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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Sep 17. 2019

주저앉지 마라, 인생아

_ 여행 2일차, 두브로브니크 2

# 1 미완이어도 괜찮아

‘엄마 있는 곳으로 가면 안 돼요?’

시차에 잠잠하던 핸드폰이 새벽을 흔들었다. 저쪽 시간을 계산할 틈도 없이, 작은아이의 한 줄 소망에 수천 마일 떨어져 있던 엄마도 흔들렸다. 스스로 자기감정을 만지기엔 여물지 못한 나이, 큰아이와 싸운 걸 핑계 삼아 옆을 지키지 않던 엄마에게 골을 냈다. 잽을 날리듯 주구장창 날아드는 이모티콘은 분풀이에 불과했지만, 명치가 찌르르 아파왔다.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난 건 새벽 5시 무렵, 이번에는 숙소 1층의 식료품 가게에서 시비를 걸었다. 깜깜한 방 한가득 부풀던 수면은 물건을 하역하는 소리와 기운찬 대화에 짓이겨져 만두피처럼 얄팍해졌다. 베개 밑에 고개를 처박고 엎치락, 숨 쉬기 가빠지고 외로 꼰 고개마저 아파서 뒤치락, 홀로 초를 다퉜지만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미지근한 혼자의 이불 둥지를 걷어차고 일찌감치 조식을 드는 게 낫겠어.

삶은 가지와 토마토와 입에 딱 맞는 소세지와 치즈를 종류별로 호밀빵에 얹어 이국에서의 둘째날을 맞았다. 위장이 게걸스레 몇 접시를 해치우는 동안 거친 바람에 식당 창밖 항구에 매인 요트 들이 흘수선 아래를 내보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제 페리가 있던 자리만 허전하니, 더 깊어 요염해진 아드리아해가 은빛 눈썹을 수시로 깜빡이는 탓에 살짝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정말 접시를 놓칠 뻔했다. 앉은 자리를 치우고 일어서려는데 속이 울렁이며 불청객이 급습했다. 순간 바람 거센 아드리아해를 춤추며 달리는 페리에 올라탄 줄 알았다. 천천히 방문을 열고 자낙스 반 알을 깨물었다. 베개를 겹쳐 높이 세운 후 한기를 잠재우듯 목덜미까지 이불을 덮었다. 깊고 어두운 곳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기분, 바람을 잠잠케 할 제물이 되리라.


땀으로 축축해진 침대가 불편해 눈을 떴을 땐 해가 높다라니, 바람도 유순해져 낯선 커튼을 툭툭 건드릴 뿐이었다. 침대 발치, 마취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개구리처럼 쩍 벌어진 캐리어를 보고 나서야 여행지 숙소임을 깨달았다. 몸은 무거웠지만, 울렁증은 가셨다.

서두르지 말아야지. 반평생 악다구니 쓰며 누구를 이겨먹으려던 건지, 전쟁을 치르듯 내달렸다. 천천히, 한 달의 여행은 미완이어도 됐다. 저편에 남은 가족의 삶은 그들에게 맡기고,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를 바람 부는 대로 춤추며 랄랄라 보내야지.     



#2 무심하게 펄럭이는

어슬렁어슬렁 동네로 걸어 들어갔다. 끼니를 챙기고 잠자리를 정리하는 일마저 내팽개치고 나니, 구르는 돌까지 예뻐 보였다. 아무나라도 반겨줄 듯 이름 없는 교회의 문턱은 적절히 닳아 있었고, 슈퍼마켓에 해당하는 이곳 콘줌을 한 바퀴 돌며 사람 사는 뻔한 풍경을 계산해 보았다.

이날은 성벽 투어를 할 생각이어구시가지에서 버스를 내려 필레 성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향했다. 성벽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 앞 통행을 감찰하던 늙은 아저씨에게 어제 샀던 두브로브니크 카드를 내밀었더니, 무도회장 댄스 파트너를 만난 듯 일부러 꾸며낸 게 분명한 낯 간지러운 미소를 건넸다. 포물선을 그리듯 왼손을 내밀고는 카드를 바쳐들어 날짜를 확인했고, 다시 포물선을 그리듯 오른손을 들고는 입장을 허락했다.

스텝 바이 스텝, 신나는 댄스여도 그만두고 싶을 만큼 숨이 헉헉댈 무렵 계단이 끝났다. 그리고 성인 2명이 나란히 서기도 바툰 통로가 등장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무리를 따르자, 왼쪽으로 구시가지의 주요 도로라는 300미터 플라차 대로가 시청이 있다는 루자 광장까지 곧게 뻗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성벽을 둘러싼 아드리아해 풍경이, 고개를 외로 더 꼬고 꼬면 스르지산까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어쩌다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 대략 2km를 함께 보행할 참이면 서두르라는 표정이어서, 앞을 향해 쭉쭉 걸었다.  


