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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반북스 Mar 15. 2021

아아, 평화롭던 시절은 갔습니다

[작은 친구들 1호] 박은지의 에세이

* <작은 친구들>은 동물책 소규모 서점 동반북스와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매거진입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준 작은 친구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의미 있고 재미 있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매월 15일에 발행되며 4컷 만화와 크루들이 추천한 도서를 비롯해 채식레시피, 일상의 온기를 담은 에세이를 싣습니다. 



아아, 평화롭던 시절은 갔습니다


하필이면 시야를 다 가릴 정도로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다. 누군가 자신이 키우던 개를 더 데리고 있을 수 없어서 다른 집으로 보내려 한다는 인터넷 카페 글을 보고 나와 남편은 가평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생후 8개월 된 리트리버를 우리 집 넷째로 입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대형견을 키우는 건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꿔보는 로망이 아닐까. 털이 북실북실한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고 얼굴을 묻으면 그것만으로도 방전된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힐링이 될 것 같은 마음. 같이 초록빛 일렁이는 잔디밭을 달리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행복감이 충만할 것 같은 기대감. 이미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던 터라 섣불리 엄두를 못 내고 꿈만 꾸고 있었는데, 어쩌다 본 파양 글에 어쩐지 우리는 마음이 크게 동하고 말았다. 


비를 뚫고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상대편 차 문을 열자 생각보다 커다란 리트리버가 우뚝 앉아서 혀를 길게 빼고 헥헥거리고 있었다. 비 때문에 개를 아기 안는 것처럼 번쩍 들어 우리 차에 태웠다. 짧은 인사 후 우리 차를 타고 낯선 사람들과 낯선 장소로 향하게 된 개는 몇 번인가 끼잉 끼잉 울더니 몸을 웅크린 채 조용해졌다. 잘 키우겠다는 다짐으로 가족을 맞이하는 것이지만 나는 매번 이 순간이 안타깝다. 앞서 키우고 있던 고양이들도 길고양이거나 보호소 출신인데, 셋째 고양이 달이는 보호소에서 나오면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야옹야옹 울었다. 자신에게는 집이었던 곳을 떠나 미지의 장소로 향하는 마음이 얼마나 불안할까. 가평에서 다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꼬리를 말고 웅크린 큰 개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은 여름이로 지었다.


병원에 들러 간단한 검진 후 집에 도착했고,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고양이 세 마리를 입양하며 고양이 합사에는 제법 능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개와 고양이는 어떻게 첫 만남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은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개와 고양이가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여기던 예전과 달리 한 집에서 사이좋게 지내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지 않던가. 게다가 이 개는 리트리버! 강형욱도 천사견이라 인정한 개! 사실 나는 개를 키우는 게 처음도 아니었다. 15년이나 작은 개와 함께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별일이야 있을까? 


일단 목줄을 채운 채로 여름이가 집에 도착하자 고양이들이 일제히 관심을 보였다. 고양이의 경우 낯선 고양이와 만나면 일단 하악질부터 하기 때문에 처음엔 반드시 격리부터 시켜야 한다. 하지만 여름이에게는 고양이들끼리 합사할 때만큼 경계하거나 하악질은 하지 않는 모습이라 일차로 안심을 했다. 하도 오냐오냐 키워서(?) 원래도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용맹한 제이는 멀뚱멀뚱 다가와 여름이 옆에 앉았고, 아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고양이를 처음 만났을 여름이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나를 쳐다봤다. 



