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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Sep 21. 2019

베지테리언과의 반나절

_ 여행 4일차, 스플리트

#1 머무는 삶

‘이런, 야단났네.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

숙소를 나서려던 찰나 한국에서 예약한 버스 티켓 복사본을 꺼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곤 캐리어를 열려 했으나 이게 웬일, 비밀번호가 까마득했다. 오전 8시 버스는 출발할 참인데 이 일을 어쩐다? 때마침 아침 종소리가 화급하게 울려댔다. 뎅뎅뎅뎅뎅뎅뎅.

번쩍 눈을 뜨니 오전 7시, 꿈이어서 다행이었고 캐리어의 비밀번호가 기억나 큰숨을 내쉬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비에 조바심을 마저 털고, 버스 티켓 복사본은 백팩으로 옮겼다. 며칠간 여행의 흔적마저 모조리 캐리어에 쓸어넣은 후 더 이상 나를 수용할 수 없는 숙소의 방문을 쾅, 닫았다.

“I’ll miss you.”

물어보면 곧이곧대로 답하던 사이에서 허기진 객에게 밤으로 요구르트와 과일을 챙겨주고 컵라면을 선물하던 사이가 되고 보니, 으례적이었을 호텔 매니저의 인사는 믿고 싶을 만큼 따뜻하게 여겨졌다. 분명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리셉션 담당답게 객실 청소를 명할 테고 새 침대보를 갈아 내 머리카락 한 올 허락치 않겠다만, 이곳에서의 3일 또한 내 생(生)이어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내내 남겨진 물건이 있는 양 돌아보다 말다 하며 걸었다.   

기름한 크로아티아의 남단 두브로브니크에서 수도 자그레브까지, 도시 간 이동을 책임질 '겟바이버스'는 버스터미널에서 진작 기다리고 있었다. 정시에 출발하지 않는다는 악명이 높아 저 멀리 폴란드에서처럼 플릭스버스로 예약할까 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다양한 출․도착 시간이 배정되어 있고 예약 시스템마저 간단해 두 번 생각치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저벅저벅, 버스 안 엄중한 신발 소리에 잠을 깨니 여권 심사 중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스플리트까지 4시간, 그 사이 네움이란 지역에서였다. 그러니까 두브로브니크와 본토 사이를 가르며 삐죽이 등장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해안 국경 도시였다. 얼마 전까지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여서인지, 크로아티아 버스에 오른 무장한 타국의 경찰이 여권을 보여 달라 내미는 맨손에도 쫀득쫀득 긴장감이 맴돌았다.

등줄기 땀이 흐르는 기시감. 잠이 덜 깼나, 여권을 어디에 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두브로브니크를 들고 날 때 두 번의 여권 심사가 있단 얘기를 들었던 터라 1층 짐칸의 캐리어에 넣지 않은 게 분명한데, 백팩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보다 못한 옆자리 아가씨가 헝클어진 수세미 다발이 된 백팩 속 짐을 하나씩 꺼내보라 권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다시 카메라와 핸드폰을, 다시 약봉지와 치약과 칫솔 등 여행자의 삶을 증언하는 내 측근을 몽땅 옆자리로 넘겼다. 꿈이라면 얼른 깨면 좋았을 것을, 접혀져 백팩 바닥에 납작하게 누웠던 버스 티켓 복사본 사이에 녹색 여권이 끼어 있었다. 에휴~.


국경에 억류되는 단 하나의 불상사 없이, 버스는 다시 기나긴 해안선을 내달렸다. 약 25km를 지나면 또 크로아티아, 국경이라 해봤자 여권 심사를 제외하고 별다른 표식은 없었다. 절경의 휴양도시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같은 나라라 해도 무방했다.

“Are you South Korean?”

붉은 여권을 쥔 옆자리 중국 아가씨의 '남한인이냐'는 질문이 뭐 하나 잘못된 건 없었지만, 가시에 찔린 양 뜨끔했다.

“Yes. I am from Seoul, Korea.”

말머리를 돌리려는 대답이었지만, 사진을 찍던 앞자리 친구에게 건네는 오르락내리락 중국어는 호외라도 전하는 말투였다. 장기 여행 중 피로감이 쌓이고 취향 차이 등으로 다투어 앞뒤 창가 자리로 떨어져 앉은 줄 알았는데, 순전히 오해였다. 풍경이 덤인 여행길이었다.

“오빠가 서울에 있어요. 동국대학교 학생이거든요.”