발칸의 나라 크로아티아에 속한 두브로브니크는 애시당초 로마 식민시 거주민들의 요새였단다. 이들이 슬라브인과 합하여 통일왕국을 이루고, 13세기에는 베네치아와 비등한 해양 무역 도시로 성장하면서 자신을 지켜줄 탄탄한 이 성벽을 더욱 크게 둘렀다 했다.

몇 번의 증축과 1662년 대지진으로 한때 붕괴되었다 재건축되는 등 복원을 거듭한 성벽은 서로 다른 기원의 벽돌이 어떻게든 쌓이고 쌓여 최고 25m, 투박하나 단단한 원형의 철옹성처럼 우뚝했다. 총탄 자국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던 시내 모퉁이 벽에 비해 아무렇지도 않은 주말만 보낸 듯한 이곳에서, 20세기가 저물던 1993년 유고 내전을 끝으로 전쟁의 화마를 벗었다는 두브로브니크를 떠올리긴 쉽지 않았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보다 관광세를 톡톡히 벌어들인다는 이 도시. 이를 증명하듯 전 세계 숱한 구경꾼들이 성벽 산책에 합류했다. 앞줄을 따라잡을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럴 수도 없는 좁은 길, 거북이 알 낳으러 가듯 느릿느릿 걷다 보니 우측으로 다른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들썩이는 카페와 카누의 정박지를 사이에 두고 동떨어져 있는 로브리예나츠 요새였다. 무뚝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아 사람이 드문 저곳, 다음날 산책할 성벽이었다.   다시 사람들에 뒤엉켜 멈출 수도 없는 길을 계속 걸으니 보카르탑 지날 무렵 종소리가 요란했다. 댕댕댕댕~. 12번의 종이 울리고 점심을 지나는 시내로 눈길을 돌렸더니, 무심하게 펄럭이는 빨래가 유독 하얗고 빨가니 곳 사람들의 평온한 하루가 널려 있는 듯했다.  

“마미, 이게 뭐예요?”

“스파이홀이지.”

놀이터를 발견한 아이는 성벽 투어 도중 틈틈이 보이는 구멍마다 손가락 총을 겨누었다. 대포가 놓였을 그 자리에 멈춰선 일군의 관광객은 순서를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간혹 요트 서넛이 대포가 사라진 그 구멍으로 차오르기도 했다.

필레 성문의 정반대편인 동쪽으로는 반예 비치, 멀리서도 현관의 터키 식 양탄자가 만져질 듯 호화로운 호텔들이 해안선을 따라 능청스럽게 산을 타고 있었다. 좀 더 짙푸른 아드리아해를 지나니 초가을 날카로운 햇살이 음각양각 조각해놓은 구항구가 나타났고, 이즈음 도시의 동쪽 플로체 성문으로 내려가기로 혹은 오르기로 작정한 관광객들과 엉켜 좀 더 나아가기로 했다.

때로는 카페도 등장하고 때로는 한 사람 지나기 어려운 계단도 들이대면서, 오랜 세월 방어에 충실했을 성벽은 엇갈리는 관광객 무리를 이고 여전히 탄탄하게 이어졌다. 어제 오른 스르지산의 케이블카가 이제 오른쪽 어깨 위를 지나듯 산을 향해 오르고 마침내 성벽 투어의 끝자락, 백상어처럼 날렵한 민체타탑이 보였다. 숙제를 마친 아이들처럼 환한 낯빛이 된 관광객들은 이름도 모르는 서로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을 찍었다. 전쟁은 끝났고, 나 또한 두어 시간 성벽 투어의 사진을 전리품마냥 안은 채 시내로 내려섰다.


“혼자 오셨어요?”

늦은 점심 차 식당에 앉았더니, 황금연휴 33끼 밥 짓기 징그러워 직장 동료들과 작정하고 떠나왔다는 옆자리 한국인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아무쪼록 혼자 다니시니, 소매치기를 조심하세요!”

뒷주머니는 집시의 것, 앞주머니는 공동의 것이라나.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의 테러 사건 이후, 삼엄해진 경찰 단속을 피해 대륙의 집시들이 크로아티아와 같은 신규 관광 특구로 향했다는 전갈이었다. 세기는 바뀌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의 차이를 인정할 만큼 성숙한 세계로 뒤바뀐 건 아니어서, 종교로나 부의 분배로나 사람 사이 갈등은 여전했다.

