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하늘에 웬 물벼락?! 청명한 가을 하늘을 가르마 타는 물의 터널을 꺅꺅 뛰어다니다, 헬브룬궁 물의 정원 투어가 끝날 무렵엔 트릭 분수에 혼자 속은 듯 아예 축축한 차림새였다. 그럼에도, 한 번 더 쏘아대면 앞뒤 재지 말고 물총 세례를 받아야지 싶을 만큼 신이 나 있었다. 이곳을 여름 별궁으로 마련한 마르쿠스 지티쿠스 대주교는 17세기 사람, 그가 고안한 물장난 덕분에 지난밤 에마와의 저녁 이후 발병한 두통이 싹 가셨다.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10km, 버스로 30분 거리인 헬브룬궁은 일정에 없던 곳이었다. 모든 것에 이면이 있단 걸 잊은 대가를 치르느라 숙소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다소곳하던 에마가 저녁 반주로 와인잔을 거푸 들이킬 때 말렸어야 했는데, 그녀는 금세 취했고 무엇보다 옆자리 호색한 같은 남자가 끼어든 게 문제였다. 박장대소하며 낯선 술친구를 환대하던 그녀를 내버려두고 혼자 나설까 몇 번을 고민했던지. 마침내 숙소를 못 찾겠다 헤롱대는 그녀를 데리고 나올 무렵, 와인 오크통을 짊어진 기분에 엄마 아니면 언니 마음을 품었던 걸 후회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잠을 설쳤다. 조식 후 누웠자니 이미 밝아지기로 한 하늘빛을 얇은 커튼이 막아내지 못해 산책을 나섰다. 숙소 건너 미라벨궁, 담을 타고 오르는 요란한 가을 담쟁이와 달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이 흘렀던 청동 페가수스 상 부근과 장미 넝쿨 터널은 괴괴했다.
그곳은 잠든 부인의 땅. 헬브룬궁 전 주인과 마찬가지로 17세기 사람이었던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그의 애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궁이어서, 이곳에서 대주교가 머물렀을 호엔잘츠부르크를 올려다보는 프레임은 그들의 사랑만큼 예사롭지 않았다. 마침 정원사가 노랑 빨강 팬지 화분들을 심어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미라벨궁을 나섰을 때 25번 버스가 왔고, 또 한 번 예정없이 종점까지 갔다. 잘츠부르크 카드로 무료인 케이블카를 타고 운터스베르크 트레킹을 덤벼 볼까 했다. 하지만 1,750m를 오르고 보니, 바람은 불친절했고 두통은 더했다. 트레킹은 고사하고, 여름 한철 요긴했을 캠핑용 간이의자가 없었더라면 퍽이나 아쉬울 뻔했다.
“땡큐.”
이번엔 배불뚝 아저씨가 낭떠러지로 날아가나 싶던 모자를 잽싸게 낚아 주었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보니 아뿔싸, 케이블카에서 저쪽이 독일 영토이고 이쪽이 오스트리아 영토라는 둥 트레킹 코스가 어떻다는 둥 수다스럽던 아저씨였다.
“어디서 왔어?”
어느 영토에선지 강한 바람은 그칠 줄 몰라 모자 챙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있는데, 간이의자에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자는 아저씨에 좀 더 머리가 아파왔다. 남한에서 여기까진 왜 왔냐, 혼자 왔냐, 잘츠부르크 어디어디를 다녀봤냐, 마치 세관 심사하듯 꼬치꼬치~.
“바람둥이, 해질녘까지 붙잡아둘 셈이야?”
또 다른 배불뚝 아저씨가 낄낄대며 트레킹족의 길을 따라갔다.
“나도 잘츠부르크는 처음이야. 굿 럭, 로맨틱 맘!”
서구식 스타일로 육박해오던 그의 호기심이 떠나간 후 활짝 기지개를 폈다. 차고 맑은 알프스에 숨통이 트였고, 기왕지사 숙소 가는 도중이니 헬룬궁에 들르자 싶었다.
