문으로 들락날락하던 담배 연기는 1층 카페에서가 아니었다.
“휴게실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속닥대는 청춘을 빤히 쳐다보며, 눈 빨간 도미 아니 내가 입을 열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말총머리 남자아이와, 한낮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과 끈적하게 붙어 있던 여자아이가 너무 쉽게 “오케이”랬다. 그런데 이후로도 소곤소곤, 속닥속닥 변함이 없었다. 호스텔 다인실에서 배드 버그만큼 무서운 게 배려 없는 룸메이트라더니, 난 오케이가 아니라고!
속닥 커플에 내쫓기다시피 거리로 나와, 로마의 도시였다 베네치아의 속국이었다 다시 이 나라 저 도시로 편입되길 거듭했던 속 시끄러웠을 자다르 구시가지를 둘러봤다. 한 보, 한 보, 천천히 내디뎌도 어쩔 수 없이 사람과 부딪히는 주말. 관광객과 나들이하는 현지인들로 부비작대는 시로카 대로의 하고 많은 카페마다 빈자리가 드물었다.
여느 도시처럼 카페 다음 브랜드샵, 약국 겸한 슈퍼마켓, 다시 카페 다음 브랜드샵…. 심심할 만큼 뻔한 대로를 걷다 남쪽 ‘육지의 문’에 다다랐다. 문을 나서 다리 건너 신시가지까지 거닐까 하다, 자전거도 빌리지 못했고 충혈된 눈으로 여기저기 쏘다니기도 곤란해 돌아섰다. 문 위 옛 베니스공화국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도시의 번영을 수호한다는 사자 덕분인지, 오후의 대로는 고릿적보다 훨씬 늘어난 사람들과 차들로 혼잡했다. 아무래도 16세기 우물 광장은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에 대비해 자다르의 식수를 공급하려 만들었다는 유적을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졸도할 판이었다.
가까스로 자리한 카페에서 배를 채우고, 지도를 펼쳤다. 바다로 불쑥 고개를 내민 자다르를 찾고, 골목과 골목을 손으로 좇았다. 해질녘 ‘바다 오르간’과 ‘태양의 인사’를 한꺼번에 수확할 요지를 눈으로 익힐 생각이었다. 로마 시절 석조까지 무너뜨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다르 재건을 위해 세계적 크로아티아 설치예술가라는 니콜라 바시츠가 2005년, 2008년에 각각 만든 작품이랬다. 전날 비바람이 지나간 높고 맑은 하늘도 드라마틱한 저녁 무대를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포장하고 숙소로 향했다. 오전의 휴식을 망친 속닥속닥 커플로부터 급히 달아나느라 카메라를 놓쳤다. 2층 복도 막바지의 1004호(천사호!), 카드키를 댔다. 삐익 소리와 함께 고요한 숙소에서 담배연기가 몰아쳤다. 이런 망할!
결국 매니저에게 방을 바꿔 달라 요청했다. 하지만 객실 예약 상황을 띄운 컴퓨터 화면이 붉은 동그라미로 가득했다. 유명 호스텔에 비수기는 없었다. 입을 삐쭉 내민 동양인을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던 매니저는 검게 잘 자란 턱수염을 가지런히 매만지다 성큼,계단을 올랐다.
그는 담배 연기 자욱한 천사호를 확인하고 창문과 방문을 마주 열어 환기시킨 후 다시 성큼, 나를 앞질렀다. 말총머리 녀석이여자애들에 둘러싸인 채 휴게실에서 희희덕대고 있다며 내가 고자질했다.
“노 스모킹!”
원 투 쓰리, 호스텔 이용 수칙을 읊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계단을 내려섰다. 바깥은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총머리의 즐거운 한때를 납작코로 만든 건 아닐까 돌아보았지만, 두드러지게 창문 활짝 펼친 내 룸이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있을 따름이었다. 못된 송아지를 혼내준 거야. 아무렴, 젊음을 시기한 게 절대 아니야.
#3 모두의 청춘
“스톱! 모자가 날아갔어!”
“미안.”
네 녀석이 미안할 건 뭐람.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시속 50km는 족히 달리던 오토바이 뒤에 앉았던 내 모자가 나동그라지던 바람에, 이 차 저 차 쌩쌩 몰아가는 대로 엎치락뒤치락 모자를 쫓느라 필사적이었던 나. 지난밤 태국 방콕에서 밤 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올라와 숙소에 짐만 던진 채 관광을 나온 바람에 쑥부쟁이처럼 들쑥날쑥 머리를 감추려 그랬던 것 같다.
다음날 트레킹을 예약하고 시내 구경을 하던 차, 왓 판타오와 왓 체디 루앙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두 사원에서 마주친 현지 청년과 낯을 트자마자 시작한 오토바이 투어였다. 핸드폰이며 인터넷 원활한 컴퓨터가 드물던 시절, 대책 없이 쏘다니던 나는 사원을 스케치하던 청년에게 밥값 정도만 내기로 하고 치앙마이 가이드를 부탁했다.
태국 제2도시인 치앙마이의 3대 사원이라는 왓 프라싱마저 관광한 후 청년은 멀리 왓 프라탓 도이수텝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마침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대학 동기를 만나러 가야 한댔다. 그를 비롯한 치앙마이 정치행정학과 대학생들과 담당 교수님과의 세미나인지 수업인지가 선약인지라 캠퍼스로 달리던 차, 캡 모자가 어딘 줄도 모르면서 날아갈 뻔했다.
