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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달 Sep 14. 2019

하얀 돌을 찾아서

_출발, 인천공항

#1 탈출기

“형아 들은 벌써 할머니 댁에 와 있대.”

사촌 형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쌍둥이가 오전 내내 침대에 붙박혔던 엄마에게 들뜬 목소리로 체중을 실었다. 실눈을 뜨며 천천히 어둠을 벗겨내자 천장이 제자리, 출국 당일 몸이 말을 들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 한편으로 조류에 떠밀려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 나선 배인 양 낭패감이 물결쳤다.  

최근 이석증이 재발한 이래 한손에는 신경안정제를, 또 다른 손에는 ‘신경 치료를 받고 있는 BPPV(양성돌발성체위성현훈증) 환자’라는 의사 진단서를 쥐고 떠날지 말지를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부지런히 한의원에 다니며 침을 맞고 공진단과 청심환까지 챙겼으니 아무래도 저울은 떠나는 쪽으로 기운 게 분명했지만, 막상 떠날 시간이 닥치고 보니 무게중심이 몹시 흔들렸다. 시끌벅적 짓까부는 아이들 소리와 둥기둥기  두둥기 울리는 남편의 기타 소리와 치이이익 밥 익는 소리와 하릴없이 지지고 볶으며 지내고픈 마음이 버리기로 했던 패에 힘을 싣고 있었다. 당최 제 속도 모를 일이다.


“얼른 점심 먹으러 넘어오래요.”

그제야 말귀가 트였다. D-Day는 추석 전날, 시댁에 가족이 모인 이유였다. 순간 어지럼증이 재발한 이래 오작동을 거듭하던 시계는 째깍째깍 잘도 돌아갔다. 전시 출동을 명받은 군인처럼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벌떡 일어나 널브러진 빨래더미와 개수대 쌓인 그릇을 먼저 접수했다. 그리고 환절기를 겪을 가족의 옷가지를 대충 정리하고 화장실 왁스 청소까지 마무리한 후, 마침내 약 한 달 여행의 동반자가 될 캐리어 정돈에 나섰다.

연중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가 도드라진 크로아티아에서 발트해를 머리에 이고 있는 폴란드까지 북상할 계획이어서, 20도에서 영하에 이르는 날씨를 오락가락할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4계절 옷에 짓눌려 다닐 수는 없으니, 평상복 4벌 외 얇은 패딩 2벌, 야상 점퍼 1벌 정도만 압축 팩에 싸 넣었다. 당장 신고 갈 운동화 외 방수형 스니커즈 1족과 슬리퍼를 제공하지 않는 유럽 숙소를 감안하여 플랫 조리 1족도 챙겨 넣었다.  

세안제품과 화장품, 모자, 스카프, 멀티어댑터도 잊지 않았고, 멀쩡한 여행을 보장할 양의와 한의의 약은 물론이거니와 홍삼환, 홍삼젤리, 비타민제, 감기약, 설사약, 근육통 패치, 배드 버그 퇴치용 스프레이까지 집어넣었다. 패기의 젊은 여행자 시절에는 1달 거리도 40리터 백팩으로 충분했는데, 나이만큼 늘어난 잡동사니로 달그락거릴 틈조차 없는 캐리어에 책과 신라면 들과 햇반까지 꾸역꾸역 쑤셔 넣느라 진땀이 났다.

“딱 필요한 짐만 넣었는데도 캐리어가 엄청 무겁네.”

“오래 여행하니까 짐도 많지. 근데 엄마, 꼭 가야 해요? 안 가면 안 돼?”

“음, 혼자 지내며 책 읽고 생각할 게 많아서….”

궁색하기 짝이 없다.

“우리 집에도 책은 많은데, 집에서 책 읽고 생각하면 안 돼? 내 책도 빌려줄게.”

집안 단속을 마치고 시댁으로 향하는 차에 캐리어를 싣자, 작은아이가 이별에 서툰 눈빛을 보냈다.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 허둥대는 눈빛을 감추기 바쁜 와중, 차창 밖으로 쏜살같은 풍경이 내 마음마냥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2 한 달 간 이별

치지지직~.

“올해에도 전은 다섯 종류네요?”

“야채꽂이는 아들들이 잘 먹고, 고구마전은 며느리들이 잘 먹고, 새우전이랑 생선전은 아버님이 잘 자시고, 동그랑땡은 손주들이 잘 먹응께. 그나저나 대충 끝났으니 너는 언능 공항 가거라.”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전 일찌감치 집안어른들께 안식휴가를 허락받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많이 다니라며 홀로 여행을 지지해 준 시어머니의 “가끔 애들 봐주러 들르겠다.”는 말씀이 일사천리 계획을 추진하는 액셀러레이터가 됐다.