갑작스런 결정이었지만 헬브룬궁 노란 담벼락을 놓칠 리 없었다. 단체 투어를 신청했고, 출발 전 가이드가 지명한 두 외국인 남자가 석조 식탁을 빙 두른 석조 의자에 앉았다 된통 물벼락을 맞는 걸 보았다. 확실한 본보기였지만 모두 자신만은 비껴갈 줄 알고 낄낄거렸다. 속닥속닥, 바닥 물구멍만 조심하면 된다던 한국인 커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주의력 깊은 그들 뒤를 졸졸 따르면 어지간한 비행은 피하겠구나 싶었는데, 난데없는 물 폭탄은 나 같은 홀로 여행객이나 어린 친구들에게 의도적으로 터지곤 했다.
물의 흐름으로 작동되는 인형극에 얼이 나갔을 때, 동굴 천장을 뚫을 기세로 물 분수가 쏘아올린 황금모자에 넋을 뺐을 때, 물 지뢰를 밟은 듯 신발이 옴팡 젖었다. 나중에는 산양인지 사슴인지 온갖 부조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고, 누구도 피할 도리 없는 소나기 터널을 지나며 에라 모르겠다 물벼락을 즐겼다.
기대 없는 방문이어서 더욱 재미졌을까. 여름 궁전의 트릭 분수는 개구진 속임수에 불과했지만, 쓸데없이 복잡해진 마음을 씻어준 조촐한 향연임에 틀림없었다.
#2 불행에도 살가울 수 있다면
내게도 한때, 여름마다 찾던 별장이 있었다. 부산 구포역에서 그때 걸음으로 30분, 근사한 전원주택이나 펜션이 아니라 주춧돌 기둥 위 서까래 뻗은 처마 아래 제비가 집을 지어도 내버려두던 막내 삼촌댁에서 여름날 별난 일주일을 지내곤 했다.
한달음에 여름방학 숙제를 마치고 나면, 엄마 어쩌면 숙모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해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꼬불꼬불 낭떠러지 두어 시간 산을 타는 버스를 참아내고, 지금은 1919년 독립 만세를 불렀다 하여 ‘만세길’로 불리는 기찻길 나란히 걷다 보면 낮은 굴다리 지나 구포시장 골목 안 삼촌댁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예쁜이 왔나. 더운데 이거부터 묵어라.”
초록색 철문은 해가 갈수록 녹이 더했지만, 숙모가 타주던 미숫가루는 언제나 달달했고 아들만 둘인 그 집에서 공주 행세하며 지내는 일상도 어린 여름마다 반복됐다. 먼 길 건너와 땀범벅인 내가 목욕을 마치면 숙모는 으레 젖은 머리 말려주겠다 덤볐고, 언제 사둔 핀인지 꽂았다 뺐다 하거나 시장에서 샀다는 매번 끼는 옷을 입히며 다 큰 인형놀이에 신나하셨다.
사촌오빠 들이 집으로 오면 시중을 데리고 나들이하듯 밤에는 둑방길로, 낮에는 해수욕장으로 놀러 다녔다. 모기 물린 게 뭔 대수라고 오빠들은 종종 혼이 났고, 멀미였는지 더위를 먹은 건지 파리해져 돌아왔을 땐 오빠들이 나서서 약을 먹이느라 난리를 쳤다. 토악질에 앞이 노래졌지만, 식구가 많아 웬만한 상처는 거들떠보지 않던 진짜 가족보다 호들갑스러워 기분 째지게 좋았던 한때 한여름.
무엇보다 해도 해도 지겹지 않던 물당고 놀이가 제일 재미났다. 가뭄이나 단수에 대비해 수돗물을 받아두던 물당고에서 오래 잠수하는 내기를 벌이거나, 호스로 마당 멀리 서 있는 사람의 배꼽이며 똥구멍을 맞추거나, 바가지째 물을 끼얹는 술래잡기 놀이에 삼촌네 마당은 금방 물범벅이 됐다. 친정엄마 같았으면 수도공사에 백이라도 뒀냐며 빗자루 몽둥이 날릴 일이었지만, 숙모는 자지러지는 아이들 난장에 아이고 하며 웃고만 계셨다.
