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청춘들이 모여있는 이곳은 수업이 끝나면 학교밖으로 나가 유학생활의 즐거움을 더하기도 하고 또 학교 안의 체육시설이나 노래방등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거나 휴식을 취한다.
물론 그 시간에 도서관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많다.
한 번은 베트남 룸메가 탁구(학교 안 부대시설)를 치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
GYM 옆에 붙어있는 실내 운동실은 (탁구대, 당구대, 노래방, 네 컷 사진기 등이 있다)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활기 넘치는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탁구를 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치다 보니 탁구가 이렇게 재밌는 운동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공을 노려보고 순간 집중력을 요하는 활동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눈과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늙어서도 계속 몸을 움직이고 새로운 것들을 해봐야 하는 것인가 보다.
3세트를 치고 나니 온몸에 땀이 나고 정신도 더 또렷해지는 것이 기분이 아주 상쾌 해졌다.
탁구에 재미가 들린 나는 다음날 일본인 친구 두 명을 더 영입해서 탁구장으로 갔다.
일본팀 대 한베팀(한국, 베트남)의 경기는 일본팀의 승리였다.
신나게 탁구를 치고 있자니, 어느새 다른 학생들도 함께 어울려 팀을 바꿔가며 치게 되었다.
초등학생 이후로 한국에서 탁구를 칠일이 없었는데 뭔가 신선한 경험이다.
탁구에 더욱 심취해 버린 나는 새로운 일본인 룸메가 들어오자 탁구생활에 더 박차를 가했다.
다들 '탁구 치러 갈래?' 물으면 처음에 반기는 모양새는 아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의아한 느낌인 것이다. '탁구는 잘 못 치는데...? 마지막으로 탁구를 친 것이 언제 이 던 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확실히 탁구는 친숙한 종목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700명의 학생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수업 이후에 각자의 시간을 보내라고 한다면 그 선택지는 많지 않다. 저녁식사나 술 한 잔을 즐기러 학교 밖으로 나가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헬스장에서 몸을 단련하는 것 정도인데. 이 탁구라는 것은 여가시간을 때우면서 동시에 잘 모르는 외국 친구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회회 연습도 할 수 있고 덤으로 몸과 정신까지 건강해지는 돈 한 푼 안 들이는 얼마나 경제적이고 고급스러운 활동인가!
그리하여 오늘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일본인 룸메를 탁구메이트로 영입했다. 마침 도서관 바로 옆이 탁구장이었기에 일본인 룸메 코마키는 운동복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탁구장으로 끌려왔다.
처음, 이 낯선 운동경기에 확신이 없는 듯했던 그녀도 역시 나 곧 탁구의 매력에 빠졌다.
나와 루나 그리고 코마키.
한 명이 부족했지만 곧 옆에서 지켜보던 처음 보는 일본인 남학생이 반갑게 합류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사실 루나가 예쁘고 성격도 활달해서 우리가 탁구를 치고 있으면 어느새 학생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새로운 탁구 파트너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루나 덕분에 나는 여러 나라의 어린 친구들과 친목을 도모하며 탁구를 칠 수 있었다. 그저 난 나이면 안 밝히면 되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왠지 내가 나이를 밝히면 좋은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았다.)
보통 2대 2 탁구를 쳤는데, 재밌는 것이 탁구공이 양쪽으로 핑퐁 될 때마다 새롭게 만난 학생들이랑 서로의 궁금한 점을 질문하고 답했다.
그냥 밍밍하게 서서 서로의 정보를 물어보는 것보다 탁구를 치면서 공을 넘겨주는 타이밍에 긴박하게 상대에게 질문하고 또 긴박하게 공을 받아치면서 대답하는 패턴이 되어버린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어디에서 왔는지, 영어를 왜 배우는지, 전공이 무엇 인지, 앞으로 어떤 계획들이 있는지, 다른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등.
우리는 탁구를 통해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질문과 답을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초고도의 고급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심지어 영어로) 이건 단순한 탁구가 아닌 것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서로의 신상을 털면서 즐겁게 탁구를 쳤다.
한 번은 한국의 60대 중후반 정도 돼 보이시는 남학생(?)과 탁구를 치게 되었는데, 그분은 연장자답게 탁구의 신 이셨다. 우리의 탁구실력이 탐탁지 않아 보였는지 갑자기 우리에게 탁구 트레이닝을 시키셨다.
조금 당황했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배웠다.
그 후에 한국인 SJ가 새 룸메로 왔을 때는 탁구뿐만 아니라 탁구대 옆의 당구대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20대 초반에 겨우 두세 번 포켓볼을 쳐본 경험 밖에 없던 난 거의 못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코마키도 마친가 지였는데 취미가 다이버인 독립적인 스포츠여성 SJ는 역시 당구지식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와 코마키는 SJ에게 포켓볼을 열심히 전수받았다.
놀랍게도 포켓볼도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초심자들의 엉뚱한 포즈,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자들의 갈길 잃은 공은 프로처럼 구멍으로 쏙 들어간다. 이런 상황이 자꾸 연출될 때마다 우리는 터지는 웃음과 흥분을 멈출 수 없었다.
탁구와 포켓볼이 이 정도로 재미와 기쁨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학교를 떠나는 마지막까지도 우리는 탁구를 쳤고 운동이 끝난 후 땀범벅이 된 우리 넷은 누가 먼저 샤워를 할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러면서 각 나라의 가위바위보가 달라 또 한 번 웃음보가 터졌다. 이런 게 기숙사 생활의 즐거움이겠지?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아줌마를 어떤 선입견도 없이 친구로 받아준 이 순수하고 착한 어린 처자들, 너무 고맙다.
여기서의 소소한 경험들은 내 기억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 간직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10년 20년이 흘렀어도 가끔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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