친정집 큰언니와 동년배인 시어머니는 스무 살에 시집 와 내리 아들만 낳았다. 외동아들 기죽이는 딸 다섯을 낳았다고 모진 시집살이를 했다던 친정엄마가 들었으면 귀를 후비며 의아해할 노릇이겠지만, 이전 세대의 시집살이는 통과의례였던 양 시어머니도 평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겪었다.

홀시어머니의 심술을 견뎌야 했고, 일찌감치 해외 건설 현장을 떠돌던 남편을 둔 덕에 머리 큰 세 아들을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시주승일지라도 사내라면 무서워 남편의 오래된 신발을 현관에 떠벌리듯 두었다 했다. 그리하여 작은아들이 개울 다리에서 떨어져 인사불성이 됐을 때도, 큰아들이 물수제비뜨던 돌멩이에 맞아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남편이 등장하지 않던 시어머니의 시절     얘기는 명절마다 TV 단골 영화처럼 소환되곤 했다.   


어느새 곡선이 사라져 가슴께인지 허리춤인지 분간할 수 없이 뭉툭해진 몸뚱이를 깨금발로 선 시어머니는 활짝, 베란다 창문을 열어젖히곤 콧노래를 부르셨다. 언제 다듬어 너셨는지, 꾸덕꾸덕해진 생선을 구울 참이었다. 그러고 나면 낮으로 아직 여름 같은 날씨가 한풀 꺾일 저녁에야 나물을 무치겠다며 남은 일을 서두실 터였다.

웬만하면 쫓아다니며 거들겠지만, 이날만큼은 외면했다. 늦은 밤 11시 날아오를 비행기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놀이터에 나간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시어머니가 등 떠밀 때 시댁 문턱을 나서는 게 마땅했다. 

차가운 저녁이 얼굴을 쓰다듬을 새도 없이 남편의 차가 공항버스를 앞질렀다. 여러 할 말을 참고 무거운 캐리어를 리무진 짐칸으로 옮겨 싣느라 숨도 한 번 참던 남편은, 놀이터로 나간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 저녁상에 둘러앉으러 쌩하니 동쪽으로 떠났다. 이번만큼은 남겨져 꿈꾸던 시공간으로 연착륙 없이 떠나길 바라던 나는, 서쪽으로 향하는 리무진 객석에 올랐다. 그렇게 부부는 다른 공간에서 각자 삶이 무사하길 바라며 한 달 간 이별했다.  



#3 야간비행

“과장 보도였나 봐요.”

황금연휴를 맞아 출국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라던 인천공항은 그때만큼은 한물 간 스타 콘서트홀마냥 찾는 이가 드문했다. 사상 초유의 인파로 출국 수속이 지연된다던 뉴스를 곧이곧대로 믿고 비행기 출발 시간보다 얼추 5시간을 이르게 도착한 사람은 나와 방송을 탓하던 아가씨 외 또 한 명이 더 있었다.  

“경유 편을 워낙 많이 가진 항공사라, 짐 분실 사고가 빈번하대요.”

카카오 프렌즈로 도배된 두 아가씨의 캐리어에서 짐 태그조차 달지 않은 내 캐리어로 시선을 옮기고 보니, 세계 미아가 되고도 남을 특별할 것 없는 모습.

“오버 부킹으로도 유명하던데, 기내 한국인 승무원까지 없다니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겠어요.”

그녀가 샅샅이 뒤진 여행 정보를 흘릴 때마다, 나머지 두 사람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입지도 않을 옷값을 선불하는 느낌이라니, 걸러듣고 내 여행만큼은 낙관하기로 했다. 정말이지, 살다 보면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많다.   

그때 푸른 제복의 터키 항공사 직원들이 나타났다. 캐리어를 보내고 나면 환전하고 여행자보험도 챙기고, 책도 한두 권 더 사고 예약해둔 유럽 통신사 유심 카드도 찾아야 했다. 머릿속으로 출발 전 로드맵을 숱하게 재생했지만, 창구 전광판은 묵묵부답이었고 푸른 제복들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역시 외국 항공사답네요. 승객이 이렇게 많고 출국 수속대가 그렇게 붐빈다는데, 창구 오픈 시간을 칼같이 지킬 건 뭐람.”

짐을 부치자마자 공항 라운지로 향하겠다며 PP 카드를 꺼내든 젊고 아는 것 많고 걱정도 많던 여행자는, 떠나는 발목이 잡힐까 무척 부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무렵 요의를 느낀 세 사람은 돌아가며 화장실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짐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이 종종 생기겠지만, 당장은 편안히 볼일을 봤다.


“여행을 자주 다니시나 봐요?”

창구는 꿈쩍 않는데, 대단한 먹잇감을 기다리는 이리떼 소굴처럼 더 많은 여행객이 꼬여들었다. 한 줄로 나란히 정렬한 선두의 세 사람, 그 중 걱정 많던 아가씨가 맨 앞을 차지했다. 그녀의 캐리어 여기저기 떼다 만 화물 송장이 공항에선 훈장만 같다.