착한 개를 데려왔으니 어떻게든 잘 지내겠거니 하는 게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금방이었다. 일단 여름이는 흥분도가 미친 듯이 높았다. 눈을 감고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는 듬직한 리트리버의 모습은 환상이라는 걸 알려주듯 여름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면, 산책하려고 하네스를 채우려고 하면 사람 손이 닿는 순간부터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고 안기고 뒤집고 난리가 났다. 남편이랑 내가 2인 1조로 애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하네스를 채워야 겨우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산책을 나가도 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질주하기 바빠서 나는 매번 손이 빨개져 돌아오곤 했다. 맙소사, 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흘러내리는 에너지를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까, 배터리 용량도 낮고 쉽게 방전되는 ISFP로서는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개와 공놀이를 해본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개의 본능 중에는 그런 게 있다. 움직이는 걸 쫓아가려는 습성……. 여름이는 산책하다가 두 가지를 만나면 백 프로 반응했다. 하나는 비둘기, 하나는 퀵보드를 타고 가는 아이였다. 무언가가 빠르게 휙 지나가면 자신도 같이 따라서 뛰어야 하는 것이었다. 산책할 때야 그나마 목줄로 제어한다지만 여름이의 눈에 집에 있는 고양이들은 어떻게 보였겠는가. 테이블 위로, 책장 위로 휙 빠르게 뛰어오르는 고양이들은 여름이에게는 쉴 새 없이 자극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여름이는 고양이 중 누가 좀 달린다 싶으면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공격성은 없어서 오히려 고양이들에게 하악질을 당한 뒤 기가 죽는다는 것이었고, 다행이 아닌 건 시무룩한 건 잠시뿐 5초 만에 금방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거실과 안방 사이에 안전문을 설치했다. 여름이가 없는 공간으로 고양이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답게 인터넷을 샅샅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개와 고양이 합사’, ‘고양이 쫓는 개’, ‘개 고양이 잘 지내는 법’ 등등 온갖 키워드를 넣어 검색해 보면 생각보다 우리 집처럼 어려움을 겪은 집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6개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이가 안 좋다’는 불안한 경험담도 있고 ‘1년째인데 이젠 서로 몸을 포개고 잔다’는, 희망적이지만 내게는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경험담도 있었다. 아기 때부터 같이 지내는 게 가장 좋다는 조언은 아무짝에 도움이 안 됐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평화는 고양이가 만드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인 나는 거실을 서재처럼 꾸며놓고 썼다. 넓은 테이블, 그 위에 널브러진 고양이, 커다란 계단형 책장, 그 위에 턱을 괴고 누워 있는 고양이, 베란다의 캣타워, 그 위에서 일광욕하는 고양이…… 고양이는 날선 적막함을 평화로운 고요함으로 뒤바꾸는 힘이 있었고, 그 극단적인 고요함을 나는 사랑했다. 



그런 고양이들 눈에는 또 미쳐 날뛰는 이 개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여름이에게도 고양이는 처음이었겠지만, 고양이들도 이런 개는 처음 봤을 것이다. 고양이들은 여름이가 닿기 전에 각기 캣타워나 책장 위로 흩어져서는 이 개를 어이없게 내려다봤다. 서로의 존재를 탐색하는가 싶던 첫날의 가식적인 평화는 금방 와장창 깨져버렸다. 한순간에 거세게 흔들리는 개의 꼬리를 피해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된 불쌍한 고양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하실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놀랍게도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적응했다. 


워낙 온순하고 무던한 달이는 여름이가 자기 꼬리를 깔고 누워도 아무 생각이 없는 편이고, 처음엔 여름이 소리만 들려도 후다닥 도망가 버려서 적응이 영 요원해 보이던 아리는 이제 여름이에게 몸을 비비면서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고양이다운 성격인 제이만큼은 지금도 여름이가 길을 막고 있으면 성질을 내면서 냥펀치를 날리긴 하지만, 제이는 여름이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다. 그렇게 초반의 멘탈 대붕괴를 이겨내고 우리 집은 사람 둘에 고양이 셋, 개 하나의 여섯 생명체가 함께 살게 됐다. 언제나 평화롭던 집은 이제 가끔 평화롭지만, 종족 대통합으로 인한 평화의 밀도가 높아지고 귀여움이 네 배가 되었다는 게 달라진 점이랄까. 예상했던 행복과 예상치 못한 갈등을 모두 끌어안으며, 본격 육견육묘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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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은지

© 동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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