순식간에 서울 4계절을 지나는, 옆자리 아가씨를 빼닮은 젊은 남자.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된 남자의 시선 뒤로 내가 모르는 서울의 낮과 밤이 찍혀 있었다. 잘 차려진 밥상은 도대체 어느 식당인지, 눈요기하던 두 친구가 조만간 작심한 서울 여행이 나 또한 궁금해졌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던 30여 년 전, 대학 입학 때문에 상경한 이래 서울은 늘 불친절했다. 고속터미널에 내리면 숨쉬기 곤란했던 탁한 공기가 그랬고, 지옥철이라 불리던 출퇴근길이 그랬다. 광화문과 종로 네거리가 만만해졌다 싶더니 마이너스 카드 청구서가 날아왔고, 고향보다 어마하게 높은 집값에 곧잘 질리곤 했다.

이제 나보다 한참 늙어버린 서울은 밭은기침을 하듯 예전보다 더한 미세먼지를 토하고 여전히 고공비행하는 생활비로 심술을 부리지만, 어느새 고향보다 10년을 더 살아버린 도시가 되었다. 지나가듯 도착한 도시였는데, 어느새 내 생(生)이 되어 버린 서울.     

“서울은 화장실도, 마시는 물도 공짜라죠? 하루빨리 서울에 가보고 싶어요.”

휴게실 화장실을 다니러가며 3쿠나를 준비하던 차, 여행자의 마음에 새겨진 서울은 특별했다. 생활인으로서 겪은 서울과 다른 지명 같았다.

버스는 드문드문 멈추었다 출발하고, 때마침 대화가 토막 났을 즈음 이곳 백발 어르신들을 태우고 다시 달렸다. 주말인지라 외국인들로 꽉 차버린 버스에서, 어르신들은 통로에 서 있어야 하는 불편에 대해 언짢아하시는 듯했다. 통로 쪽 좌석에 앉은 나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렇다고 자리를 내드리는 것도 어쭙잖아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여기저기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며 핸드폰이며 찰칵찰칵 부산을 떠는 통에 창밖을 보니, 비 때문에 툴툴대던 길에 말갛게 해가 나더니 스타라도 되는 양 담청색 바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뷰티풀, 뷰티풀, 샷샷샷!”

노부부는 랩하듯 즐겁게 관광객을 부추기곤 스플리트 도착 전 마카르스카 버스터미널에서 내리셨다. 내가 그 입장이었대도 그랬을까 모르겠다. 종종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받아들이시는 건지,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과 지나는 객(客)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2 떠도는 삶

크로아티아 여행을 결심했을 땐 빛의 두브로브니크와 숲의 플리트비체만 들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시들은 멀고 길었다. 그 점과 점을 잇다 보니 스플리트를 거치게 되었고, 마침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노년의 궁을 지었다길래 1박을 결심했다. 물론 근처 라벤더밭 흐드러질 흐바르섬 투어나 아드리아해의 블루 케어 투어는 배 멀미 때문에 엄두도 내지 않았다.

깊은 인연을 기대하기보다 스윽 지나갈 도시였던 스플리트는 로마인이 기초를 닦은 이래 통상의 중심지여서인지, 두브로브니크보다 편편하니 제법 구획이 잘되어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바다를 좌측에 두고 몇 분 걷자 구시가지, 이를 둘러싼 성곽의 동서남북으로 난 성문 때문에 길을 잃고 크게 당황할 일도 없겠다.  

하여 황제가 바다를 면해 지었다는 성의 남문에서 구시가지를 관통해 북문으로 곧장 가려다, 동문 있는 성벽을 따라 재래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얼마 못 가 오르막 돌투성이 길바닥에 한숨 짓고, 납작복숭아니 길쭉 당근 등 지중해 야채 향 따위 맡기는커녕 구석구석 생활을 꾸리는 리어카에 미안해하며 허세 부린 걸 후회했다.    


찌이이이이.

차임벨이 힘을 다 썼을 무렵 중년의 아저씨가 마중을 나와 2층까지 캐리어를 옮겨주었다. 마땅한 몫을 지불하고 내게 할당된 큼지막한 청동색 열쇠를 방문 구멍에 맞추자, 창밖으로 초록 나무들이 로마 병정처럼 도열해 있는 방이 또한 지나갈 객을 맞았다.  

창 좌측으로는 쓸데없이 더블침대가, 우측 욕실에는 최신 LG 드럼 세탁기와 샤워 부스가, 그 사이 벽에 기대어 흠집마저 고고한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그 여닫이 서랍을 열면 최신형 싱글 냉장고가 들어 있었는데, 오래된 것과 새 것이 기묘하게 어울리는 스플리트다운 숙소였다.