“아시아로만 다니다, 지난번 파리 여행이 좋아 일찌감치 이탈리아를 계획했거든요. 이리 불친절할 줄 알았다면 다른 항공사를 택할 걸 그랬어요.”

조만간 대기한 지 2시간에 육박할 터였다. 먼저 오라 연락한 적 없는 터키 항공사로선 억울하겠지만, 대기 1번인 아가씨나 나와 또 다른 젊은 여행자도 저린 종아리를 토닥였다. 공항에서의 기다림은 여행의 한 가지라지만, 고압적인 붉은 줄 너머 급할 것 없다 희희덕대는 항공사 직원들을 봐주는 건 별로였다.

“크로아티아라면 어디로 들어가세요?”

이번에는 내 뒤에 선 크로아티아행 아가씨에게 물었다.

“저는 자그레브로 들어가요. 7박 8일 짧은 일정이에요.”

왠지 실망스러웠다. 그래서였나, 점점 수다스러워졌다.

“저는 두브로브니크로 들어가요. 안식휴가 겸해 홀로 떠나는 여행인데, 쌍둥이 아들들을 남편에게 맡겨놓고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평생 볼 텐데, 뭘 걱정하세요? 이런 기회, 자주 오지 않아요.”

엄마의 여행을 두둔해주다니, 공항에서 만난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의 통속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특별히 챙기는 여행 목록이라도 있으세요? 책이라든가….”

“전 여행 때 책을 꼭 챙겨요. 이번엔 이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일전에 한 달 홀로 여행을 남편에게 설득하며 ‘여행하는 책’을 기획한댔다. 여행 중 만난 사람에게 책을 선물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여행자에게 그 책을 전달함으로써 책으로 맺은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새로운 책으로 엮겠다는 프로젝트였다. 

그 모든 이들이 한 권으로 연결되는 여행 이야기라니 근사하지 않냐 흥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시큰둥했고, 핑계가 가관이라던 친구는 외국인 여행자와의 소통을 위해 영서(英書)를 추천하곤 깔깔거렸다. 물론 무게를 감당치 못할까 봐 읽을 책도 이것저것 따져 골라 넣은 처지라, 여행할 책은 끝내 준비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 첫 번째 인연일 수 있는 이가 꺼낸 책 표지에는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흐드러졌다. 다만 그 위 ‘천재 뇌신경과학자가 알려주는 사랑을 지키는 법’이란 활자가 생뚱맞았다. 



“연애하는 방법…론인가?”

“호호호, 사랑에 대한 과학자의 분석론이래요.”

사랑을 해부할 수 있다니 어불성설이다 싶기도 하고, 취향이 이리 달라서야 어떤 책을 여행시켜야 할지 더 모르겠다 싶기도 했다. 공연한 짓을 접기 잘했다.

“드디어 시작이에요!”

정각 20시, 붉은 줄이 걷히고 아가씨들 것과 나의 캐리어가 사나운 머리카락 드리운 괴물의 시커먼 혓바닥 같은 컨베이어벨트에 잡아먹혔다. 라운지를 체험하러 가겠다는 아가씨와 로밍 하러 가는 아가씨와 헤어진 나는 이제 진짜 혼자가 되었다. 할 일은 많은데 갑자기 우물쭈물, 방향을 놓쳤다.


“막내는 비행기 띄우는 회사 취직하믄 좋겄다. 엄마 늘그막에 호강 좀 하그로.”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이 실시된 1989년 훨씬 이전에는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란 보통사람들에겐 언감생심이었다. 지방 소도시, 이 집 저 집 밥그릇 개수도 알 만큼 작은 동네에서 이웃 언니가 스튜디어스가 되어 가족 할인인지 뭔지로 제 부모를 종종 여행 보내던 게 대통령 바뀐 것보다 더 큰 이슈였던 때 친정엄마의 소원이었다. 가족에게 붙들린 엄마가 되고 보면 어디로든 날아가고픈 걸까.

그때 비하면 수월해진 비행기 여행, 이탈리아행 친구는 휴가를 다녀와 퇴사하고픈 마음을 잡겠다 했고 자그레브행 친구는 일상의 권태를 벗을 겸 여행을 택했다 했다. 과연 나는 마음먹은 대로, 이후 삶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출국 수속을 마치고 까만 밤을 질주할 비행기에 오르다, 닫히면 그만인 문을 향하듯 내달리던 내 지난날을 떠올렸다. 삶은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열려 있는 것을,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해도 될 것을, 내가 바라보는 쪽이 출구인 것을…. 

내 안의 나침판을 들여다볼 짬 없이 달리기만 했던 과거를 잘라내듯,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던 나는 경계를 넘어 혼자의 시간으로 한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이 길은 호사롭지도, 갑작스레 인생의 나래를 펼쳐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숲속 헨젤과 그레텔이 놓아둔 흰 조약돌처럼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그러모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그때 나는 지금의 나와 조금은 달라져 있겠지.


야간비행에 떠오른 썩 좋은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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