삼촌댁에 눌러 살자던 숙모의 작별 인사가 진짜가 되길 바랐다. 낭창낭창 미녀였던 숙모가 엄마가 되면 자랑스러울 것도 같고, 말썽꾸러기 취급받던 진해보다 공주대접 받던 구포에서의 한철이 훨씬 낫겠다 싶었다. 잘 웃던 다른 가족에 끼어 특별 대접받던 바캉스, 생활이 아니라 손님맞이 한여름 유희라 어째도 즐거웠단 걸 그땐 미처 몰랐다.
가을빛 쏟아지는 헬브룬궁 정원을 걸었더니 물기는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더 이상 물을 쏘아대는 장난꾸러기는 보이지 않았고, 하릴없는 오리와 산새들만 들락거렸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바퀴가 멈춘 건지 어쩐 건지, 느릿한 저쪽으로 하얀 파빌리온이 눈에 띄었다.
“I am sixteen, going on seventeen~.”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빠가 반대하는 나치당 우편배달부와 사랑을 속삭이던 큰딸이 노래했던 장소였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던 갈등이 어린 낙원을 빼앗는 건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양옥집을 지어올린 우리집과 달리, 여름마다 찾아가는 삼촌댁은 한결같았다. 안방은 삼촌 내외와 더불어 사춘기를 겪던 내가 함께 잠들기 비좁아졌고, 오빠 들이 받은 러브레터와 종이학이 넘쳐나던 건넌방 이외 세를 놓았던 삼촌댁은 갈수록 작아졌다. 한여름의 스릴러였던 푸세식 화장실 역시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신세를 한탄하던 삼촌의 저녁 술상이 길어지면서 여름 별장 생활은 급히 마무리 짓는 게 옳았다. 선산이 있던 창원 지역 개발로 보상 절차를 밟던 우리집 어른들과 고약한 관계가 되어버린 삼촌은 지난밤 술주정을 잊을 겸 아침이면 후루룩 재첩국을 드셨지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진 않으셨다. 거문고자리와 전갈자리는 둑방길 어둠 속에서 변함없이 빛날 텐데 어린 시절은 시나브로 지고 있었고, 대가 없이 친절했던 한여름 가족에 대한 환상은 찬바람에 떠나버릴 제비처럼 휘리릭 날아갔다.
여름날 시아버님 생신을 빙자해 매년 계곡놀이를 떠나던 시댁도, 서로의 형편이 달라지고 사나운 마흔 들을 지내면서 모임이 드문해졌다. 좀 더 솔직하자면, 시어른들과 한바탕 대거리를 벌인 후부터였다. 시부모님께 바랐던 경제적 지원이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고, 기대만큼 섭섭한 마음이 컸던 때문이었다. 미처 어른들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아이들은 자맥질하고 물총놀이하다 더러는 상처를 입고 더러는 여름감기에 시달리는 여름날 사촌들과의 합숙을 갈망했다. 언젠가 각자의 삶에 깃들겠지만, 늘 짧다 불평하던 여름날을 젖은 옷 마르듯 쉬이 잊진 못하리라.
불편한 마음은 나의 것, 다 커버린 사촌오빠 들은 간간이 댁네 막내 여동생 궁금해하듯 안부를 물었고 머리 비질해 주던 숙모는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하여 결혼식 화촉을 밝혀 주었다. 돌아보면 대단한 걸 바란 적 없는 소싯적 여름가족은 변함없이 살가웠고, 시댁 어른들도 큰며느리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놓고 한결같이 웃으며 기다리셨다.
삶에 찾아오는 불행을 웃는 낯으로 맞을 수야 없겠지만 웃는 사람에게조차 화난 얼굴로 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임을, 오래된 여름별장 물장난이 끝났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3 가짜라도 웃는 게 좋아
‘가슴 멎도록 아름다운 마을이야. 너는 어때? 두통은 괜찮아?’