숙소에서 받은 종이 지도를 펼치고 도시의 생김새를 가늠하느라 발만큼 눈이 바쁜 시간, 사람을 사귀듯 여행하는 도시의 처음은 물샐틈없이 깍쟁이 같다가도 살아낸 과거를 알아가다 보면 제법 친숙해진다. 그런 면에서 스플리트는 매우 사교적이어서, 숙소 가까이 북문에 놓인 8.5m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이 까막눈이라도 지나칠 수 없는 큰 인사를 건넸다.

라틴어로 예배하던 시절 바티칸 교황청을 설득, 모국어인 크로아티아어 미사를 가능케 함으로써 평민에게도 복음을 전한 주교의 거대 동상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반질반질 닳아 있었다. 내세의 복을 설파했을 그에게 현세의 복을 바라는 객이 많이도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 정면 북문을 지나 성으로 곧장 들면 성 돔니우스 대성당이 나온다.


대성당 앞 열주 광장은 노쇠한 스핑크스가 한눈을 파는 틈에 황제나 주피터 신에겐 무관심한 룩소르 카페의 손님으로 왁자했다. 황제의 묘가 있다는 성당 예배당도 결혼식이 치러지느라 동네방네 손님으로 넘쳐났다. 오른편으로 꺾어들어 황제 알현실, 4명의 남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클라파’라는, 이곳 전통 음악 합창단이 도레미를 맞추고 있었다.

먼저 테너가 입을 뗐다. 또 다른 테너와 바리톤과 베이스의 목소리가 쫓고 쫓기듯 높고 낮은 화음을 이루며 원형 돔을 타고 뻥 뚫린 둥근 천장으로 뻗어 올랐다. 가톨릭을 박해했던 황제는 과거의 묘에 갇혔고, 신을 찬미하는 아카펠라는 맥락 닿지 않는 외국인마저 감동시켰다.

남문 계단으로 내려서니 지하궁전, 도시의 과거에 둥지를 튼 수레 위 보라색 라벤더 방향제와 붉은 산호 팔찌 등 기념품이 먼지처럼 놓여 있었다. 어둠에 몸을 감춘 상인들은 권태와 피곤에 절은 낯빛이었다. 야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그곳엔 여행자의 걸음을 멈추게 할 현재가 없었고, 여행자라 이번만큼은 띄어쓰기로 했다.     



#3 어디에나 존재하는 삶

뜨거운 정오를 빙자해, 리바 거리 한 노천카페에 눌러앉았다. 느릿한 식사와 독서를 방해하듯 정면에서 끼어드는 해에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더니, 흑백 영화를 보듯 눈앞이 어룽거렸다.

건너편 연인은 작정하고 로맨스를 찍고 있었고, 맞은편 세 명의 가족은 단란함보다 먹고 사는 게 본질인 식구를 드러낼 양 각자의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 테이블 사이를 마치 익숙한 골목길 산책하듯 돌고 돌아 수북한 담배꽁초에 또 하나를 부비는 노인에게 다가간 웨이터가 솜씨 좋게 맥주병을 내려놓는 순간, 멀리 배경처럼 안경 낀 작은 여인이 보였다.


“안녕, 나 기억해?”/ “숙소 계단에서 봤던…? 안녕.”

“혼자라면…, 같이 다닐래?”/“좋아.”

그녀의 왼쪽 어깨로 부는 바닷바람이 극성맞아 모자 챙을 움켜쥔 채 주말을 즐기는 커플로 붐비는 리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길의 끄트머리 성 프란시스 교회로 들어서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도를 올렸고, 다시 교회를 나와 우측으로 난 돌계단을 밟으며 마리얀 언덕을 올랐다. 약속한 바 없지만 전망 좋기로 소문난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자들의 동선은 닮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리즘 프로그래머라니, 멋지다.”

유학 중 만난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다는 여인은 나이를 짐작하기엔 너무 앳되었다. 아무려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 줌파 라히리를 좋아한다 말했다.  

“미안. 소설책은 잘 읽지 않아.”

아까의 해가 우리를 따라와 삐뚤빼뚤 마리얀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은 음영으로 갈라지고, 우리의 대화처럼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놀라지 마. 이곳 마리얀 언덕은 우리나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돼서 한국인이 굉장히 많을 거야.”

“근사한 볼거리가 있나 보구나?”

“석양이 끝내준대.”

그때 시계를 확인하던 여인이 갸웃했다. 해가 지기엔 이른 4시, 그래도 언덕에서 바라본 풍광은 마음에 쏙 들었나 보았다.