자그레브를 먼저 들렀던 이들은 일행의 백팩에 손을 집어넣어 제 것인 양 지갑을 빼들던 집시를 불행 중 다행으로 발견했다. 도둑질을 들통 나고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집시 여인은 맹랑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을 건넸다 했고, 한국에서 겪기 드문 상황이라 아주머니들은 누구랄 것 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단다. 백팩에는 집시들이 가장 탐낸다는 160여 개국 무비자의 대한민국 여권도 들어 있었다.

전쟁이 지난 도시에 소매치기라니, 난공불락의 성벽을 두르지 않은 여행자로선 돈을 쪼개어 보관하며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까끌까끌한 입으로 불리다 만 밥알이 소금과 함께 씹히는 먹물 리조또, 트립 어드바이저 추천도 믿을 게 못됐다. 문어와 홍합 등 해산물만 빼놓곤 죄다 도둑 같은 표정이었다.


      

#3 실패를 떠나보내며

드라마 <로망스>로 유명해진 창원시 진해천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름철 홍수에 종종 범람하던 나지막한 또랑이었다. 그 또랑 나란한 길을 따라 쌀배달을 다니러 갔던 아버지는 홍수는커녕 여우비도 내리지 않던 어느 날, 진흙에 피범벅이 되어 절뚝발이 신세로 돌아왔다. 쌀포대와 짐자전거는 어디다 내버려둔 건지, 간신히 혼자 돌아온 아버지를 엄마는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질겁케 한 딱총을 쏜 동네 장난꾸러기들을 이 잡듯 잡아 혼구녕을 냈다.

내가 기억하는 날들에 한정되긴 하지만, 가족의 현실과는 뚝 떨어져 지냈던 아버지는 이날 사고 이후로는 대놓고 가족의 삶 저편으로 나동그라졌다. 그까짓 딱총이 뭐라고, 어린 마음에도 혀를 찰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퇴장으로 원래부터 부지런했던 엄마는 더욱 억척스러워졌다.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랐다면서 어떻게 시장 난전까지 나섰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내가 태어난 해 쌀집까지 마련한 엄마는 당신의 사촌 덕에 공장 식당 납품 건을 맡으며 부리나케 집안을 일으켰다. 따박따박 봉급날 돌아오는 군공무원 태반이었던 동네 장사를 놓지도 않았다. 수금하고 달아나는 일꾼이 더러 있어 걷기 먼 동네는 버스를 타고 배달을 다니셨고, 아버지가 버리고 온 짐자전거가 돌아왔는데도 상이용사처럼 처박아둘 뿐이었다. 오히려 작은 자전거를 장만해서는 나까지 거들고 나서라 하셨다.

6남매를 키우랴, 쌀집을 운영하랴, 여러모로 바빴을 엄마는 그럼에도 아버지한테 된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되레 아침이면 가까운 어시장에서 막 잡아 올린 아나고 회와 흰 쌀밥 등 진수성찬을 차리셨다. 혼식을 장려하던 시절에도 친구의 보리 밥알을 동냥해 쌀밥 도시락에 섞어야 했으니, 만성적인 신경통과 위장병 및 기침을 달고 살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간혹 들통 가득 추어탕이나 곰탕을 끓여놓고 엄마는 부곡 온천이나 울릉도 등지로 여행을 다니러 갔다. 그때도 알로에와 마를 다듬어놓고 아침상에 갈아 올리라 언니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당시 엄마들의 여행은 동네 잔치였는데, 전세 버스 남은 음식이 내려지도록 동네 아줌마들의 흥이 가시지 않으면 때마침 아버지가 나타나 가락을 울렸다. 덩기덕 덩기덕 윗마을 아랫마을 할 것 없이 장구를 치며 돌아나가면, 신이 난 아줌마들이 치마를 들치고 줄지어 춤을 췄다. 남아 뒹구는 사이다며 콜라를 병째 문 동네 아이들도 장구 소리에 맞춰 트림을 해댔다. 밭은기침 없이 물 만난 고기처럼 생생한 아버지란 그때가 유일했다.


납품하러 가신 건지 여행을 떠난 건지, 그날도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 동네 배달이 밀렸고 중학생이 된 나는 그런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하여 주저앉았던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한몫 거들어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버지와 새 자전거가 모두 온전하게 돌아왔다. 덤으로 아버지의 옛 지인도 오셨다.

“이게 얼마만이고?”

두 사람이 덕담을 나누는 동안 엄마 대신 술상을 봤던 나는 해마다 담그는 포도주를 주전자 가득 따라 들였다. 듣자 하니 이들은 6.25 전쟁 참전 용사, 압록강 근처까지 올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간신히 돌아온 여느 부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다.

