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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펜 May 22. 2024

두 번째 휴일, 독립적인 여성의 하루.

여기는 필리핀 세부.

어학교에 온 지 2주가 지났고 두 번째 휴일을 맞이했다.

오늘은 혼자 시내에 나가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저번주에 일본인 친구와 시내에 나왔을 때 그랩앱 사용법을 익혔다.

보통 동남아 쪽 여행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원활하지 않아서 싸고 편한 그랩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일전에 가족여행으로 베트남에 갔을 땐 남편이 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벌써 늙어가는지, 새로운 것을 처음 접할 때는 잘 몰라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존이 걸린 일이니, 떨리는 마음으로 혼자 그랩으로 차도 불러 타보고 현지 현금인출기에서 돈도 인출해 보고 당연한 거지만 혼자 스타벅스에서 주문도 한다.

결혼 이후 혼자 다른 나라에서 이런 활동들을 하는 것이 수십 년(?)만인지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너무 남편한테만 의지하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주말 나들이의 목적은 필리핀의 유명 패스트푸드 전문점 '졸리비'를 가기 위해서다.

필리핀 일상을 보여주는 유튭 채널을 구독하고 있는데 그 채널을 통해 졸리비를 알게 되었고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생겨 그 맛이 늘 궁금했었다.

사실 저번 베트남 여행 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졸리비를 검색하니 마침 근처에 있어서 가보고 싶었지만 다른 가족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갈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남편은 혼자라도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랩을 잡는 것도 혼자 타는 것도 무서워서 포기했었다.

난 사실 매일 '가족한테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주장하고 꿈꾸면서도 스스로는 전혀 독립의 준비가 안된 사람인지도 모른다.


오늘 혼자서 시내 나들이를 계획한 것도 얼마 전 비슷한 또래의 중국인 룸메한테 따끔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이 독립적인 것인지, 아님 그녀가 특히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끔 '혼자라서 외롭다''여기는 친구 사귀기 힘든 것 같다''혼자서 밥 먹는 게 눈치 보일 때가 있다''가족이 그립다' 등등 약한 소리를 할 때면 아주 강하게 나를 다그치곤 했다.

'넌 멘털이 너무 약해''우리 나이를 봐라. 이제 독립해서 미래를 설계할 나이다''나는 혼자가 좋고 혼자서 뭐든지 한다. 넌 좀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야 해!!'등등 이런 직설적인 말들을 나에게 던지곤 하는데, 사실 난 그녀에게 충고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저 공감과 작은 위로(?) 정도를 바란 것뿐이었지만, 우리는 나라와 자라온 환경과 심지어 성격까지 완전히 반대였다. 극 F인 난 극 T인(아마도) 그녀에게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주말에 홀로 나들이를 결심한 것이었다.

혹시나 시내에 같이 나가주려나 하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그녀의 독설(?)과 함께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랩에서 내리니 영상에서만 보던 졸리비 매장이 눈앞에 딱 보였다.

혼자서 해냈다는 생각에 조금 감격하는 마음으로 매장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장의 분위기는 맥도널드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패스트푸드를 라이스와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난 이곳의 달디단 스파게티와 필리핀 소시지 롱가니사의 맛이 궁금했다.


주문 대기줄에 서서 빠르게 메뉴판을 스캔했다.

'치킨과 밥과 주스 세트''치킨과 스파게티 주스 세트' '롱가니사와 계란 프라이와 밥과 커피세트'중에 열심히 고민하다가 역시 롱가니사의 맛이 제일 궁금했기에 세 번째 세트로 결정했다.

(보통의 필리핀 현지인들은 아침식사로 가정에서 롱가니사와 마늘밥을 주로 먹는다고 한다.)


드디어 주문을 마치고 식사를 받았다.

흥분되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남편한테 사진을 보냈다.

메시지 내용은 '드디어 혼자 그랩 타고 졸리비 옴!'

사실 남편에게 사진을 보낸 이유가 있었다.

남편은 내가 항상 자신한테 뭔가를 묻고 의지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의 이상형은 독립적인 여성이었고, 우리가 처음 일본에서 만났을 때 난 도쿄에 혼자 사는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아니 사실은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의존적인 여성이었을 뿐이었다.(남편의 이 큰 오해는 결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

여기에 온 후 조금이라도 징징거리는 소리를 했다가는 남편에게 무차별하게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남편하고의 통화도 자제하고 있던 터였다.(그러고 보니 극 T인 남편과 그 중국인 룸메는 비슷한 인종인 것 같다. 하지만 가족도 아닌 사람한테 그런 공격을 받고 싶진 않다.)


롱가니사는 고급 소시지 맛은 아니었지만 기름기가 많아 부드럽고 달콤했다. 아주 맛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망스러운 맛도 아니었다.

밥과 함께 먹으니 궁합이 잘 맞았다. 밥은 튀겨진 작은 마늘 조각들이 조금 섞여 있었는데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커피. 커피 마니아인 나의 취향에도 잘 맞았다. 패스트푸드점의 저렴한 커피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맛이었다.

여기에 에그프라이까지 더해져 가격은 한국돈 2200원 정도. 가성비 갑의 메뉴였다.

나의 첫 졸리비 도전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먹으면서 남편과 중국인 룸메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의 독설을 떠올리니 울컥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독립을 외치면서도 그동안 전혀 독립적이지 못했던 나!'

내가 추구하는 진짜 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기 있는 동안에 나의 나약한 마음과 정신을 전부 리셋하고 새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갈길이 멀다. 

이 학교에 오고 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바보 같은 실수들을 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멘털이 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나 자신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나 밖에 없다. 

스스로 이겨내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만약 밖에다 조금이라도 징징거리면, 어느새 극 T들이 달려와서 날 갈굴지도 모른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기로라도 더 씩씩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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