청년이 들어서자 강의실은 잠깐 질책하는 분위기였으나, 내게 쏠리던 시선이 거둬들여지면서 금방 차분해졌다. 강의실 뒤쪽의 맨 구석진 의자와 한 몸이 된 나는 직사각형 도시 모형에 불이 들어오자, 교수님 통솔 하에 이 친구 저 친구의 대화가 오가고 진지하게 고개 까닥거리며 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때는 2월, 짐작컨대 치앙마이 꽃 축제에 함께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닌들 상관없이, 달뜨고 의욕 넘치는 청춘들이 교수님과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게 몹시 부러웠다. 시와 소설을 공부하러 들어갔던 강의실보다, 최루탄과 현수막과 대자보가 난리법석이었던 교정에서 안녕치 못한 청춘을 보냈던 까닭이다.
청년의 먹성은 과제 때 보여준 성실함만큼이나 꽤 좋았다. 대학 내 식당이었던 것 같은데, 지나치게 매운 맛에 얼떨떨해진 내가 접시를 내주었더니 두 말 않고 받아먹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왓 프라탓 도이수텝까지 데려다줬다. 어쩐 일인지 중도에 오토바이를 두고 오픈 트럭을 타야 했고, 기막히게 높은 300개 즈음의 계단을 오른 후에야 황금 사원에 도착했다. 미인대회에 나갔다면 틀림없이 입상했을 대학 동기와 인사를 나눈 후, 이전 사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청년의 장황한 설명을 들었다. 물론 기억하는 건 어지간히 열심히 공부하는 녀석이구나 하는, 청년에 대한 호의적 감상뿐이다.
다시 대학 교정으로 돌아온 우리는 음료수를 사서 앙깨우 호수를 바라보고 앉았다. 목감기가 잦아 더우나 추우나 스카프를 맸던 나는 태국 북부의 대단찮은 2월, 지는 해를 가릴 겸 모자 위에 스카프를 풀어 묶었다. 어째 하는 짓이 두서없는 아줌마 같았나, 대놓고 깔깔대던 청년은 그제야몇 살인지 물어보았다.
“비밀, 너보다 한참 누나야.”
갓 스무 살 지난 청년은 서른 살이 넘었다는 나의 뒤늦은 대답조차 미심쩍어하며, 엉뚱한 숫자만 떠올렸다.
“아까 무슨 소원 빌었니? 30개 소원의 종을 한참 치던데?”
“그건 나도 비밀.”
비밀은 함정 같은 거였다. 각자의 비밀에 갇히자마자, 세상 어디에도 없을 고요한 저녁이 차곡차곡 우리를 에워쌌다.
다음날 나는 예정된 트레킹 코스대로 코끼리와 뗏목을 타고 이곳 소수민족인 카렌족 마을까지 탐방한 후 또 다시 밤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내려갔다. 새 친구들을 만났다 헤어졌고, 경유하던 홍콩에서 경비가 모자라 나이팅게일 자격증을 딴 한국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했다.
10여 일 여행 후 회사 컴퓨터를 켰더니, 오토바이 씨로 기억에 남은 청년의 이메일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내가 밤도둑처럼 떠나는 줄도 모르고 다음날 숙소를 다시 찾아왔다는 얘기와, 배낭여행하던 나처럼 언젠가 세상을 떠돌고 싶다는 청춘의 희망사항이 쓰여져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미국인, 네팔인 등과는 인사동 사과나무에서 회합을 가졌고 홍콩에서 진 빚은 광화문에서 갚았지만, 오토바이 씨와의 펜팔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치른 마지막 배낭 여행이었다.
활짝 폈다는 것도 몰랐지만, 어느새 지고 있을 줄이야. 그 저녁에 닿았던 마음이 부우우우, 호르륵호륵, 후후후, 자다르 해변의 계단 아래 수직으로 꽂혀 있다는 27개 오르간 파이프 소리에 흩어졌다.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간헐적으로 우짖는 소리가 마치 바다 깊이 동물원 우리에 갇힌 청춘의 비명 같았다.
큰 배와 작은 배가 수시로 지나던 길에 새들이 무리 지어 둥지로 날아들 무렵, 비로소 해가 떨어졌다. 박물의 도시에서 매일같이 마지막인 양 불사르는 해를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과, 꺼져가는 하루가 아쉬운 듯 꼭 껴안은 연인들과,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랜 팝송을 하모니카로 불어대던 남자. 이들 앞에서 벌겋게 달았던 하늘과 바다가 서서히 잿더미로 변해갔다. 찬란한 건 찰나, 그래서 더욱 붙잡고 싶은 걸까.
내 마지막 청춘 여행 후 태국이 정치 파동을 겪을 때 오토바이 씨가 걱정됐지만, 그 이후의 삶을 살아내느라 연락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방송국 PD였던 선배가 촬영차 태국 현지 코디네이터가 필요하다 하여 이메일로 연락해 보았지만, 달아난 청춘처럼 수취인 불가였다.
매캐한 매연 냄새와 알싸한 쥐똥고추와 함께 젊었던 모습 그대로 앨범에 남아 있는 오토바이 씨. 그도 나만큼 주름이 졌겠지. 우리 모두의 청춘이 그렇듯, 지치고 힘들 때 누구에게나 찬란한 한때를 기억하며 웃고 살아가리라 그저 믿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