“거기는 괜찮습니까?”

“아직 멀쩡하다.”

바지를 걷어 올린 아버지가 장단지를 주물거렸다. 가늘고 긴 근육 섬유질에 유난히 봉긋 솟은 무언가가 아버지의 손가락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쳤다. 전쟁통에 박힌 폭탄 파편이었다.

아버지는 따쿵따쿵 애들 장난감 소리에 폭탄 터질 때처럼 주저앉다 크게 다쳤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다. 그리곤 인해전술을 쓰던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사방 천지에서 들려왔을 때 정말 공포스러웠다며 한 잔, 1.4후퇴 때 배를 타지 못했더라면 맞상을 하고 술을 나누지도 못했을 거라며 한 잔, 다리 신경통이 잦아 힘쓰는 일은 못하겠다던 아버지와 달리 지인 분은 전쟁 이후 가족 거둬 먹일 일을 찾다 군대에 남았다며 한 잔, 술잔을 부딪혔다. 주전자에 다시 포도주를 채워드릴 때 밑바닥 갈앉은 포도알은 내 차지였다.

살아남은 한 사람은 전쟁의 상흔을 품고 엉거주춤 현실에 주저앉았고, 살아남은 또 한 사람은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다시 총을 들었다. 삶을 대하는 자세는 무척 달랐지만, 딸꾹, 술잔을 들 때면 팔뚝으로 바랜 채 지워지지 않던 부대 문신이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딸꾹. 그리고 이들보다 먼저 술에 곯아떨어진 건 나였다.


“If you com to San Francisco~, Summertime will be a love in there~.”

샌프란시스코도 여름철도 아녔지만, 두브로브니크 성벽 한쪽 구멍을 나서면 오래된 팝송이 쿵쾅대는 부자 카페를 만날 수 있다. 바다를 면한 그 카페에서 레몬 맥주를 반 병쯤 마시자, 아버지의 술상에서 포도 몇 알 집어먹었을 때만큼의 취기가 올랐다.  

근처 깎아지른 바위 위로 전쟁 이후 태어났을 게 분명한 두 청년이 군살 없는 조각 같은 몸을 자랑하듯 두 팔을 쭉 뻗어 올렸다. 풍덩,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다. 나머지 녀석이 수직으로 낙하하는 걸 내려다보니, 아득한 저 아래 블랙홀 같은 구멍 주위로 흰 포말이 일었다. 잠잠히 유영하던 커플은 네이팜이 떨어진 듯 소스라치게 놀랐나, 남자에게 꼭 들러붙은 여자가 녀석들 쪽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영하의 바깥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따뜻한 잠자리를 보전하던 우리집에 신경질적인 새벽 인터폰이 울렸을 때도 저들처럼 놀랬다. 사실 주말을 깨웠던 은행의 방문은 전쟁의 서곡에 불과했다. 점령군이 된 은행은 그때까지 쌓아올렸던 보금자리를 절반이나 동강냈고, 가족의 평범한 삶을 저당 잡았다.

전쟁을 치를 때보다 전쟁 이후의 삶이 더욱 전쟁 같았다. 한 편으로 뭉쳐 전우가 되어야 했던 남편과 내가 종종 큰소리로 다퉜고, 쌍둥이는 앞치마를 풀어버린 엄마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지역아동센터에 맡겨졌다. 나는 친정 엄마처럼 억척스런 여자가 아니었으며 선뜻 큰손 내밀 친인척도 없었다. 그나마 쌍둥이에겐 주저앉지 않은 채 무너진 성터를 차곡차곡 재건하는 아빠가 있다는 게 다행한 일이었다.


즈음 주변을 돌아보니, 이 나이 돈이며 건강이나 관계 문제로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으면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 시간이 어떤 이에겐 약(藥)이 되었는가 하면, 벼르던 삶에 상처 가득 독(毒) 오른 이도 있었다. 아무래도 후자가 될 성싶어 타임슬립하듯 떠나온 이곳도 전쟁을 지난 도시였는데, 상흔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은 잃지 않아 말간 얼굴로 솟아오 청년처럼 대단해 보였다.

이들처럼 미래를 낙관하던 자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남편에 대한 미움과 때 지난 후회 등 스스로를 황폐케 했던 마음을 벗어던지고 나의 결을 되찾 수 있을까. 격랑 인 후 다시 잠잠해지는 저 깊은 바다처럼, 주저앉지 않고 흐르고 흘러 멀리 나아가는 저 넓은 바다처럼, 그렇게 살아지면 좋으련만.  

시간이 제물이 되어 아주 오랜 후에야, 실패한 과거를 흘러보낸 하루가 저물었음을 깨달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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