“그뤠잇!”

예상대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대개가 한국어를 나누고 있었다. 국적으로나 직업으로나 나이로나 당최 이어지지 않는 두 여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펼쳐진 전망을 눈에 담고, 더 높이 성 니콜라스 교회까지 좀 더 오르기로 했다. 굳게 닫힌 문틈, 응집된 어둠 속 십자가를 분간하긴 어려웠지만 우리끼리의 언어로 좀 더 가까워졌다.  


언덕 골목 계단을 다 내려와 리퍼블릭 광장을 가로질러 카페에 들 때까지 두 사람은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았다. 바람은 찼지만 오랜 지기와 거닐 듯 편안했고, 인도 여인도 아는 동네 마실 나온 듯 주저 없는 걸음이었다. 그리고 진득한 핫초콜릿 두 잔에 두 마음이 제대로 녹아내렸다.

“암스테르담에서 학회를 마치고 이곳에서 남편을 만나기로 했는데, 후훗. 결혼기념일에 바람 맞았어.”

“오우.”

이럴 땐 수선을 피우지 않는 게 낫다.

“남편이 친구 생일파티에서 곤죽이 되어 출발 비행기를 놓쳤대. 오늘 밤 9시에는 도착한댔는데, 그때까지 혼자였더라면 무척 화가 났을 거야. 널 만나 즐거웠어.”

“하하하, 다행이네.”

우리 남편은 숙취가 아니어도 곧잘 가족 행사를 잊어버려, 혹은 우리 나이가 되면 결혼기념일은커녕 서로의 생일조차 챙기기 번거로워, 하고 말하려다 괜한 오해를 살까 그만두었다. 좌로나 우로나 심각할 필요 없는 대화가 오갔고,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 사이 유리벽 하나를 끼워둔 느낌이었다. 다 보이는 것도 같고 정작 중요한 건 각자의 방에 놓아둔 것도 같고, 속속들이 알 필요도 없고 그러기에도 짧은 인연이었다.

저녁이 이슥해지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녀는 다소 말이 많아졌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 부부는 결혼기념일마다 중남미 코스타리카로 떠났는데 몇 해 전 쓰나미로 엉망이 돼 안타깝다며, 이제는 내가 예정한 동유럽 코스를 다녀봐야겠다 했다. 물론 핸드폰에 저장된 제주 사진을 보여주자 크게 놀라며 언젠가 제주를, 더불어 서울을 다니러 오겠단다.

“가끔,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가 그랬다.

“음. 부모님이 그립지만, 현재에 만족해.”

과거의 삶은 그것대로 행복했고, 부모의 둥지를 떠난 지금의 삶도 만족스럽다는 그녀에게 줌파 라이히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게 낫겠다. 함께이지만 각자 삶의 숙제 앞에서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가족 낱낱의 이야기. 내가 그랬고 남편이 그랬을 수 있지만, 이 친구는 아닌가 보았다. 먹잇감을 물어주던 부모 곁을 떠나 제 스스로 날갯짓으로 살아간다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이전 세대가 그랬듯 둥지 속 새끼를 밀어내는 것도 맘에 부치던데…. 고향 떠난 처지만 같을 뿐, 아직 이 여인에 도착하지 않은 미래였고 어쩌면 영영 택하지 않을 삶일 수 있어 입을 다물었다.  


늦은 9시, 미국인 남편을 기다려 상기된 여인을 숙소 층계참에 세워두고 냉큼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컵라면, 베지테리언인 그녀의 육식파 남편에겐 문제될 게 없겠지.

“결혼기념일 축하해.”

“정말 고마워.”

다니는 내내 오십 센티 남짓 거리를 유지하던 여인이 지그시 나를 껴안았다. 예기치 못한 반응이었으나, 따뜻하니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삶인 것을, 서울을 지내며 잠깐 살다 떠날 뜨내기처럼 굴지 말걸, 맘 푸지게 살걸 그랬다. 따지고 보면 서울이 불친절한 게 아니라 어른으로 살았던 서울이 불편할 뿐이었는데, 깍쟁이 같다던 서울에 지지 않으려 마음까지 단속하며 살았다. 집을 장만한 후에, 큰 집으로 이사간 후에, 아이들 다 자란 후에, 그 다음에 제대로 살아야지 하며 많은 걸 미룬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 나와 달리 자신이 살아온 대로 당당했던 인도 여인은 마음을 내놓는 것도 자연스러워, 방금 베지테리언 식탁이 차려진 듯 갖은 채소 향이 맴돌아 다시 한번 콧등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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