푸니쿨라를 타고 묀히스베르크 위 하얗게 솟은 호엔잘츠부르크에 다시 올랐을 때, 할슈타트로 간 에마가 마을 사진과 함께 보낸 메시지였다. 어젯밤 두통을 핑계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휘청휘청 내 방으로 건너와 녹색 캡슐을 주곤 배시시 웃던 그녀. 저녁에 돌아온다는 그녀에게 답하길 미룬 채 성을 내려섰다.
성 아래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았다는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에는 헌금함을 든 사람과 거리 악사들이, 모차르트 가족묘가 있다는 카타콤에는 일일이 챙겨보기 힘든 영혼들이 따로따로 즐비했다. 그리고 산 사람이 북적대는 거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기 휘날리는 노란 건물 앞, 모차르트 생가에 도착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서 1756년 1월에 태어나, 어제의 모차르트 레지던스로 이사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모차르트의 초상화 복사본이 넘쳐나는 대로만큼, 노란 아치형 복도는 많은 관광객 덕분에 비껴 걸어 다녔고, 생전에 그가 사용했다는 클라비코어와 바이올린, 그리고 친필 사인된 악보 앞은 명품관 쇼윈도처럼 인산인해였다.
그나마 <마술피리>를 위한 무대장치 모형과 소품 근처는 한산했다. 150센티미터 단신의 모차르트에겐 꽤나 컸을 여행가방 앞은 독차지할 정도였는데, 성홍열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이 얼마나 가열찼는지 심하게 낡아 있었다. 그리고 천재의 견문을 넓히고 음악적 소양을 자극했다는 그 여행이, 중산계급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서두르면 탈 수 있겠는데요.”
이 도시에서 20여 년을 살면서 가이드로 일하시는 한국인 아저씨가 마감이 임박한 보트 투어를 권하셨다. 떡밥을 물기 딱 알맞은 시간, 보트 선착장도 코앞이었다.
잘차흐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오르는 만석의 보트에 오르니 던들을 차려입고 요들송을 불러도 어울릴 법한, 콧방울 날렵한 어린 미녀 선장이 이끌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빵빵한 엉덩이가 어쩌고저쩌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한국 아저씨들을 중얼중얼 참견하느라 좋은 풍경을 다 놓치고 있었다.
“혼자 다니세요? 용감하시네.”
옆자리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독일에 유학 온 아들 내외를 방문했다가, 함께 음악 도시를 유람하는 중이랬다.
“효자 아들 내외네요.”
립서비스로 급격히 친밀감을 느끼셨나, 귀엣말로, 저희들 좋은 여행 당신은 밥해 주러 따라다닐 뿐이라 투덜대셨다. 이후로도 알콩달콩 아들 내외에 눈 둘 때 없고 귀 나눌 때 없어 자꾸 말을 거셨는데, 아들 내외 사는 모습이 대책 없단 걱정 반 자랑 반이셨다. 그래도 사진기를 들이대면,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더없이 활짝 웃으시던 아주머니.
모차르테움 근처 악보상 앞 조형물
나는 계산 밖의 삶이 전개되면서 좀 예민해졌다. 생각이 많아졌고 몸은 과민해졌다. 어렵사리 쌍둥이를 얻은 데 감사했던 걸, 아이들 재롱에 웃음 헤펐던 걸 모두 잊고 생계형 생활에 깊이 감겨들었다. 또다른 실패와 좌절이 두려웠고, 매일같이 스스로를 채근하기 바빴다. 때론 한여름 유희마냥 느긋하게, 예정 없는 일상과 가짜 웃음을 만들며 살아도 이만큼일 걸, 너무 경직되게 살아 왔다.
무턱대고 기나긴 이날의 산책 끝에 고집스레 찾은 카라얀 생가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렇지만 어제의 김치찌개를 빨리 먹으러 갈 수 있겠다 생각하며 즐거워지기로 했다. 내친 김에 악보상에 들러 손바닥만한 오르골을 골랐다. 그 중 하나는 에마에게 줄 작별 선물로, 태엽을 감자 익숙한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나른한 가을밤이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