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온 지 3주가 지난 주말이다.
중국, 러시아 룸메가 떠나고 새로운 일본인 룸메가 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말이 잘 안 통했던 다른 룸메들과 다르게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할 수 있었던 까닭에 일본인 룸메와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역시 친구가 되려면 소통이 중요한 것 같다.
이 일본인 룸메의 이름은 '코마키'다.(보통 일본인들은 영어이름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코마키는 20대의 간호사로 호주의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난 일본어로 소통하는 것이 영어보다 쉬웠지만 코마키의 영어회화를 방해하면 안 되므로 되도록 영어로 말을 걸었다.
가끔 급하게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나 웃긴 농담 같은 것은 일본어로 소통하곤 했는데 영어보다는 그 의미전달을 정확하게 할 수 있어서 배꼽을 잡고 웃는 상황들도 생긴다. 코마키가 오고 나서 방에서의 생활이 훨씬 즐거워졌다.
그리고 바로 어제 또 한 명의 새로운 룸메가 들어왔다.
이번엔 한국인이었다.
30대 초반의 다이빙이라는 멋진 취미를 가진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었다.
이 한국인 룸메도 여기서의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호주로 갈 계획이다.
한국인 룸메가 온 첫날(물론 입국할 때 새벽 비행기를 탔지만 미리 다른 숙소에서 머물며 다이빙을 즐기다 학교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낮시간에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셋은 생필품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베트남 룸메는 다른 친구들과 해피뉴이어 파티에 갔다)
한국인 룸메는 영어를 잘했고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러 왔기에 서툴러도 서로 영어로 이야기했다.
물건을 사는 도중 한국인 룸메와 일본인 룸메가 서로 소통이 안될 때는 내가 일본어를 듣고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거나 그 반대로 하거나 했는데, 필리핀에서 내 일본어 능력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15년 전 일본에 살 때 쓰던 일본어가 한국에 와서는 사실상 쓸 일이 없어 내가 일본어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혀가고 있었는데, 영어를 배우러 온 이곳에서 빛을 발하다니... 뭔가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쇼핑을 성공적으로(심지어 즐겁게) 마치고 학교로 복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수업 이외의 즐거운 추억이 별로 없었는데 이들을 만나고 소소한 추억들이 하나씩 쌓이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뭔가 이제야 진짜 기숙학교 생활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둘은 미혼이고 직업도 같다. 그리고 여기서 공부를 마치고 호주로 가서 바로 일자리를 구하거나 호주 학교를 졸업한 후 일자리를 구할 계획이다.
나도 여기서 이들과 같이 좀 더 영어공부를 하고 호주로 떠나는 플랜이었다면 어땠을까.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부른다고, 내가 딱 그 짝이다.
난 그 둘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정말 좋은 기회를 갖은 거고 잘할 거라고 그리고 부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농담으로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둘은 같이 가자고 말했다. 난 아이들이 있어서 안된다고 했다.
농담으로 첫째가 20살이 되면 호주로 가겠다고 했다.
그때 호주 시드니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깔깔대고 웃었다.
나에게는 꿈같은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이 들었다.
난 이제 일주일 후면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돌아간다.
여기서의 생활도 즐겁지만 당연히 아이들이 보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도 작은 희망하나는 품고 가고 싶다.
난 다시 평범한 엄마로 주부로 복귀하겠지만 그들과 잠시 꿈을 이야기했던 그 짧고 소중한 기억들이 일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나는 조금씩 더 늙어가겠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잘 성장한 후 홀로 호주로 가는 꿈도 꾸어본다.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늙었다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난 언제든 뭐든 할 수 있다.
난 여기서 또 한 번 그 사실을 깨닫는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니 늘 준비하는 자세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 강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처럼 말이다.
오늘 아침 코마키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브런치를 먹는데, 우리가 일본어를 하는 것을 보고 옆 자리의 새로운 입학생 일본인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 신입생은 놀라며 나에게 몇 개국 어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내가 몇 개 국어를 할 수 있지? 내가 지금 영어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 그렇지만 난 지금 영어로 소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나는 지금 3개 국어 가능자인 것인가? 내가 다중언어 능력자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여기까지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언어는 '재패니즈, 잉글리시, 코리안'이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뭔가 엘리트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평생을 살아온 내가 필리핀에 오자마자 뭔가 대단한 인간이 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 오글거리면 서도 재밌었다.
불과 3주 전까지만 해도 영어도 잘 못하는 그냥 한국의 평범한 아줌마였던 내가 이곳에서 3개 국어 가능자가 되다니.
역시 사람은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
계속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살려고 노력하며 또 그 환경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도록 성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생각했다.
글로벌하면서도 즐거운 브런치 타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