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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Aug 06. 2024

퍼스널 쇼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퍼스널 쇼퍼(2016)



누군가의 영향에 완전히 물들다


모린은 파리에서 그녀의 쌍둥이 형제인 루이스를 기다린다. 정확하게는 그가 자신에게 보낼 메시지를 기다린다. 그녀는 유명인인 키라의 퍼스널쇼퍼이다. 키라의 쇼핑 대리인인 것이다. 그녀는 영매이다. 내세를 믿고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엔 이 정보만으로 모린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크게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공포스런 분위기는 왜 조장한 것이며 엔딩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각도를 조금 바꿔 모린의 말과 행동에 주목해보자. 또한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 간의 관계 그리고 그녀의 반응에도 주목해보자. 이 각도에서 보면 모린은 상당히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녀는 루이스와 아주 긴밀한 관계이다. 심장기형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단 점과 영매이자 내세를 믿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쌍둥이라는 관계가 주는 동일성 즉 일반적인 형제 관계보다 ‘너와 나는 거의 같은 사람이다’라는 그 끈끈한 유대관계가 그렇다. 그와 동일한 운명(심장기형으로 언제 심장쇼크로 사망할지 모른다)과 능력(영매로,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다)을 타고난 모린의 입장에선 루이스를 상당히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나 또한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이기에 더 그렇다. 때문에 모린은 그가 죽기 전에도,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영향권 안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키라의 영향도 받은 듯 보인다. 모린은 직업상 자신의 관점으로 쇼핑을 하게 되기보단 키라가 원하는 것, 키라에게 어울리는 것 즉 그녀의 취향에 맞춰 구매를 해야 한다. 또한 모린은 키라의 지시에 따르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모린은 키라를 싫어하지만, 그녀처럼 해보고 싶단 욕구가 낮은 빈도나마 실현된다. 이 욕구가 본래 모린에게 내재해있었으나 표출되지 못하고 억눌러져 있던 욕구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랬더라면 영화상에서 해당 욕구를 표출하는 것을 주된 주제로 잡았을 것이고 관련된 장면을 지금보다 더 많이 삽입하여 이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엔딩에서의 그녀 모습을 봐도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해서 키라 곁에서 그녀의 쇼퍼로 일하며 일시적으로나마 그녀에게 물든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발신자제한. 이 정체 모를 존재는 계속해서 모린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죽은 자인지도, 산 자인지도 모른 채, 경계하면서도, 가까운 태도로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모린은 그와의 대화로 한동안 핸드폰을 붙들고 산다. 이 과정에서 이전보다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상은 그가 유도하는 대로, 그가 기대하는 대로 움직인다. 정체 모를 존재는 두려움으로써, 해방감을 선사함으로써, 친근함으로써, 그리고 다시 두려움으로써 모린을 조종한다.



나답지 못한 삶


이쯤 되니 왜 모린은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지 궁금해진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이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들은 언제가 될지 모를 나중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 현재만 살아간다. 현재만 산다는 게 지금을 충분히 즐기며 산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도 살아있기 버거운 상태, 즉 물질적, 심적인 여유가 없어서 당장도 근근이 살아있는 상태에 놓인 이들을 향한 말이다. 모린이 그런 상태로 보인다. 그녀는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기형이다. 심장기형인 루이스는 그 영향으로 죽게 된다. 그녀는 자기 쌍둥이 형제와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 고로 그녀 또한 언제 죽게 될지 모른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입장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 자신을 즐겁게 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모린의 곁을 떠난 이들이 있다. 엄마가 일찍이 떠나셨고 쌍둥이 형제마저 떠났고 이제는 키라마저 살해되어 그녀를 떠나갔다. 이별, 그것도 사별은 남은 이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그들의 죽음은 남은 이에게 죽음이라는 각인을 깊게 새긴다. 이런 이유로도 모린은 낙관적인 미래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고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도 즐기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외부의 영향에 물들어간 게 아닐까.


공포와 두려움은 사람을 억압한다. 죽은 자의 존재와 내세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공포, 몰래 금기를 깨뜨렸을 때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은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문제는 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여유를 빼앗고 판단 능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모린은 이 상태에 빠져 더 쉽게 조종당한다.



이제는 나의 현실에서


모린은 루이스를 향해 아주 진한 애도를 표한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신호를 보내기만을 계속 기다린다. 아마 루이스의 혼은 실재했을 것이다. 모린의 곁에 맴돌며 그녀를 지키려 했을 것이다. 라라의 집에서 루이스가 컵을 깨뜨린 씬이 그런 인상을 강하게 심었다(이때의 카메라 앵글이 객관적이었달까). 그러나 엔딩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모린의 상상이었단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루이스는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게 다 모린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을까.


‘심령주의의 본질은 현세 너머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다’라고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말한다. 루이스는 그의 존재를 믿는 누군가의 믿음에 의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이 믿음의 힘, 죽은 이가 이승에 남아있다 믿게 만드는 힘은 결국 미련, 그리움, 죄책감이다. 어윈은 죄책감으로 루이스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모린은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를 날려 보내지 못하고 곁에 맴돌게 했다.


루이스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봐 왔을 것이다. 자신의 신호를 받은 후엔 살아가면서 자신을 잊겠다고 말한 모린이지만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위험해지고 가려져 있던 루이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드러난다. 루이스를 잊지 못하고 한없이 그에게 매여있는 자신을 발견해나간다. 그런 나약하고 종속적인, 그리고 루이스를 놓지 못하고 계속 그리워하는 모린은 그가 떠나지 못하게 단단히 붙든다.


모린의 남자친구인 게리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영화에서 모린이 영매임을 아는 인물 중 유일하게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결론이 난 인물이다. 일련의 사건 이후 모린은 그런 그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이전보다 당당해진 모습으로 이상현상에 맞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상상임을 밝히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의 모린은 루이스가 아닌 존재를 더는 겁내지 않고, 기다렸던 루이스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슬픔과 좌절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루이스를 떠나보내고 이젠 자신의 삶을 살겠단 그녀의 의지가 보인다. 이제 모린은 루이스의 그늘이 아닌 모린의 시간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점점 루이스는 그녀에게서 지워져 갈 것이고, 루이스는 더 그녀 앞에서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로써 완벽한 애도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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